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시대에 특별히 귀한 것은 없다. 

선량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극도 뼛속까지 발라내진다. p.100


나는 일본 소설 알레르기가 있다. 선전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책을 안 읽어본 건 아니지마는 특히 요즘은 여러 번 실패해서 그런지 읽기 전부터 엽기 혹은 폭력이나 광기쯤은 염두에 두고 한숨 쉬고 입장한다. 당연히 [유랑의 달] 읽기 전에도 그랬다. 지독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라마다 가진 색채를 무시할 수 없어서 편견을 장착한 셈이다. 그런데 놀랐다. 이 책은 등장인물을 제외하면 그냥 우리나라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보편적인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위해서라면 짓밟혀도 되는 개인의 사생활, 그리고 황색언론.


(줄거리 생략)


이 책은 특별한 사랑 이야기임과 동시에 황색언론의 폐해를 꼬집고 있기도 하다. 후미는 로리콘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몰렸다. 여기까지는 정황상 그럴 수 있다. 아홉 살 여자아이가 두 달을 열아홉 살 대학생 집에 감금돼 있었다고 믿는 순간, 후미는 소아성애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좋다. 그래서 복역했다. 그런데 사라사는 어떻게 됐을까? 사라사는 피해 아동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졌고, 그녀의 행보와 삶이 관심을 갖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포스팅돼 있었다. 사라사가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라고 동정표 섞인 손가락질을 받는 동안 그 누구도 사라사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후미가 자기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말하면 스톡홀름 신드롬이네 뭐네 하면서 아예 믿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인 사라사의 사진이 웹상에 떠돌아다녔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혐오의 눈빛은 

피해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고 아연했다.

위로나 배려라는 선의의 형태로 

'상처 입은 불쌍한 여자아이'라는 도장을,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쾅쾅 찍어댄다. 

다들 자기가 상냥하다고 생각한다. p.84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미스터리한 괴생물체나 유령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 소설은 가독성이 좋다.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리고 문장이 아름답다. 번역을 잘한 건지, 작가의 원래 문체가 유려한지 너무 궁금하다. 또, 공감대가 많다. 진짜 인물 이름만 바꾸면 우리나라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취업난, 아동학대, 황색언론, 상처받은 영혼 등 우리가 알고 나누어야 할 문제들이 넘쳐나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이 읽고 서로 생각을 나누면 좋겠다.

담겨있는 메타포도 좋다. 나는 사라사와 후미가 글라스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좋았다. 인간은 원래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다. 그 유리잔 속에 담긴 음료는 인생이다. 깨지기는 쉽지만 얼마든지 조심할 수 있다. 그리고 글라스는 혼자보다는 둘이 좋다. 완전히 똑같지 않으면 어때, 두 사람이 마주 들 수 있는 잔이면 됐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정말 재밌었던 소설이다. 띠지의 표현대로 오래도록 읽힐 소설이다. 대단히 추천한다. 시대를 읽을 줄 알고, 사람의 마음을 만질 수 있는 작가라고 의심치 않는다. 다음 작품이 나오면 반드시 읽어볼 것이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결심했던 소설 [유랑의 달] 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혼의 연대기
기에르 굴릭센 지음, 정윤희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평소에도 '쿨한 건 사랑이 아니다' 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쿨내진동하는 사랑이야기를 볼 때마다 거품물고 비판을 쏟아냈었다. 사랑에 '시무 몇 조' 이런 게 있다면 꼭 들어가야 할 조항 중에 '상대에게 예의지키기' 는 거의 0순위다. 그 예의에는 '바람피우지 않기'가 들어가고, '바람을 피우다 걸리지 않기' 가 들어가고, '바람을 피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기' 가 있다. 그러나 바람보다 더 경계하는 것은 '쿨한척 하지 않기' 다. '나말고 다른 사람 만나봐도 돼.' 같은 류의 부부 자유연애사상을 거의 경멸하는 수준이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다. 사랑을 할 때 나와 상대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체고 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상대가 채워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서 또 다른 사랑을 만나서 공유하는, 그러니까 반절만 사랑하는 것을 용인하다니. 그게 무슨 시덥잖은 사랑인가 싶다.

결혼 한지 한참 돼서 구닥다리 같은 사랑론을 펼치는 걸까? 요즘은 저렇게 해도 된다고? 외국이라 괜찮다고?


