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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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유전강화길아르테


서로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통은 함께 경험한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p.17


이 책은 구성이 특이하고 좀 어렵다.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게 무슨 소리지 싶을 수 있다. 이해한바로는 해인마을이라는 깡시골에 사는 두 소녀가 대학에 안정적으로 붙기위해 백일장에 참가하고 싶어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민영과 진영은 모두 백일장에 참가하고 싶어한다. (안타깝게도 학교에서는 단 한명만 내보내준다. ) 그래서 서로 글을 지어 학우들에게 보여주고 누구 글이 좋은지 판가름하기로 약속을 한다. 그리고 끼어드는 스토리들은 다양히다. 교통사고가 난 여자이야기, 옹주로 태어난 여자의 일생이야기, 데이트폭력에 시달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 가난하고 무능한 남편과 결혼해 힘들게 살아온 여자이야기 등.


누구의 이야기인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민영의 이야기고, 진영의 이야긴지 알지 못하겠다. 복잡하고 지난한 꿈을 여러편 연달아 꾼 기분이다. 잦은 변주 속에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숨이 너무 짧아서 속상했다. 더 깊이 빠지고 싶은데 맛만 봤다고 할까? 그러나 썰매를 탄 것처럼 쭉쭉 미끄러져갔다. 더 읽고 싶었다. 손안에 잡은 책장이 수시로 넘어가는 건 비단 책이 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도서 설명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은 감정의 기록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겪은 수치심, 모멸, 행복, 고통, 괴로움, 궁금함, 열병, 배신, 치욕 등의 감정들이 고밀도로 들어차 있는데 기록하지 못해서 변비처럼 꽉 들어차 상처로 발현돼 있다. 강화길의 소설은 다르다. 여자들의 삶이 문자로 기록돼 '너도 그러니? , 나도 그렇다.' 하고 있다. 무거운 이야기지만 덜외로운, 그러니까 결코 혼자가 아닌 이야기들이 묵직하게 담겨있다. 누가 '작은 책' 이라고 했을까.


누군가는 불쌍하다는 말을 쉽게 했고,

또 누군가는 삶이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소리를 지껄였다.

가능한 아프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 좋았다.

우리는 시련이 삶을 더 단단하게 해준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p.88


소설은 숙명처럼 삶을 비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여성의 유대와 연대를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교감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의지와 운명을 말하고자 했을까. 모두 다 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양한 인생을 만나며 내 삶을 정돈하고 정립해 보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며, 소설로 만났기에 물리적 흉터없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강화길 작가의 세계관에 대해서 불쑥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것은 내겐 이 소설이 첫소설이기 때문이다. [화이트 호스]도 사두고 못 읽었는데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이 책이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벼운 책 무겁게 잘 읽었다.




아르테 출판사에서는 한국 소설선을 '작은책' 시리즈로 함께 하고 있다. 이미 7권의 작은 책이 출간됐고, 강화길의 책은 여덟번째다.

작은책 시리즈는 인간성을 탐구하고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 소설의 본질이라고 본다. 그래서 더 많은 소설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이 작은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게다가 이 소설들은 책을 사랑하는 셀럽들의 목소리가 녹음된 오디오북으로도 들을 수 있다. 특별히 [다정한 유전]은 색깔있는 배우 이유영이 낭독을 해 화제를 낳고 있다. 감상을 원하는 독자는 <팟빵>, <밀리의 서재>,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소리책으로 함께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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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건 - 내게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야생에 대하여
김산하 지음 / 갈라파고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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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건 / 김산하 갈라파고스


평소에 생태에 대해서 설명하는 책을 좋아한다. 몇 번의 생태수업을 듣고나서였을까? 처음 이 책을 생태학자가 썼다는 설명을 보는 순간, '이 책은 내가 읽어야 함.' 하고 선뜻 선택했다.

저자 김산하는 서울대학교 동물자원과학과를 졸업해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자바긴팔원숭이를 연구한 영장류학자다. 늘 말하지만 과학자가 글 잘 쓰는 것은 반칙인데 예술적 감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췄다는 책날개의 설명대로였다.

이 책은 생태학자가 사회학자처럼 사회를 바라보면서 자연과 비교해 말하고자 하는 인문학서다. 저자는 인간사회가 당면한 문제점들의 해결책을 동물과 식물에서 찾는다.

저자는 코로나19가 우리가 생태를 함부로 파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단히 공감하는 바이다. 이런 물리적인 것 말고도 동물들의 삶과 사람의 삶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공존의 의미를 피력하고 있다. 읽어보니 술술 넘어가고 재미있다.

