르코르뷔지에 - 건축을 시로 만든 예술가 클래식 클라우드 23
신승철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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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발자취를 신승철 교수의 필담으로 만난다! 발간이 거듭되며 탐서가들 사이에서 단연 으뜸으로 자리잡고 있는 클래식클라우드의 스물 세번째 페이지, [르코르뷔지에] 편을 읽었다.

내가 필로티 건축물을 처음 본 게 언제였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일기라도 써놓는 건데! 지금은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건물 형태고 특히 주차대란에 시달리는 빌라들을 볼 때면 필로티가 아닌 것에 괜히 분개할 정도로 익숙한데 아마도 처음 봤을 때는 무척이나 신기했을 것이다. 건물이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무수히 보고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필로티를 설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모르고 살아왔던 지난날이었는데 어느날 초등학생 딸이 보는 위인전집에서 르코르뷔지에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흥미로웠다. 몇 년전에 읽은 거지만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필로티는 물론이고, 인간의 크기에 맞게 가구를 배치하고 싱크대 같은 주방가구를 조절해서 설계한다는 모듈러 방식이 기억에 남았다. 또, 일반적인 성당과 다르게 지어진 롱샹성당과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는데 친구의 집을 갤러리 형태로 만들기위해 계단이 아닌 오르막길의 형태로 복층을 설계한 것을 보고 우아, 우아를 연발했던 기억이 났다. 마지막으로 인도의 도시 찬디가르를 설계한 사람이라는 말에 으잉? 했었다. 어린이 책이므로 업적만 시간의 순서대로 도열돼 있을 뿐 상세한 설명이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나는 그 책에 상당히 매료됐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만날 운명이었던 걸까.

르코르뷔지에는 스위스 라쇼드퐁에서 시계 장식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위스는 워낙 시계가 유명하니까 한 나라의 장인정도 될 것 같다. 르코르뷔지에의 본명은 에두아르인데 이 책에서도 거의 본명을 이용해 이야기를 전개하므로 알아두는 게 좋겠다. 에두아르도 아버지를 따라 시계 장식가를 해보려고 하지만 스승 샤를 레플라트니에를 만나면서 건축가가 된다. 역시 인생에 있어서 좋은 스승은 길이되고 진리가 된다.

에두아르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유명 건축물을 돌아본다. 그런데 그는 건축양식만 보는 것이아니라 장식가의 면모를 드러내며 색채, 프레스코, 조각 등 장식디자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뭐 여기까지만 보면 유럽의 여타 예술가들과 다를바가 없지만 내가 르코르뷔지에를 위대한 예술가라고 여기는 것은 그가 다른 시각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애를 가지고 있던 르코르뷔지에는 편안한 건축가의 삶이 아니라 다소 어려운 길을 택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설계하고자 마음먹기도 했다.

에두아르는 친구랑 동방여행을 계획한다. 독일, 체코 등 동유럽을 지나 이스탄불, 그리스 등을 돌며 건축에 대한 본인의 시각을 넓히고 공법화한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여러가지 건축적 업적을 남기는데 이미 유명해졌지만 안주하지 않고 비종교인이면서도 종교적 건축물인 성당과 수도원을 건축하기에 이른다. 돈 벌기 위해 그냥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자세를 겸허히 하며 그가 받은 감동을 재현하는 건축양식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대단히 천재적이고 비범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도 있었다. 사보아 건축물은 물이 새서 입주민이 힘들어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유럽 백인 남성답게 이상주의자이기도 해서 기하학 형태와 정돈된 비례를 선호했다고 한다. 자연도 기하학이어야 했다. 그런 시각은 좀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흔히 건축이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는 정말 예술가였다. 늘 실용이나 기하학에만 집착했던 그의 단호한 모습이 깨어진 부분이 있었는데 그리스 아토스산에서 드높은 하늘과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청춘의 희열과 고독을 동시에 경험했다고 한다. 그가 흘린 뜨거운 눈물이 종교적 성찰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위대하고 장엄한 것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의 건축은 예술임과 동시에 시(詩)가 되어가고 있었다.