책을 읽고 분노함은 개인의 생각차 다름아니다. 책 자체는 죄가 없다. 작가도 죄가 없다. 그저 등장인물의 행보가 기가막힐 뿐이다. 누구를 죽이지 않았지만 철저하게 벌거벗긴 타미가 미울 뿐이다. 얼마나 미운지 헐뜯어도 그녀가 존에게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소설은 존이 과거의 일을 서술하는 역순행적 구조를 가졌다. 존은 타미와 만나 재가했다. 존과 타미는 사랑했다. 부부인만큼 육체적으로도 사랑했다. 둘이 얼마나 서로의 육체를 탐닉했는지 책에 아주 자세하고 소상히 나와 있다. 그러던 중 타미는 군나르라는 남자에게 성적매력을 느낀다. 그런 감정을 존에게 털어놓는다. 근데 이건 존이 은근히 떠본 탓도 있다. 타미는 그저 그런 남자가 있노라고 말했을뿐이었다. 하지만 존은 알았다. 군나르 이야기를 할 때 타미에게 존재하는 생기나 미묘한 호기심들을 포착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남자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든 말해달라고.


타미는 우연히 군나르와 운동을 같이 하게 되는데 그 횟수가 잦아지고 급기야 외박을 일삼는다. 결국 타미는 군나르를 선택하고 존과 타미는 아이들 때문에 한집에는 살되 별거(別居) 아닌 별거에 들어간다.



나는 이미 고구마를 백개 먹은 듯 답답해졌다. 군나르하고 사적으로 만나기 시작할 때 그녀를 집에 주저앉혔어야 된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고 사랑에 구속과 억압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쯤은 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일반적인 애인이 아니라 부부다. TV도 아빠가 틀어줘야 볼 수 있는 어린 아이들이 있는 부모다. 그런데 이렇게 무책임할수가 있나.


존은 쿨한 척 하다가 사랑하는 아내를 놓치고 말았다. 처음부터 본인이 얼마나 불안한지 어필했어야 했다. 아내가 그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자 자기가 그 남자가 된 것처럼 아내를 만족시키려고 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의식의 흐름일까.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다.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상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앞 쪽의 다소 지루했던 서술과는 달리 마지막 장면은 진저리나게 슬펐다. 존이 마지막에 사력을 다해 구애를 할 때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타미의 눈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본 것처럼 생생하다) 끝나버린 사랑에 대한 갈구, 둘의 사랑으로 한 밤을 지새우던 불타는 침대는 싸늘하게 갈라진 부부의 실존만 드러낼 뿐이었다. 와, 너무 슬픈데 이건.


'노르웨이 비평가 협회 화제의 문제작'

'노르딕 카운슬 문학상 최고의 화제작'

'북유럽 맨부커상 노르딕 문학상이 주목한 시대의 문제작'


문제맞지. 이건 엄청난 문제작이다. 성애를 지독히도 자세히 묘사해 놨다. 아주 찐한 부부용 에로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성애묘사가 너무 많아서 약간 불편하기도 했다. 굳이 이렇게 말해놔야만 결혼의 '연대기' 란 말인가?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완성하기 위한 기단(基檀)이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려 마침내 정점에 이른 것이 마지막 씬이다. 이게 뭐람. 하고 싶었지만 그 장면이 너무 슬퍼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내를 빼앗긴 남자의 처절한 삶. 그것마저 쿨하게 , '나가 나쁜X아.' 욕하고 빵 차버리지도 못하고 그저 얕은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부부의 세계. 그러나 결국 아내를 잊지 못해 마치 공작새가 암컷 앞에서 춤을 추듯이 구애하는 그 몸짓이 반으로 접혀들 때 마치 내가 주인공인 것 같은 참담함을 느꼈다. 이 기분 뭐지?


 


아무튼 문제작은 확실하다. 29금 책이라 누구에게 섣불리 권해주지는 못하겠다. 다만 오래된 부부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좋지않을까? 제목처럼 장황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에게도 결혼의 연대기는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연대기가 아직은 망국으로 가지 않았으면 싶다. 매일 불타오르지는 않아도 미지근하게나마 온기를 체험하고 있다고, 자리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배우자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ㅎㅎ 나의 정서와 잘 맞지는 않지만 희한한 외로움을 흠뻑 경험한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경출판에서 출간한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는 특별한 역사책이다. 시대의 흐름대로 사건을 담은 게 아니라 저자 본인의 생생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잘 짜낸 유물역사책이다. 

