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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셜리 클럽 ㅣ 오늘의 젊은 작가 29
박서련 지음 / 민음사 / 2020년 8월
평점 :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낯선 곳에 가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자라면, 그것이 자의에 의한 발걸음이라면 누구나 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여행으로부터 시작해서 여행으로 진행되는 삶, 그래서 늘 설레고 인생을 전개하다 순간순간 가슴 한쪽이 오래 뗀 군불처럼 뜨거워서 들썩거리게 되는 온 몸의 감각.
스물 한 살의 설희는 발리에 갔다가 호주 멜버른으로 간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서. 엄마는 시시로 간섭하듯 문자를 보내고, 설희는 싫다. 치즈공장으로 일자리를 얻고 외곽의 셰어하우스에 들어갔다. 수퍼바이저는 간혹 시내로 셰어하우스 애들을 실어날라 준다. 주중에는 일하지만 주말에는 시간이 많은 설희는 갈 곳이 없다.
우연히 페스티벌에서 셜리클럽을 알게 된 설희. 그녀의 영어이름이 셜리인지라 할머니들이 죄다 셜리인 이 클럽에 강한 호기심이 생긴다. 클럽 근처에서 우물쭈물 하던 사이, S를 만난다. 한국계 독일교포 3세로 한국말은 거의 못하고 영어로 설희와 대화를 한다. 설희와 S는 모두 외로운 인물. 각자의 조국을 떠나와서 호주라는 낯선 곳에서 거주하고 있으니 그럴수 밖엔. 서로를 알아가며 친해진다.
그 와중에 설희는 셜리클럽의 명예 멤버가 된다. '셜리'는 한 때 유행했지만 지금은 한물간 이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순자, 복자' 정도 되는? 셜리는 외국인이 아니어서 정식 이름은 아니지마는 영어학원에서 흔히 짓는 영어이름, 그러니까 별명인 셈이다. 셜리는 그 곳에서 할머니들 (개중엔 아주머니들도)과 시간을 보내며 친분을 쌓는다.
설희는 치즈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많이 아팠다. 마스터는 쉬라고 했고 쉬었지만 치즈공장 오너가 설희를 해고했다는 말을 듣게 되고 셰어 하우스에서도 나갈 위기에 놓였다. 알고보니 마스터가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임의로 자른 것. 그러나 복직이 가능했음에도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설희.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린 S를 찾아 무작정 떠난 설희를 도와주기 위해 다른지부의 셜리클럽 할머니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면서 점점 설희는 자기를 발견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스포방지를 위해 결말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마음에. 쏙 들긴 했다. 뭔가 사랑사랑 한 것이 아직도 좋고 그리운 기혼여성이라서 그런지 여행지에서 사랑에 빠지고, 만난지 얼마 안되는 남자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무턱대고 달려가는 로맨스는 여기서는 절대 불가능 할 것 같으면서도 희한하게 응원하게 되는 그런 멜랑꼴리였다.
그러나 내가 집중하게 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설희와 엄마와의 관계다. 설희의 부모는 일반적인 부모가 줄 수 있는 류의 사랑을 설희에게 주지 않았다. 이혼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이혼가정이어도 성숙한 태도로 아이를 바르게 양육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설희는 철없는 엄마로부터 필터없는 감정적 학대를 당했다. 아이들에게 아빠를 험담하는 것은 뿌리를 부인당했다고 느끼게하는 감정적 학대행위다. 설희는 아빠를 좋아했지만 엄마는 끊임없이 아빠를 미워했고, 설희를 보면서 신세를 한탄했다. 아빠에게 상처를 주려고 딸을 희생시켰을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를 끊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을 포기한 후의 권태로운 삶을 살기가 버거웠던 설희는 이 나라를 떠나기로 했다. 3개월동안.
설희는 어릴때 가수였던 아빠와 캐롤음반을 낸 적이 있고, 꽤 잘됐다. 그래서 연금처럼 음반 수익금이 통장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깨진 꿈이 아쉬웠던 듯 방황한다. 끊임없이 딸의 존재를 부정하게 유도하는 엄마를 견딜 수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와도 잘 안 받는 설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설희는 알게된다. S를 사랑하는 자기를 보면서 엄마의 치기어린 사랑을 이해한다. 셜리클럽의 할머니들을 보면서 지나간 것들에 대한 향수를 , 지난 후에 깨닫게 되는 찰나의 눈부심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엄마를 용서하는 것, 사랑을 마냥 기다리지 않고 끝내 찾아가서 쟁취하는 것. 용감함과 로맨스가 탑재된 설희의 여행은 평생 가슴을 뛰게 만드는 젊은 날의 눈부심이 되었다.
이 소설은 재밌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테이프의 앞면과 뒷면을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일시정지버튼도 있고, 재생도 있다. 일시정지는 지금의 설희가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녹음한 형태를 가졌고, 재생은 과거의 설희가 호주여행을 서술하는 형태를 가졌다.
오래전에 좋아하는 오빠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서 테이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녹음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도 테이프 세대여서 이런 아날로그적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잃어버린 세대를 찾아서 같은 기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지나고나면 돌려서 녹음할 수가 없다. 지금처럼 어플에서 돋보기에 제목 절반만 쳐도 바로 플레이 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라디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좋은 노래가 나오면 언제든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진 네모버튼을 꾹 누를 수 있도록 화장실도 안가고 기다리면서 안테나 길게 뺀 라디오에 귀를 밀착했었다.
여행지에서의 사랑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녹음하는 테이프 같았다. 지나가버리면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그래서 지키고 있어야 하고 행여 잘못 녹음되면 끈기를 가지고 다시 찾아야만 하는. 기다림도 쫓아감도 모두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니까. 셜리가 돼버린 설희의 레코딩은 그래서 성공이다. 행복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솟았다.
흘러가는 세월의 페이지에서 나는 무엇을 기록하여 둘까.
정말 재밌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