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김현화 옮김 / 마시멜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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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내가 많이 기다린 소설이다. 일단 기대평에서부터 광고 심지어 먼저 읽은 사람들의 리뷰까지!! 완전 흥미진진했다. 구미가 당겼다.

솔직히 선전빨(?)인 책도 많기 때문에 기대반 의심반이었지만 왠걸!

진짜로 다 읽어버렸다. 잡은 자리에서 단숨에!!



난도질 하는 장면 따윈 없다, 지독한 성폭력도 없다. 일본 소설 특유의 그로테스크도 없다. 그저 깊은 슬픔만 있을 뿐인데 다음 장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주인공 사키코의 내적갈등이 독자의 호기심에 소용돌이 친다. 그녀 심리의 기승전결에 쉴새없이 빨려들어 갔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군?



줄거리야 많은 사람들이 알 것 같아서 상세히 적지는 않겠다만 간단히 말하자면 얼마전 남편을 잃고 언론의 회초리까지 맞게 된 사키코가 남편을 죽인 살인범으로 지목됐지만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된 히데오의 유죄를 밝히고자 신분을 세탁해 그와 결혼을 하면서 일어나는 몇 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복수라는 것은 해피엔딩일 수가 없다. 이미 망가진 삶을 되돌리려는 노력은 하지않고 외려 파국으로 치닫아 더 큰 후회를 남기는 법이다. 증오하는 사람 앞에서 연신 웃으며 아내를 연기해야 하는 사람의 심리를 정상이라고 여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던 내면은 조실부모한 유년기의 환경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부모를 잃은 모든 유년이 그렇게 점철됐다고 하면 비약이라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고, 부모가 부모답지 않았을 때보다 없는 것이 낫다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가장 1차적인 보호처가 파손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한 사람의 일생이 어떤 형태의 길이 될지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너무 아쉬운 부분이다.

결말은 절대로 말할 수 없지만 반전이다. 솔직히 놀랐다. 죄라는 것이 사회가 지정한 처벌없이 스스로를 단죄하고 용서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수단으로 그 죄를 처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결말이다. 그러나 소설은 또 그렇게 열린채로 끝이 난다. 결말이 났음에도 모든 죄과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좀 찝찝하다. 그런데 재밌다. 이건 무슨 심리인가.



띠지에 "2시간 짜리 서스펜스 드라마 같은 이야기" 라고 돼있었는데 진짜 그랬다. 재밌는 영화 한편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기분이랄까? 생각보다 흥미롭고 빠른 전개에 마구마구 책장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옆에 있던 가족이 그림만 보느냐고 물을 정도로 ㅎㅎ (평소에 좀 속독하는 편이긴 하지만)



하도 빨리 읽어서 (심지어 받은 날) 사람들이 완독 안하고 리뷰쓰는 거 아닌지 의심할까봐 겁날 지경이다.



다만 굳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자면 동반자살이라든가 민간인 사찰, 거짓과 사기와 모략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설정하고 그에 따른 아무런 처벌이 없어서 -죄책감도 없고- 윤리적 판단이 불완전한 어린 학생들이 읽기에는 조금 적절치 않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미친 속도감과 이야기의 완결성을 위해서 봐주기로 한다. 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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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 대한 인간의 예의 - 동물을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소영 지음 / 뜨인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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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보았을 때 꼭 읽고 싶었다. 예전에는 네 발달린 짐승은 무섭고 징그러워서 가까이도 안갔었는데 고양이 집사가 얼떨결에 되면서 동물 애호가가 된 나이기 때문에 이런 책은 관심이 많이 갔다. 동물보호 단체에서 업무를 보는 사람이 직접 겪은 일을 쓴 것 같아서 더 읽고 싶었다.

결과는 더 충격적이었다.


동물을 학대하는 충격적인 실태때문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사람들의 혐오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안에 나도 아직 발담그고 서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누가 누구에게 뭐라고 하는 건가.


이 에세이는 저자의 진솔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애니멀 호더에게 갇혀있는 몇 마리의 고양이나 강아지들, 아니면 식용 개들을 구조하는 작업만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식당의 좁은 수조에 갇혀서 남의 눈요기가 되고 있는 악어, 서랍 속에 갇혀있는 뱀, 동물원에서 쇼를 하는 원숭이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전력투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는 그렇게 고백한다. '뱀 따위는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하고 싶었다고. 원숭이나 개, 고양이 같은 포유류에게 우리 인간은 거울뉴런을 작동시켜 지극한 애정과 긍휼을 발동하지만, 뱀이나 개구리 같은 상대적으로 징그럽게 느껴지는 동물에 대해서는 별로 불쌍한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 그런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한 저자에게 마음이 확갔다. 이런 성향을 종차별주의자라고 한다. 나도 그런적 많은데!!