저자 배한철은 문화재 기자다. 이번 책이 첫 책이 아니며 문화재관련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해지는 법! 그는 학창시절부터 관심있었던 문화재와 역사공부를 꾸준히 하며 발로 뛰는 역사학자의 면모를 다지고 있다. 휴일이면 서울 주변의 유적지를 둘러본단다. 도시화가 되어서 그저 지나쳐지는 유물들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런 것들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찾아간다. 정리한다. 그리고 소개한다.


저자는 국보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답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엄청 동의한다. 교과서에서 담아주는 사진은 규격에 맞춰서 들어가지만 직접 가서 만나보면 그 웅장함이나 -꼭 크지 않더라도 - 그 감동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하루 빨리 통일이 돼야하는 이유, 중국 땅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자유로이 답사 갈 수 있는 날이 와야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책은 총 8부로 나눠져 있다. 본인이 참여했던 국보 발굴 현장 답사기부터 우리의 잃어버린 국보 이야기도 있고, 전쟁을 견딘 국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미스테리한 그래서 더 재밌는 국보이야기도 있고, 국보가 담은 삼라만상의 기운과 더불어 국보를 제작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도 만나볼 수 있다. 차례만 봐도 재밌고 다채롭다. 


한개의 챕터는 한 개의 국보를 담고 여러가지 일화들을 속하여 있다. 중간 중간에 국보의 사진도 있다. 교과서에서 봤던 자료들도 있지만 아예 처음보는 사진들도 많았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1개의 부마다 말미에 '국보 토막상식'을 넣어두어서 흥미로웠다.



한국사를 공부해놓고 국보를 보러가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국보는 한시대의 정점에서 태어나 켜켜이 선조의 흔적을 쌓아두었다. 국보에 대한 연구는 지속돼야 한다. 국보가 얼마나 가치있는가 아는 사람이라도 국보가 후손들을 위해 물려줘야 하는 국가의 자산이라는 생각이 없으면 국보는 한낱 재산목록에 불과하다. 그래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국보 혹은 여타 문화재를 소유하거나 팔아넘기려고 한다. 손춘익 선생이 쓴 [돌사자 이야기] 라는 동화가 있다. 그 책에서는 문화재를 대하는 세 명의 사람이 나온다. 한 명은 농부인데 우연히 돌사자를 발견하고 헐값에 팔아 넘겼다. 그는 문화재를 경시여기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골동품 상점 주인인데 그는 헐값에 산 돌사자에 이윤을 붙여 일본사람에게 팔아먹는다. 문화재의 가치는 알지만 그저 재산목록으로 본 것이다. 마지막은 나그네다.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그는 돌사자를 사들인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네 나라로 반출하려다 갑자기 벼락이 쳐서 죽는다. 동화라고 얕잡아 보기엔 문화재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먼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됐지만 무엇보다 국보의 소중함이 좀 널리 알려졌으면 하고 소망을 품어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세대는 천년 후의 손들에게 무슨 국보를 남겨줄 수 있나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참 좋은 책이다. 자료 조사도 열심히 했고, 귀중한 사진자료들도 많다. 흥미로운 국보에 대해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주면 교육적으로도 좋을 것 같다. 5학년부터 읽어봐도 재밌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가 -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파리의 관찰자 클래식 클라우드 24
이연식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드가가 인상주의 화가인 줄만 알았다. 잉? 그런데 아니란다. 그건 그가 밖으로 돌아다니며 풍광을 담는 게 아니라 실내로 들어와 앉았다. 도시의 면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동하는 여성이나 발레 공연 등 사람과 현실을 그렸고, 정적인 자연을 그리는 것이아니라 역동적인 모습 자체를 묘사했다. 빛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인상주의라고만 규정지을 수 없는 이유다. 오모나, 내가 알던 드가가 아니네?


  

드가와 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벨에포크 시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드가는 이 시기 속에서도 사람들의 허무와 고단을 포착해냈다.



에드가르 드가는 1834년에 파리에서 태어나 1917년에 별세할 때까지 주옥같은 회화를 남겼다. 드가는 마네와 교류했고, 사진과 판화와 조각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사진술이 발달하면서 그림의 오류들이 발견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드가는 그림이 가진 고유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당히 애썼다. 또, 유화를 즐기는 회화가들과는 달리 파스텔을 즐겨썼다고 하니 그 점도 신기했다.