에두아르는 현대 건축의 시초인 돔이노 건축을 하고,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데자네이루, 알제 등에서 현대도시들을 건설하기도 했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기도 했다. 피카소와 예술적 교류를 나누기도 했는데 갑자기 아는 사람이 나와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이 책은 워낙 방대한 것을 다루는만큼 리뷰에 다 적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책을 덮고 이렇게 생각날 수 있다는 것은 저자의 문장력도 무시 못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재밌게 읽었다. 르코르뷔지에라는 사람을 제대로 소개받은 기분이랄까.

삶 자체가 특별했던 사람 르코르뷔지에. 죽는 것도 평범 할 수가 없다. 태양으로 헤엄쳐 가는 것을 동경했던 에두아르 할아버지는 73세의 나이로 바다에서 익사로 생을 마감한다. 가장 빛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헤엄치면서 장엄하게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다. 진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지중해에서 예술적 영감으로 다시 태어나고, 지중해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원래의 것으로 회귀라고 일컫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게 예술이라면 건축이야말로 생활에 밀접한 가장 친근한 예술이다. 미술이나 조각, 음악과 문학은 인간의 정신을 이롭게 하지만 공간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건축은 인간이 생을 유지하는 필수 조건 중의 하나인 '주'를 담당하면서 인간에게 가장 이로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현대사회를 살면서 '주(住)' 에게 인간 본연의 감정을 중시 여기는 공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단 '남의 눈', '평수' , '물질적 가치' 로만 가치를 두고 있지는 않나 싶어 반성하게 됐다.

때론 인류애적인 감성으로, 때로는 미(美)에 대한 경외와 찬양으로, 때론 거부할 수 없는 거룩함과 신성으로 현대건축의 미래를 선도했던 르코르뷔지에를 만나게 돼서 정말 정말 좋았다.

특히 아름다운 사진들과 르코르뷔지에의 말과 사상들을 꼼꼼하게 만날 수 있어서 넘 근사한 경험이었다. 비대면 언택트 사회에 이 책으로 돌아가신 천재 건축가 양반과 제대로 조우할 수 있게 돼서 클래식클라우드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참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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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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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사후세계를 믿는가. (나는 천국을 믿는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희곡 [심판]은 사후세계로 간 폐암환자 아나톨의 환생과정을 다룬 다소 불교철학적인 작품이다. 국내의 책쟁이들 중에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모르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을테니 그의 소설은 차치하고 희곡작품 중에서는 이번이 두 번째다. (사실 나는 첫번째인줄 알았다. 요즘 좀 관심이 뜸했네)


베르나르는 원래부터 인간의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동양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오죽하면 제목이 [죽음]인 소설이 있겠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연 [나무]인데 추천도 참 많이 했다.


아무튼 이 책은 폐암수술을 하던 아나톨이 자기가 죽은지도 모른채 천사들을 따라 재판관 앞에 서서 자기 삶을 돌아보는데 희곡이다보니 대화위주라 너무 정신이 없었다. 무슨 만담처럼 휙휙휙휙 이야기가 진행되는 느낌이랄까.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이 마주보고 섰고 가운데 사람 뒤에 한 사람이 서 있어서 툭 치면 뒤로돌고, 그럼 뒤에사람이 또 툭치면 또 뒤로 돌고, 뒤로 돌고, 다시 돌고 (계속 돌아서 미안합니다) 뭐 그런 정신 사나운 느낌이었다.