사람들은 동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관해 스키마를 갖고 있다.

우리가 특정 동물을 어떻게 분류하는지에 따라

'사냥할지, 도망칠지, 박멸할지, 사랑할지, 먹을지' 가 결정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으로 분류한다. p.37

-멜라니 조이[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중에서


어떤 동물인가보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저자. 생각해보면 나도 동물에 대해 나름의 긍휼한 마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정말이지 내가 마음이 가는 동물만 불쌍히 여기고, 그렇지 않은 - 혐오스러운 외관을 가진 - 동물들의 안전이나 종 보전은 그저 되면 좋고 안되면 말게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육식을 중지해야하는 것은 알지만 끊지 못했으며, 그것의 원래 생김새나 어떻게 죽는지의 과정은 알고 싶지가 않다. 언제나 마트에서 다 포장된 깔끔한 것을 사다가 구워서 먹은 후에야 만족을 경험하면서 학대받는 동물군에 대해서는 열을 올리는 모순과 위선이 다시 한 번 생각났다.


그렇다면 나같은 사람은 동물을 생각하면 안되는가. 지금 당장 비건이 되기 전까지 이런 책도 읽으면 안되는가.


저자는 지금 당장 오리털 점퍼를 다 갖다 버리고, 바로 채소만 먹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번이라도 육식을 제외한 식사를 차려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한다. 


캣맘, 캣대디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는 가운데 있다. 일각에서는 동물 보호 차원인데 이해해 줘야 한다고 하지만 내 집 베란다 바로 밑이 길고양이 밥상이라면 고양이를 원래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스트레스일 수 밖에 없다. 좋아하는 것을 강요할 필요가 있는가? 그렇다고 혐오의 방망이를 흔들어 폭력을 가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싫은 것을 싫다고 말했다고 악랄하다고 호도당할 필요는 없다.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들도 본인이 옳은 일을 한다는 것에 취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일이 있다면 신속히 시정돼야 한다.



개가 짖는 게 싫다고 그 개의 성대를 수술하자고 하지말고 개가 짖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공원 한켠에 반려견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내가 낸 세금' 운운할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시각을 조금만 더 길러줬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견주들도 '우리 개는 안 물어요.' 대신 '배려해줘서 고맙습니다' 라는 시각을 가졌으면 좋겠고. 상생하는 사회 아닌가. 저자는 그런 목소리를 치우치지 않는 시선으로 전개하고 있다. 참 마음에 드는 책이다.


동물을 쉽게 사고 쉽게 버릴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적인 문제를

몇몇 개인의 '좋은 마음' 으로만 해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가 나고 기분이 상할수록 그 질문을 시민단체나 개인이 아닌

정부나 국회에 던져야 한다.

개인들이 서로의 한계를 탓하는 것으로 달라질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p.180


이 책을 읽고 나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도 동물 구조는 119에서 해도 유기견 구조나 동물 학대의 문제는 동물보호연대에서 해결 하는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구청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동물보호연대에 전화해서 업무태만을 운운하거나 뜻모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의 무례를 저자는 지적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질게 아니라 정책도 잘 알아두어야겠다. 그리고 제발 아무 지자체나 전화해서 적은 분노를 아무렇지않게 표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거리를 많이 던지는 책이다. 독서모임에서 다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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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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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지만 작가의 용기와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콜슨 화이트헤드의 책은 향후 50년 안에 세계문학전집 속 고전반열에 설 것이다. 그만의 상상력으로 사회를 사실적으로 비추기 때문이다. 뻔하지 않은 스토리, 냉혹한 전개 그리고 반전! 책친구들 모두에게 사주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2017년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00인 안에 들었던 콜슨 화이트 헤드의 신작 [니클의 소년들]을 읽었다. 나는 콜슨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읽고 알았고, 그의 작품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각인 돼 있다. 짓밟힌 흑인의 인권에 대해서 이토록 잘 쓸 수 있는 작가는 현존하는 작가 중에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니클의 소년들]은 2019년 출간 후 커커스상, 2020퓰리처상, 오웰상을 받았다. 작가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로 퓰리처상을 받았기 때문에 두번이나 퓰리처상을 받게 되었다.



  

분명히 학교 부지 였던 곳에서 발견된 수 많은 청소년들의 뼈. 3년전에 폐교한 청소년 보호 학교의 학생들로 밝혀졌다. 두개골에 상흔이 있고, 갈비뼈에 총알이 박힌 채 매장된 사체. 이 곳을 학교라 부를 수 있는가!