드가는 미혼으로 살았지만 여성을 많이 그렸다. 권위적인 모습보다는 아름다움에 주목한 것 같았다.


작가는 마네보다 드가가 훨씬 매력적이라고 이야기했다. (마네 팬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다. 갑자기 피리부는 소년이 생각나...)


  드가는 역설적인 예술가다. 인상주의 그룹의 핵심이면서 인상주의에서 벗어난 듯한 그림을 그렸고 (본인을 사실주의 화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혁신적이기도 했지만 전통을 고수하기도 했다.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체제를 미워했고, 루브르에서 공부했지만 오르세에 더 많은 작품이 있다. 전통적이면서도 새로운 사람, 파리를 닮은 사람. 

도시에 살면서 우리는 무엇에 탐닉하고 있을까? 늘 제대로 바라보고 그대로 담아내려고 했던 드가의 생각은 당시의 예술 사조에서 썩 반기는 구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어딘가 방향성을 상실하고 어딘가 무의미한 가족 사진 앞에 직접 서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 중에 하나인 <콜코르드 광장, 르피크 자작과 딸들>p.135 이다.


마치 몰래 찍은 자연스러운 사진 같지만 어딘지 서글픈 그림이다.


  우리는 거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드가는 첫번째 인상주의 작품 전시회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회원들과 의견이 갈려 싸우기도 했다. 예술가들은 서로 개성이 강하니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모네와 르누아르보다 형이라고 하니 뭔가 어색하다 ㅋㅋㅋ 나이가 제대로 기록돼 있는 것도 신기하고. 1830년대 사진술이 발달하면서 회화의 한계와 거짓에 대해 갑론을박이 많았다. 그 유명한 제리코의 <엡섬의 경마> 와 마네의 <블로뉴 숲의 경마> 는 사진술의 발달 이후 그 폭발적인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거짓말 회화 인 것처럼 돼버렸다. 말은 실제로 그렇게 앞 뒤 다리를 쭉 펴고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뒷다리가 접혀야 정상이다. 미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촬영한 경주마의 사진이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이다. 드가의 그림은 좀 더 나아보인다. 다른 사람들을 찰나의 스피드를 그릴 때 드가는 천천히 멈추는 영속성을 그리려고 했던 것 같다. 이런식으로 비교해주니 너무 재밌었다. 드가는 화가지만 점토나 밀랍으로 형상을 만드는 조소작업도 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예술가로서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갔던 드가. 나는 드가가 이렇게 다채로운 사람인 것을 처음 알았다. 역설의 예술가라는 그 말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p.147 이라는 회화를 다른 예술에세이에서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 책에 쓰인대로 실존인물이 자기 얼굴을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겠다 진짜) 아침부터 몰아치는 알콜중독자의 묘한 눈과 그 기운. 공기의 무게까지 그릴 줄 아는 화가라는 말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그 예술 에세이를 볼 때 그 그림이 드가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었겠지만 금방 잊었다. 그런데 그림을 보니 생각이 확 난다. 드가의 그림이 강렬했던 것은 사실이다. 예술 시류의 중심에 있었지만 언제나 당당한 이단아, 드가.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해 이토록 상세하고 읽기 좋게 서술 해 놓다니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서평을 쓰면 늘 서평이 길어진다. 소개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다. ㅎㅎ


소장 욕구 뿜뿜인 이 책은 벌써 스물네번째 책이다. 작가, 화가, 음악가, 철학자 등 거장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면서 그의 삶과 작품을 조명해 보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정말 좋다.


유튜브에서도 만나 볼 수 있다고 하니 책을 읽고 한 번 씩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나의 도시를 앨리스처럼 1~2 - 전2권
네빌 슈트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항공기 엔지니어이자 작가인 네빌슈트의 소설 [나의 도시를 앨리스처럼] 을 읽었다. 소설이라면 무조건 열린 마음으로 보는 나는 표지부터 마음에 들어 고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목도 그렇고!

그렇지만 읽다보니 유쾌한 내용이 아니어서 깜짝 놀랐다. 이건 정말 표지의 배신?