등장인물이 서로 말하려고 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아나톨이 지은 죄과나 선행들이 프롬포트 화면에 나타나고 그는 아주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부터 죽기 직전까지 자기의 모습을 3자의 눈으로 본다. 그리고 발견한 놀라운 사실. 변호사인 카롤린이 자기의 수호천사였고, 아나톨의 인생은 지금까지 4번이상 환생되었으며, 환생하기 전에는 늘 자기의 삶을 정해진 모듈에 따라 선택했었다는 것. 아나톨은 죽기 전에 판사였는데 학교다닐때 동아리에서 연극반이었다. 정해진 운명은 연극배우가 돼서 어떤 여자랑 결혼하는 거였는데 아나톨은 저승의 재판 중에 고른 자기의 직업 (배우) 을 잊고 지금의 직업인 판사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정해졌어도 여러가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나톨은 이제 다시 부모와 자기의 직업, 취미나 핸디캡 등을 설정해야 하고 바로 환생을 해야하는 가운데 있다. 이게 뭐야, 죽자마자 바로 다시 태어나라고? 심지어 이렇게 급하게 인생을 결정하라고???


다소 정신없긴 하지만 저자의 철학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베르나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임은 확실하다. 작가는 사람이 죽으면 환생한다는 윤회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카르마나 업보 등의 단어를 활용하고 있어서 동양의 불교사상을 제대로 공부했구나 싶었다. 작가는 개인이 인생에서 이루는 모든 일- 부모, 학업, 성격, 직업, 핸디캡, 질병, 죽는 방법까지도- 을 이전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설정했다.

 다만 유전 25%, 카르마가 25%, 자유의지가 50%가 들어가기 때문에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너무 재밌는 설정이다. 환생 같은 건 당연히 믿지 않지만 유전과 카르마, 자유의지의 비율은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ㅎㅎ


또, 베르베르는 약간의 권선징악적 요소도 넣어놨다. 우리 구전 문학 [덕진다리]의 원님(원님이 죽어서 저승에 갔는데 곳간에 볏짚이 달랑 하나 있었다. 알고보니 이승에서 빈곤한 임산부에게 샅자리를 빌려준 선행의 증거였다)처럼 얼떨결에 베푼 선행들도 점수로 넣어준다. 이승에서의 삶이 좀 더 고통이거나 반대로 업적을 세우면 내세의 삶은 좀 더 윤택해지는 인과응보를 차용해 둔 것도 재밌다. (환자를 버리고 골프치러 간 의사도 벌을 받고 ㅋㅋ)


제일 재밌는 것은 결말이었다. 아나톨이 판사출신인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심판]을 아직 안 읽은 독자를 위해서 스포는 삼가겠다. 하지만 마지막은 정말 재밌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반전 ㅋㅋ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데 가장 모르는 것 중에 하나가 삶의 전개와 죽음 이후의 삶이다. 혹자는 죽고나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세에 뭐가 있어도 있을거라고 믿는다. 누구나 죽음을 거스르고 싶어하며 이별을 가슴아파 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신뢰하기도 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고 싶어한다.


그렇게 궁금하고 알 수 없는만큼 문학적 상상력을 힘껏 끌어내는 것도 당연히 사후세계이다. 최근에는 죽음을 보류하는 소설들도 많이 등장한 것 같다. 죽고나서 바로 저런 심판대나 영원한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이아니라 가기 전에 죽음이 보류돼서 전지한 어떤 존재로 산자처럼 살아가는 유예 스토리들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이별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기인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친대도 다시 태어나고, 죽음을 늦춘대도 분명한 현실은 죽음은 반드시 온다는 것. 이런 문학들로 죽고 난 후의 세계를 맛봤거들랑 자 이제 우리는 고민하자.


한 번 뿐인 나의 삶,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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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셜리 클럽 오늘의 젊은 작가 29
박서련 지음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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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낯선 곳에 가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자라면, 그것이 자의에 의한 발걸음이라면 누구나 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여행으로부터 시작해서 여행으로 진행되는 삶, 그래서 늘 설레고 인생을 전개하다 순간순간 가슴 한쪽이 오래 뗀 군불처럼 뜨거워서 들썩거리게 되는 온 몸의 감각.