우리가 흔히 잠을 잔다는 행위를 나태의 산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잠이야말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대단히 평화로운 행위라고 말한다.

동물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삶의 무대는 현재이니 지금에 집중하자고도 말한다.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일이다. 모든 존재의 기본은 '다름' (p.73) 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게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외롭지않자고 다 똑같은 틀에 넣는다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흑백논리는 더 문제가 있다. 저자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한다.

우리는 이제 호흡이 안전하지 못하다. 코로나 이전에도 황사, 미세먼지 할 것없이 인간의 호흡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식물은 공기의 흐름이 있어야만 번성할 수 있다. 식물에게 호흡은 생장과 발전의 원동력이다.

동물은 삶의 우회로를 걷지도 않고 먹고 사는 일을 위해 그 무엇도 미루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공간은 자유가 허락되는 곳이다. (p. 195) 쉼이 필요할 때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 등등

저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환경을 예로 들기도 하고, 비교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한다. 바라보는 눈이 부단히 논리적이고, 휴머니즘적이다. 관찰력이 좋은데다가 사회구조 자체에 관심이 많고 해답을 자연으로부터 찾으려고 한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체에 반응한다는 점을 필두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보다는 실천에 주력하자고도 말한다.

지나친 스마트폰의 폐혜, 환경오염, 이분된 극단, 무분별한 유행 등을 지양하고, 특히 어린이들의 사라지는 놀이문화를 안타까워한다. 엄마로서 상당히 동의하며 반가운 시각이기도 했다. 손가락 하트도 싫어하는데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웃겼다. 아마 무분별한 사랑의 남발보다는 진정한 배려와 사랑을 하자고 말하는 것 같다.

저자의 자세는 전인류적으로 좋은 자세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며 그렇다고 미래를 염세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책은 읽고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과학이 미처 보지 못했던 작은 존재들의 고유함도 열심히 이야기 해준다. 솔직히 처음에는 완전한 생태학인줄 알았다가 좀 더 사회학적인 것을 보고 실망했더랬다. 하지만 다 읽고나니 이런 이야기들도 좋더라 생각하며 괜찮은 문장들에 줄을 박박 그었다.

만나서 참 다행이다. 소확행 같은 책!


원래 자연에 '길' 이란 없다.

코끼리가 지나 간 곳이 잠시 길처럼 되는 것이지

이미 난 길을 코끼리가 걷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길 위에서는 많은 문제가 양산된다.

자연에는 통과만을 위한 공간은 없기에

자연에 사는 이들은 인간이 만든 길 위에서

당황하는 것이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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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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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신작이 나왔다길래 너무 놀라서 겟 했다! 오마이갓! 그런데 소설이 아니었다니!!!!! 옴마, 소설가 양반 이게 무슨 일인가요??

우선 이 책은 표지가 넘넘 근사하다.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겉표지를 벗기면 속표지가 나오는데 그때야 비로소 주인공 사무엘 포치의 그림이 등장한다. 마치 그림이 액자 속에 넣어져 있는 기분이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이 그림이 끝이 아니었다. 이 그림은 원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전에 다산북스 블로그에서 표지 투표가 있었는데 다른 표지가 골라졌으면 어쩔뻔했을까. 표지의 정성에 감복한 나로서는 이 표지 이외의 표지는 과감히 거부한다!!! (내가 뭐라고 ㅎㅎ)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The Man In The Red Coat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

정영목 옮김 /다산북스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어느 날 그림 하나를 보게 된다. 그것은 벨에포크 시대, 그러니까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서유럽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기(p.13) 때 활동하던 의사 사무엘 포치의 초상화였다. 존 싱어 사전트라는 화가가 그린 이 그림은 줄리언 반스를 사무엘 포치 찾기 프로젝트에 임하게 만들었다. 실내 가운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잠옷이 아닌 이 빨간 로브를 입은 사내의 어떤 점이 그렇게 궁금했을까. (잘생기긴 했다)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이 작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는 많다. 내가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 그랬다. 줄리언 반스처럼 소설가가 그림이 트리거가 돼서 이야기가 아닌 예술 에세이를 펴내는 것은 드물지만 가능했다. 그런데 이렇게도 꼼꼼하게? 좀 놀라웠다.