서술자인 노엘은 변호사다. 그는 진이라는 영국 여자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는데 이유인즉슨 진의 삼촌이 죽기 전에 혈육인 조카들에게 재산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중 진의 오빠가 전사하면서 꽤 많은 재산이 진에게 왔고 진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30세 중반이 되기 전까지는 모든 재산이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연금식으로 지급받기 때문에 그것을 인계해주고 관리하기 위해서 노엘이 필요한 것이다. (복잡;;)

그래서 노엘은 진을 만난다. 진은 속기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원이다. 하지만 알고보니 진은 전쟁 중에 포로 끌려갔던 경험이 있었다. 1930년대의 일이다. 일본은 말레이반도를 습격했고, 그 때 영국인들을 붙잡아 남자는 포로수용소에 집어 넣고 여자들은 방치했다. 방치했다기 보다 빙빙 돌려가며 학대했다. 동양인들에 비해 처참하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걷게 했다. 말라리아나 과로로 줄줄이 급사하는 가운데 진과 몇몇은 살아남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 마을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진의 끈기와 성실, 그리고 자비와 용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국으로 귀환된 후에도 여전히 삼년동안 살았던 마을을 생각한다.

진이 여러날을 걸으며 주변 사람들을 죽음으로 떠나보내며 겪은 일 중에 가장 충격적인 일은 그네들을 몰래 도와주던 호주 군인 조의 죽음이었다. 조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처형당했다. 아니,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조가 살아있었다. 조 역시 간절히 진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들은 전쟁 후 6 년째 빙빙 돌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은 잘 됐다. 만났고 사랑했고 결혼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랑이야기로만 본다면 이 소설은 재미없다. 이 소설은 전쟁포로였던 진 패짓이라는 한 여자가 억대의 재산을 물려받고나서 한 행동들을 집중해서 봐야 한다. 3년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버려진 전쟁포로를 돌봐주었던 말레이의 한 마을에 우물을 파서 여성들의 일거리를 줄여준 진은 호주로 건너가 호주 여성들을 돕는다. 그녀는 마치 슈퍼우먼처럼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선한 영향력을 뿜뿜 풍기면서 살아간다. 진의 그런 용기있는 행동들이 너무 멋있으면서도 돈이 있으니까 가능하지 싶었다. 그렇지만 돈이 있다고 다 그렇게 베풀고 나누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진이라는 캐릭터가 정말 멋져서 누구에게든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1권이 더 재밌다. 1권은 가슴이 늘 쫄깃거린다. 포로가 된 영국여자들이 마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40일을 걸어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처럼 말레이반도 곳곳을 걸어야만 했을 때 진이 일본군 병사들과 대적하면서 이뤄낸 결과는 대단했다. 결국 일본군이 진과 사람들을 버린 것이긴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서도 홀로 도망치지 않고 병자와 아이를 돌보며 끝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가진 것을 이용해서 은혜를 갚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2권으로 가면 갑자기 조의 생존 소식을 알게 되고 조 역시 극적으로 살아나면서 6년이란 시간동안 회복하고 오해를 풀고 진을 찾아 영국으로 오는데 이 과정이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상당히 읽을만 하다. 읽으면서 재밌었고, 알게 된 것도 많고. 북반구와 남반구를 넘나들고, 10년의 세월을 넘나들고, 세대와 인종의 차이를 넘나드는 이 소설이 참 재밌었다. 마지막으로 노엘의 사랑은 영화 [인턴]이 생각났다. 젊은 날의 눈부심이랄까, 젊은 매력과 활기에 대한 동경이랄까. ㅎㅎ

두 권이라 좀 부담은 있지만 가볍게 읽어보기에 괜찮은 소설이다. 작가 네빌슈트는 1899년생인데 전쟁에 참여하는 엔지니어였으므로 무기도 만들었고 이름도 숨겼다. 네빌 슈트는 필명이다. 주인공이 여자인 것이 작가에겐 다소 어려운 설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진의 심리묘사는 그렇게 잘 됐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서술자가 중년 남성인 것은 대단히 어울리는 설정이었다. 어쩌면 그도 진 패짓 같은 눈부신 젊은이를 만났을런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력을 알고나면 이 소설의 배경이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우연한 기회로 읽은 책 중에 좋은 책이 참 많다. 이 세상에는 진처럼 용감한 여성이 많아지면 좋겠고, 조처럼 지고지순한 사랑과 자기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가진 젊은이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엘변호사처럼 정직하고 믿을만한 법조인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대신 전쟁은 절대로 없어졌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