스물 한 살의 설희는 발리에 갔다가 호주 멜버른으로 간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서. 엄마는 시시로 간섭하듯 문자를 보내고, 설희는 싫다. 치즈공장으로 일자리를 얻고 외곽의 셰어하우스에 들어갔다. 수퍼바이저는 간혹 시내로 셰어하우스 애들을 실어날라 준다. 주중에는 일하지만 주말에는 시간이 많은 설희는 갈 곳이 없다.


우연히 페스티벌에서 셜리클럽을 알게 된 설희. 그녀의 영어이름이 셜리인지라 할머니들이 죄다 셜리인 이 클럽에 강한 호기심이 생긴다. 클럽 근처에서 우물쭈물 하던 사이, S를 만난다. 한국계 독일교포 3세로 한국말은 거의 못하고 영어로 설희와 대화를 한다. 설희와 S는 모두 외로운 인물. 각자의 조국을 떠나와서 호주라는 낯선 곳에서 거주하고 있으니 그럴수 밖엔. 서로를 알아가며 친해진다.


그 와중에 설희는 셜리클럽의 명예 멤버가 된다. '셜리'는 한 때 유행했지만 지금은 한물간 이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순자, 복자' 정도 되는? 셜리는 외국인이 아니어서 정식 이름은 아니지마는 영어학원에서 흔히 짓는 영어이름, 그러니까 별명인 셈이다. 셜리는 그 곳에서 할머니들 (개중엔 아주머니들도)과 시간을 보내며 친분을 쌓는다.


설희는 치즈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많이 아팠다. 마스터는 쉬라고 했고 쉬었지만 치즈공장 오너가 설희를 해고했다는 말을 듣게 되고 셰어 하우스에서도 나갈 위기에 놓였다. 알고보니 마스터가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임의로 자른 것. 그러나 복직이 가능했음에도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설희.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린 S를 찾아 무작정 떠난 설희를 도와주기 위해 다른지부의 셜리클럽 할머니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면서 점점 설희는 자기를 발견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스포방지를 위해 결말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마음에. 쏙 들긴 했다. 뭔가 사랑사랑 한 것이 아직도 좋고 그리운 기혼여성이라서 그런지 여행지에서 사랑에 빠지고, 만난지 얼마 안되는 남자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무턱대고 달려가는 로맨스는 여기서는 절대 불가능 할 것 같으면서도 희한하게 응원하게 되는 그런 멜랑꼴리였다.


그러나 내가 집중하게 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설희와 엄마와의 관계다. 설희의 부모는 일반적인 부모가 줄 수 있는 류의 사랑을 설희에게 주지 않았다. 이혼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이혼가정이어도 성숙한 태도로 아이를 바르게 양육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설희는 철없는 엄마로부터 필터없는 감정적 학대를 당했다. 아이들에게 아빠를 험담하는 것은 뿌리를 부인당했다고 느끼게하는 감정적 학대행위다. 설희는 아빠를 좋아했지만 엄마는 끊임없이 아빠를 미워했고, 설희를 보면서 신세를 한탄했다. 아빠에게 상처를 주려고 딸을 희생시켰을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를 끊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을 포기한 후의 권태로운 삶을 살기가 버거웠던 설희는 이 나라를 떠나기로 했다. 3개월동안.


설희는 어릴때 가수였던 아빠와 캐롤음반을 낸 적이 있고, 꽤 잘됐다. 그래서 연금처럼 음반 수익금이 통장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깨진 꿈이 아쉬웠던 듯 방황한다. 끊임없이 딸의 존재를 부정하게 유도하는 엄마를 견딜 수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와도 잘 안 받는 설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설희는 알게된다. S를 사랑하는 자기를 보면서 엄마의 치기어린 사랑을 이해한다. 셜리클럽의 할머니들을 보면서 지나간 것들에 대한 향수를 , 지난 후에 깨닫게 되는 찰나의 눈부심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엄마를 용서하는 것, 사랑을 마냥 기다리지 않고 끝내 찾아가서 쟁취하는 것. 용감함과 로맨스가 탑재된 설희의 여행은 평생 가슴을 뛰게 만드는 젊은 날의 눈부심이 되었다.