줄리언 반스는 닥터 포치의 놀라운 일생과 그의 인간성을 말하기 위해 클로드 방데르 푸텐이 쓴 '포치 전기'를 읽었다. 그리고 벨에포크 시대 활동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포치의 일생을 더듬어 나간다. 대단히 흥미로운 얼개가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어려웠다. 아는 작가들이 나오면 반가운 마음에 좀 더 집중이 됐지만 잘 모르는 작가가 나올 때는 좀 어지럽기도 했다. (나의 이해의 문제인지 번역의 어려움인지는 조금 모르겠다)

닥터 포치는 지방 부르주아지 출신으로, 1864년 의학을 공부하러 파리에 왔다. 그는 실력 있는 의사로 성장했다. 의사이면서 작가의 길에 입문했고, 의업과 저술을 겸업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작가들과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단연 으뜸은 (흥미의 면에서) 오스카 와일드였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가 게이라는 사실을 사실상 처음 알았다. (유명한 사실인데 내가 관심이 없었는지) 재판까지 갔었다고 하니 시대상에 비춰봐서는 불운했을 것 같다. 또, 귀족 몽테스키우가 나오는데 그는 포치와 여행을 같이 할 정도로 가까웠다. 그리고 베르나르라는 여배우는 당시 스타였는데 포치랑 사귀었다. 그 여자 사진도 있는데 너무 예뻤다. (물론 나중에 결혼은 테레즈라는 젊고 예쁘고 부유한 여자랑 한다^^;;그리고 여성 편력은 또 어마어마했다. 딸이 빈정거릴 정도;;)

설마 이런 것 때문에 줄리언 반스가 그를 이토록 탐구했을 리는 없고 대체 무엇 때문일까?

당시 유럽 사회는 '아름다운 시절' (벨에포크)이라고 불렸지만 사실은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부패한 시기였다. 상류사회의 생활은 오페라 하우스와 레스토랑으로 이루어진 세계(p.44) 일지 몰라도 무정부주의가 횡행하는 등 안정되지 못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 예술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냥 미(美)만 탐구하는 유미주의일까, 아니면 사회를 비추고 억압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앙가주망일까.

소설을 좋아하는 만큼 이 책을 읽으면서 읽고 싶은 소설이 늘어났는데 사무엘 포치의 딸 카트린 포치가 쓴 [아그네스] 와 아직도 읽어보지 못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설명에 의하면 다소 충격적인 [거꾸로]라는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 안에 엄청나게 많이 언급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어보진 않았지만 횟수가 상당하다)

또 '모델소설'이라는 장르는 아니지만 분류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패러디라고 해야 할까, 오마주라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참고용? 아무튼 그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가 많은 작품의 모델이 되었다는 시각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제일 읽고 싶은 소설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지식백과에는 위스망스의 소설은 [역로] 라고 번역돼 있다. 아무곳에서도 팔지는 않고 채만식의 동명의 소설이 존재한다)

또, 얼마 전에 민음사에서 출간된 이디스 워튼의 소설 두 개와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를 사두었는데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미리 읽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했다. (몽키스테우가 푸르스트의 소설을 반밖에 못읽고 죽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하나;;)

에밀 졸라의 소설도 몇 번 언급되는데 왜 맨 뒤에 주요 등장인물에는 등장하지 않는지 (아마 직접 등장하지 않아서?) 궁금했다.

포치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인데다가 평민이면서도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과학탐구에 골몰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청난 여성편력을 지녔으며 지나치게 자유로웠다. 줄리언 반스는 그의 자율성을 매력으로 여겼는지 몰라도 여성인 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튼 줄리언 반스는 이야기 꾼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이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소설같이 느껴지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었다. 내가 영어를 잘한다면 원문으로 읽어보고 싶다.

어쩌면 스스로는 안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예술 에세이를 좋아하는 나는 이번 기회에 읽게 된 게 너무 다행이고 기쁜 일이었다. 소설가가 말하는 예술에 관하여, 시대상에 대하여, 그가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소설보다 좀 더 섬세하게 엿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중 관련된 한 사람의 이야기로 소설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줄리언 반스가 책에서 알아내지 못했으나 궁금했던 것에 대해 죽 나열해 두었는데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그러면서 저자가 말하길, 이 모든 질문은 소설에서 답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겨두었다. 몇 년 안에 벨에포크 시대의 소설이 하나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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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 소유의 문법
최윤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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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21번째를 맞이하는 이효석 문학상은 소설가 이효석을 기리기위해 2000년에 만들어진 문학상이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어볼 수 있게 돼서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다.