이 소설은 재밌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테이프의 앞면과 뒷면을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일시정지버튼도 있고, 재생도 있다. 일시정지는 지금의 설희가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녹음한 형태를 가졌고, 재생은 과거의 설희가 호주여행을 서술하는 형태를 가졌다.


오래전에 좋아하는 오빠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서 테이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녹음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도 테이프 세대여서 이런 아날로그적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잃어버린 세대를 찾아서 같은 기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지나고나면 돌려서 녹음할 수가 없다. 지금처럼 어플에서 돋보기에 제목 절반만 쳐도 바로 플레이 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라디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좋은 노래가 나오면 언제든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진 네모버튼을 꾹 누를 수 있도록 화장실도 안가고 기다리면서 안테나 길게 뺀 라디오에 귀를 밀착했었다.


여행지에서의 사랑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녹음하는 테이프 같았다. 지나가버리면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그래서 지키고 있어야 하고 행여 잘못 녹음되면 끈기를 가지고 다시 찾아야만 하는. 기다림도 쫓아감도 모두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니까. 셜리가 돼버린 설희의 레코딩은 그래서 성공이다. 행복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솟았다.


흘러가는 세월의 페이지에서 나는 무엇을 기록하여 둘까.


정말 재밌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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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융 - 영혼을 파고드는 무의식 세계와 페르소나 탐구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심리학 3대 거장
칼 구스타프 융.캘빈 S. 홀 지음, 이현성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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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거장 칼 쿠스타프 융을 만난다. 사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름을 무지하게 들어본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영혼의 세계와 페르소나를 탐구한 정신의학의 명의 칼 구스타프 융의 사상과 그의 말, 그의 생애를 알아보았다.


심리학이라는 것 , 사실 전문가가 아니라서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책과 함께라면 쉽게도 접근이 가능하니 융이니, 아들러니, 프로이드니 거창한 이름은 들어봤어도 내용은 모르겠다, 알고 싶다 하시는 분은 스타북스에서 출간한 [칼 쿠스타프 융]과 함께 경험해 보시길 추천한다. 줄을 박박 쳐가면서 읽었다. 


여러분은 간밤에 꿈을 꾸셨는지?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라 때로는 피곤하고 잔 것 같지 않다. 융은 인간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존재하며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이야기한다. 의식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욕망이나 몰랐던 욕망이 꿈에 나온다는 것. 모두 동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공포영화 보고 난 후에 악몽을 꾼다든가, 잠들기 직전까지 너무 빠져들었던 책이 꿈에서 어지럽게 전개 된다는 것을 경험한 나로써는 아니라고 보기도 어려운 흥미로운 이론이다. (신혼 때 남편이 바람피우는 꿈을 꾼 적도 있다 ㅋ)


칼 융은 1875년 스위스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았지만 사춘기를 거치며 교리에 의문을 갖게 되고 신앙인과는 반대되는 길을 걷는다. 의사가 되었고 심리학을 과학에 입각해 연구하기는 했지만 '우연'이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음으로 전능한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독교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상을 전개하였다.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융은 인격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는데 의식은 자아와 페르소나를 가지며 무의식은 그림자와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를 갖는다. 페르소나는 자아에 반하는 인격으로 내가 인식하는 '나' 와는 또 다른 '나' 이다. 인간은 누구나 복잡하고 어려워서 여러가지 요소가 섞이면서 인격을 발현한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하는 자아도 있다. 여성성은 아니마, 남성성은 아니무스인데 사람은 주로 어머니를 보면서 아니마를 정립하고, 아버지를 보면서 아니무스를 정립한다. 내가 남편이랑 부부싸움을 한다면 나는 남편에게 원하는 아니무스가 충족되지 않았음이고, 남편은 본인이 원하는 아니마가 나에게 발현되지 않기 때문에 함께 다투는 것이다. 인간은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놓고 늘 다툰다. 그것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향이 현실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은 에너지를 만든다. 긴장이 없으면 에너지가 없고 나아가서 인격도 없다고 책은 말하고 있다.


또, 앞서 말했듯이 꿈은 무의식이 발현되는 곳으로 융은 꿈에 태고의 유형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점은 프로이트도 언급했는데 융이 프로이트와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프로이드는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에 콤플렉스를 만드는데 그것이 언젠가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 공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오히려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억압된 콤플렉스가 문제 행동으로 나오기도 한단다.


우리는 남들에게 우리의 정신상태를 투영한다. 그래서 남들과 관계가 좋지 않을 경우에 우리의 정신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외적 갈등은 반드시 인격 내부의 부조화된 투영이라 밖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면 내적 부조화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p.163)


혹시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 있어서 괴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조화를 먼저 점검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면 좋을 것 같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한데 분노와 서운함이 점철된 인간에게 '나'를 먼저 점검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심리학에 의거해 좀 더 발전적인 인격을 소유하고 싶다면 참고해봐도 좋을 것이다.


심리치료의 첫번째 목적은 환자에게 보장이 없는 행복한 상태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이성적 인내를 갖도록 돕는 데에 있다고 한다. (p.178)

나는 융이 했던 말 중에 이 말이 가장 와 닿았다.


모든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개성의 최고 실현 형태가 바로 인격이다.

인격은 인생에 맞닥뜨리는 고도의 용기이며, 개인을 구성하는 요소의 절대적 긍정이다.

또한 보편적인 생활 조건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적응이며

그와 동시에 최대 가능한 자기 결정의 자유이다.

p.178


요즘 '인성에 문제있어?' 라는 말이 유행어다. 인성과 인격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면 문제가 많기 때문에 이런 말이 유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인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나 자신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려면 고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올바른 인격을 갖기 위해 남을 의식하지 않고 마구행동을 하는 것은 또한 바른 인격을 소유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며 그렇다고 지나치게 자기 희생으로 남만 배려한다면 역시 용기있는 인격 소유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책임과 자유가 수반되는 용기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나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융도 읽고 아들러도 읽고, 프로이드도 읽는 게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생활조건에 만족하며, 자유의지도 잃지 않아서 모쪼록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해 나갔으면 좋겠다.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배타적인 것이 넘실대는 세상이다. 남탓이 만연하고 분열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럴수록 우리는 내면의 부조화를 해결해 갈등을 완화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제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만 모든 문제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인과도 목적도 아닌 우연한 요소, 융이 말한 '동시발생' 이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기저를 탐구하는 것은 좋지만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인류애이고, 사랑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책 한권 읽었다고 심리학 박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책을 읽어보니까 관계가 힘들 때는 사랑을 선택하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해서 더불어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이 책을 정리한 사람은 캘빈 홀이라는 심리학 박사다. 그런데도 칼 융이 공동저자인 것처럼 돼 있는 것은 책의 말미에 칼융이 직접 소개하는 자기 자신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융이 겪었던 고민, 그가 가진 철학적 사고와 분석심리학이라는 사상 확립의 계기, 프로이드와의 만남 등이 그의 목소리로 들어있다. 사상만 정리할 수도 있었는데 융의 자서전(?) 같은 것도 들어가 있다. 제목이 '분석 심리학' 이 아니라 '칼 구스타프 융' 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주 일목요연하고 흥미로운 책이었다.


또, 챕터마다 정리가 돼 있어서 읽기가 좋았다. 쉽게 풀어놨지만 그래도 이름부터 어려운 심리학아닌가. 하지만 예로 제시된 것이 머리에 쏙쏙 박히고 참 좋았다. 표지만큼이나 멋진 책이다.