대상자는 작가 최윤으로 수상작은 <소유의 문법> 이다. 실제로 나는 최윤의 소설을 몇 개 읽어보았는데 이 단편이 단연 가장 재밌었다. 주인공이 어린아이를 기르고 있어서 그럴까?

<소유의 문법> 은 자폐아를 키우고 있는 주인공 '나'에게 은사님이 집을 빌려주기로 한다.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리를 마구 지르기 때문에 아파트에서 살기가 힘들어지던 때, 마침 은사님으로부터 시골에 있는 집을 관리하며 머물러 달라고 부탁을 받으니 어찌아니 좋겠는가.

그런데 마을에 도착하니 또다른 은사님 집이 있고 그 곳에 기거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얻은 반면, '나'는 별로 그리하지 못하였다. 사실 이사올 때 은사님에게 집을 무상으로 임대받았는데 사람들에게 괜히 말을 들을까하여 전세계약을 쓰고 온 것처럼 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은사님을 이 마을에서 내쫓을 계획을 삼고 있고, 그것에 '나' 가 동의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곤란했다. 차라리 왕따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마을의 공통된 무엇으로부터도 배제되었고, 급기야 인터넷까지도 쓰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 부당함을 느끼지만 별다른 대처를 할 수 없었던 '나'! 설상가상으로 아이마저 한동안 잠잠했던 괴성지르기를 다시 시작하고 아이를 달래기 위해 차를 타고 냇가 위에 얹어진 다리를 지나자마자 폭우로 마을이 유실된다.

간단한 내용인듯 보이지만 뭔가 그로테스크하다. 주인공 '나' 의 내면심리가 상당히 잘 그려진 작품이다.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탐욕을 응시한다는 심사평이 대단히 마음에 와닿았다. 우리는 얼마나 소유할 수 없는 것을 바라며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가. 응당 문학의 장점인 '나 돌아보기' 를 또 한번 마음에 새기게 된 작품이었다. 먼저 읽은 것에 대해 상당히 뿌듯하고 반가운 마음을 갖고 있다.

아, 그리고 특이하게도 최윤의 작품이 한 개 더 수록돼 있었는데 제목은 <손수건> 이다. 약간 수상자 헌정 같은 작품인데 나는 이 작품도 좋았다. 모르는 남자를 따라가서 엉엉 울었다는 설정도 기가막혔고, 내가 모르는 남자가 나에게 전화해 우리집을 흔드는 것도 무섭지만 몰입도가 최강이 되면서 정말 재밌게 읽었다.

또, 우수작품상으로 김금희의 <기괴한 탄생> 외 박민정, 박상영, 신주희, 최진영 작가의 단편들이 실렸고, 작년 당선자인 장은진 작가의 <가벼운 점심> 이라는 단편도 실려 있어서 반가웠다.

사실 평소에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잘 읽지는 않는다. 이 수상작들이 모아진 소설집으로 읽고나서 이것이 수상작이었구나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소설집으로 읽으면 다 기억에 남지 않는데 이 책은 다 다른 작가들의 매력이 엿보이니 훨씬 좋았다. 이제부터 문학상 수상집을 좀 읽어봐야겠단 부푼 포부도 품어보았다.

김금희 작가를 원래 좋아하기 때문에 기대하면서 읽었다. <기괴의 탄생>은 원래 사이가 좋았던 스승과 제자가 스승의 불륜과 이혼을 계기로 사이가 소원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는 나름대로 음악인이라는 설정이 뭔가 더 격정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는데 은연중에 김희애와 유아인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ㅎㅎ

박상영 작가는 여전히 퀴어문학이었다. 최진영 작가는 원래 단편을 많이 썼고, 내가 많이 읽어봤는데 늘 좀 우울한 , 좀 상처받은 영혼을 많이 그렸다. 이번 작품 <유진> 도 그랬다. 제목은 겹치는 이미지들이 많아서 다른 제목이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다른 독자를 위해서 내용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재밌게 잘 읽었다.

조금 급하게 읽은 감이 있어서 좋았던 작품들은 좀 더 공들여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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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여자가 말하다 - 여인의 초상화 속 숨겨진 이야기
이정아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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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에 빛나는 예술 인문학서 [그림 속 여자가 말하다]를 읽었다. 이 책은 읽었다기보다 보았다고 해야 어울린다. 왜냐하면 미술 책이기 때문이다. 명화 속에 숨겨진 여자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표지도 종이도 너무 근사하다. 자꾸만 쓰다듬게 하는 책이다. 표지에 반하고, 그 감촉에 반하고, 내지의 질에 반했다. 그리고 내용에는 더 더 반했다!!