모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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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 초판본 비밀의 화원 - 19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박혜원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때 소공녀를 엄마가 사줘서 읽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가 소녀일 때 이 책을 읽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재밌었다. 봄이 온 것 같았다. 숨차게 읽었다. 내가 다 벅차오르는 지경이었다. 때로는 세 명의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지긋한 중년이 되었다가 때로는 열살 짜리 아이들과 뛰어놀고 싶은 어린이의 마음이기도 했다. 늘 무겁고 숨겨둔 이야기가 많은 어른 고전만 읽다가 어린이 고전을 읽으니 마음이 괜히 푸근해지고 뭔가 따뜻한 느낌이었다. 때로는 동화가 어린이를 위한 게 아니라 어른을 위한 거라더니, 이 책도 어른을 위한 책이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받아 읽게 됐지만 정말 읽길 잘했구나 싶었다.


인도에 사는 영국인 메리 레녹스는 괴팍한 성격의 소녀이다. 병약했던 아버지, 파티광인 어머니 사이에서 없는 애처럼 살았지만 하인들에게는 매우 못됐게 굴었다. 메리의 보모-아야-는 메리의 엄마가 메리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숨겨서 키우다시피 했다. 그런 엄마와 애착관계가 없던 메리는 더 난폭해질 뿐이었고, 간혹가다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는 아름다웠으나 차가웠다. 앞 부분을 읽으며 엄청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콜레라가 돌았고, 메리는 하인들이 죽거나 떠나자 놀이방에 숨어있었다. 어느날 군인들이 와서 저택에 혼자 있는 메리 레녹스를 발견하고 그의 친척에게 보낸다. 메리는 영국으로 돌아온다. 고모부 크레이븐이 후견인이 되어 그녀를 돌봐주겠다고 한 것이다.


원래 성격이 포악했던 메리는 오자마자 영국에서처럼 살려고 한다. 하지만 하녀 마사는 메리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옷도 혼자 입으라고 하고 아가씨의 말을 듣기보단 자기 말을 더 많이 하는 등 희한하게 군다. 그러나 마사가 해주는 이야기들에 메리는 생각이 움직이고, 특히 마사의 동생 디콘이 황무지에서 놀면서 동물들과 교감하는 이야기는 늘 혼자였던 메리를 뒤흔든다. 그러다가 마사의 권유로 밖에 나가고 비밀의 정원을 궁금해 한다. 디콘의 도움으로 정원을 가꾸기로 한 메리는 엄청난 비밀을 디콘과 공유한 채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그러던 중 간간이 들리던 울음소리의 근원지를 발견한 메리는 자기와 동갑의 병든 사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메리에게 크레이븐의 아들 콜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몰랐던 것. 게다가 콜린은 메리보다 더 포악하고 하인들에게 무례하다. 메리는 이미 밖에서 뛰어놀면서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콜린의 고집과 심약한 마음을 가슴아파 하고 그를 고쳐주고자 마음먹는다.

콜린은 서서히 건강해지고 메리와 디콘, 콜린은 비밀의 정원에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콜린은 건강해지고 크레이븐이 돌아온다.



이 소설은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럴만도 하다. 너무 잽싸게 읽을 수 있을만큼 재밌게 잘 썼다. 정원을 묘사하는 장면은 벅차기까지 해서 읽는 동안 숨이 찼다. 아름다웠다. 오스카와일드의 [거인의 정원]도 약간 생각났지만 그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일단 감춰진 것은 형용하기 힘든 매력이 있으니까.


이 소설 속에서 소어비 가족을 제외한 두 명의 어린이들은 모두 어머니가 결핍돼 있다. 콜린은 태어난지 얼마 안돼 어머니가 낙상으로 죽었으며, 메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아들이 아니란 이유로 어머니와의 애착에서 제외됐으며, 그마저도 일찍 죽어 아이를 홀로 세상에 남도록 했다. 밥은 굶지 않았을지 몰라도 애정에 굶주렸으며 어린시절부터 학대아닌 학대에 노출된 채 병약하게 자랄 수 밖에 없었다. 반대로 디콘과 마사는 고된 노동과 굶주림에 고생하면서도 착하고 바르게 잘 자랐다. 그것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현명하고 현숙한 참된 어머니 상이다. 

그 어머니는 자기 자식 뿐아니라 남의 자식들에게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중요한 인물이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도 까닭없이 그녀를 좋아한다. 메리에는 이방 저방 돌아다니면 싸대기를 때린다고 엄포를 놓던 가정부 매들록 부인도 수전 소어비를 거의 존경하다시피 하며, 아내가 죽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우울한 부자 크레이븐도 수전 소어비의 말이라면 즉각 행동에 옮긴다. 정말 희한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일찍이 모성에 대해 상당히 아름답고 고귀한 생명의 진원지로 바라보고 회복과 치료의 도구로 삼았다. 그래서 모성을 발현할 수 없는 어머니는 사고로든 질병으로든 요절하게 만든 것은 아닐런지.


또, 이 소설은 이심전심이 떠오르는 소설이다. 메리를 걱정하는 마사의 마음이 콜린을 걱정하는 메리의 마음으로 전이된다. 동물을 사랑하는 디콘의 마음은 메리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며, 그런 메리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콜린에게, 그리고 엄청나게 먼 곳에 도망가 있던 아버지 크레이븐에게 전달되게 한다. 사실은 동화적인 설정이지만 그래도 재밌다. 급기야 동물들도 마음을 갖는다. 새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때는 이야기가 소설인 것도 잊고 동심으로 푹 빠져들기도 했다.


신분의 파괴도 볼 만 했다. 아무리 부모를 잃었어도 엄연한 귀족의 친척인 메리에게 매들록부인이나 벤 노인이 함부로 말하는 것, 실제로 메리도 처음에는 반말을 했지만 나중에는 존칭으로 서서히 바뀌는 모습들이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메리도 그러한데 이야기의 말미에서는 평민인 소어비부인이 귀족의 아들인 콜린에게 '아가' 라고 부름으로 그저 어머니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장면은 당시로는 박수가 나오는 - 혹은 그 반대?- 부분이었을테다.


대자연의 품에서 아이들이 살찐다는 것은 대단히 동의하는 바이다.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은 학교도 못가고 집에 틀어박혀 있으니 불쌍하다. 대자연에는 코로나가 있을리 만무하지만 마음먹고 차를 타고 가 드넓은 들판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는다면 삼십분도 버티지 못하고 울어버릴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자연에서 뭘하고 놀아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놀 것은커녕, 볼 것도 읽을 것도 없었던 메리는 나가서 사람을 보았다. 벤노인이 뭐하는지를 보았고, 그 후엔 새를 보았고, 호기심을 가졌고 마침내 비밀의 정원에 입성했다. 방안에만 갇혀있던 폴린은 황무지에서 희망을 보았고, 결국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죽음만을 기다리던 나약한 아이가 미래를 설계하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대단한 진보다.


다만, 분명히 메리레녹스가 주인공이었는데 결말은 콜린과 아버지 크레이븐씨의 화해로 귀결되어서 좀 아쉬웠다. 아이들이 어린이에서 내용이 끝났다는 것도 아쉬웠다. 아마 나는 [빨간 머리 앤] 정도의 획기적인 성장 쯤을 기대했나보다.


어쨌든 정말 재밌게 읽었다. 단숨에 읽었고, 어른들의 소설에서 숨겨진 뜻을 발견하느라 우왕좌왕 했던 독서말고 만화보듯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중간중간 삽화도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읽게 된다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영국 요크셔 지방의 사투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전라도 사투리를 차용했는데 처음에는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뒤에서는 왜 그렇게 설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작가든, 번역가든 고민 많이 했구나 생각했다.


이 소설을 만나게 돼서 기뻤다. 아메리카노만 먹다가 달달한 코코아 한 잔 기분좋게 마신 기분!


#비밀의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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