이정아 작가는 기자출신 칼럼니스트로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읽어보니 글 참 잘쓴다. 문장이 매끄럽고 읽기에 좋은 형태를 가졌다. 그래서 술술 읽힌다. 그런데도 책장을 넘기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림들이 세세하게 아름다웠고, 도도한 청춘의 숙녀처럼 나를 빤히 응시한채 그저 놔주질 않았다. 한장 한장 정성스레 넘겼지만 그 그림들이 죄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술 인문학서를 자주 읽다보니 속에 담긴 그림들이 자주 겹치기 마련이다. 특히 페미니즘을 노래하려는 책은 <목을 베는 유디트> 나 프리다칼로의 그림들 등 여류화가가 그린 그림이 아주 비슷하게 올라오기 다반사. 그런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여성 화가가 그린 그림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림 속 여성' 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예상한 바가 보기좋게 빗나가고 몰랐던 그림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우와, 어머를 남발하며 천천히 음미하였다.

젖가슴이 오롯이 드러난 것은 다반사고 여성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그려져있다. 아무리 예술적 감각을 소양코자 보무도 당당히 맞서고 싶지만 벗은 몸은 뚫어져라 보기가 어려웠다. 내숭이라고 해도 할말 없지만 아직 나의 감성으로는 그랬다. 그랬기에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류들은 좀 불편한건 사실이었다. (어린이를 보여주기가 민망한 것은 뭐 나만의 생각은 아닐거다) 여성의 나신(裸身)을 가지고 꼭 세상의 기원이니, 탄생 등을 논해야 하는지, 매혹적이지만 외설을 의심케하는 지나치게 클로즈업 된 신체의 일부분이 아름다움과 연결되어야만 예술인지 등은 아직까지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시선을 달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저자는 이런 나신의 그림, 특히 여성이 성적인 욕망을 표출하지 못해 안달난 것처럼 그린 그림을 제국주의적 시각이요, 관음증이라고 말했다. 격하게 동의하며 나 역시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그림인데 불쾌함이라도 표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는만큼 보인다고. 지난 번에 읽은 김선지의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은행나무) 에서 본 수잔발라동도 보이고 또 얼마 전에 읽었던 [페르메이르] (아르테) 의 <진주귀고리 소녀> 도 보이고 내가 가진 책 [햄릿]의 표지인 <오필리아>도 보여서 반갑기도 하고, 그 여인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기도 하고 그랬다.

마네의 <올랭피아> 처럼 늘상 보아오던 그림도 있었지만 에밀졸라의 [목로주점] 속 제르베즈를 연상시키는 드가의<세탁부> 처럼 처음보는 그림도 있어서 좋았다. 뿜뿜 아는 것이 늘어난다.

놀랐던 부분 중에 또 하나는 살바도르 달리다. 나는 그의 그림을 흘러내리는 시계로 기억하는데 한쪽 젖가슴을 봉긋하게 내놓고 있는 그림을 그렸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해서 그랬는지 놀랐다. 그렇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화가 나혜석이다. 여태껏 나혜석 그림을 실은 예술서를 보질 못해서 그런지 (물론 어딘가는 있을 것이다) 신기했고, 반가웠고, 고마웠다. 찾아서 보려고 하면 번거로운 것을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나혜석을 조명해주니 넘 좋았다. 예전에 나혜석 평전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화가였지만 작가이기도 했다. 그녀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평전에는 고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해석의 어려움이 있었다. 사랑을 노래했다는 소설가 나혜석. 그리고 그녀의 그림. 우아하고 세련됐다. 천재이기에 너무 외로웠을 나혜석의 그림 세계를 더 많이 알아보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역시 독서는 독자가 마음껏 우물에서 뛰쳐나오도록 사다리가 돼주고, 날개가 돼준다.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가지고 있으면서 두고두고 펴볼 책이다. 내가 가진 미술 책들은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다. 이렇게 소중한 한 권의 미술책을 또 만날 수 있게 돼서 너무 기쁘고 좋았다. 그림 속에 담긴 여자들의 이야기를 알아보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곰브리치의 책처럼 '나는 미술백과요.' 하는 책도 좋지만 나는 이런 류의 책을 더 선호한다. 저자가 주제의식을 가지고 세밀하게 연구해서 분류해 놓은 그런 책 말이다. 여러권 사서 나같은 책쟁이에게 선물해줘야겠다.

정말 근사한 기분으로 잘 읽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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