1962년 엘우드라는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소년원 니클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엘우드의 부모는 그를 두고 떠났지만 자애로운 할머니 아래서 별로 부족한 것없이 살아가는 씩씩한 소년이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책을 사랑했고, 어른들은 그를 놀렸지만 늘 함께 해주는 할머니 덕분에 잘 자라고 있었다. 마틴루서 킹 목사의 기사를 보면서 흑인들도 사람대접 받을 날이 오겠지 꿈꾸며 살았던 소년이었다. 잡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학교 선생님 힐이 와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꿈 같은 일이었다. 그 대학으로 찾아가던 중 얻어 탄 트럭이 하필 도난차량이었고 엘우드는 소년원에 감금된다.



이럴수가. 이런 변이 있나. 엘우드의 할머니는 손자를 되찾지 못한다. 변호사를 구했지만 돈만 들고 도망가 버렸다. 백인이 흑인을 도와줄리는 없었다. 너무도 억울했다.



그렇게 엘우드는 죄없이 수감됐다. 그 곳은 학교가 아니었다. 죄를 교화 시켜주는 곳도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는 쓰레기같은 음식만 배급됐고,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은 화이트 하우스로 끌려갔다. 그곳은 채찍으로 아이들을 후려갈기는 곳이었다. 맞다가 죽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냥 매장됐다. 가족이 찾으러 오면 도망갔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받아야 하는 배급품은 빼돌린 후 팔아서 학교장이나 선생의 수입으로 들어갔다. 엘우드는 마침내 그 곳의 비리를 적어둔 치부책을 학교에 감사 나온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흑인들의 말에 백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소설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비해서는 덜 잔혹하고 색채로 따지자면 덜 붉다. 그렇지만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오는 것은 50년이 지난 지금, 미국사회에서 흑인 인권이 좋아졌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잿빛이다.


미국내 흑인 인구는 13.4%가 넘는다. 아직도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가운데 흑인에 대한 과잉진압이나 폭력에 대한 기사가 거대한 바다를 넘어 우리나라까지 심심찮게 들려온다. 아직도 KKK같은 단체들이 버젓이 활동을 한다. 자유주의 국가라는 타이틀은 오명이 된 지 오래. 그래서 콜슨 화이트 헤드같은 작가의 성공은 더욱 응원할만 하다. 니클은 모두 허구라고 하지만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최근 코로나 백신 상용화를 앞두고 출시된 백신의 양이 적다보니 선별해서 투약하고 있다. 그런 중에 미국에서는 흑인 간호사에게 먼저 백신을 맞게 해 논란이 되고 있다. 물론 미국에서 주장하는 바로는 백인보다 흑인이 주거 환경이나 직업, 생활면에 있어서 감염률이 높기 때문에 먼저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수하게 그들의 주장을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 출시된 약의 안전성을 믿기 어려워 백신 주사를 거부하는 백인들이 흑인을 임상실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진짜 헛소문일 뿐일까. 나는 왜 아직도 그 비약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지 모르겠다. 미국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난민 문제가 아니라 몇백년동안 같이 살아오고 있는 이웃에 대한 여전한 차별 문제다. 적어도 아이들만큼은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흑인 대통령까지 나온 지금 아직도 흑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는 모든 체제와 문화는 시급히 변경되어야 한다. 전족과 순장만이 인권유린적 풍습이 아니다. 도처에 만연한 인간 경시의 문제와 문화가 조속히 사라지길 또 한번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작가의 용기와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콜슨 화이트헤드의 책은 향후 50년 안에 세계문학전집 속 고전반열에 설 것이다. 그만의 상상력으로 사회를 사실적으로 비추기 때문이다. 고맙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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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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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에세이 진짜 좋아하는 나로서 [방구석미술관]의 아성은 익히 접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1권은 읽지 못했다) 아직 1권도 못 읽었는데 2권이 나왔다니 옴뫄 이게 무슨 일이야 1권부터 읽어볼까 하다가 단번에 마음을 바꾼 것은 바로 '한국' 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었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힌대로 우리는 서양화가 몇 명의 이름과 주요 작품을 비슷하게나마 나열할 수 있어도 한국 미술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소 많이 그리던 화가 이중섭, 박완서 작가때매 알게 된 박수근 화백이나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선생 정도? 그래도 미학에세이 좀 읽은 가락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도 알고 (나혜석은 사실 소설 <경희>로 먼저 알았음) , 이 책에는 없지만 디아스포라 화가 변월룡 선생도 읽어본 적이 있다. (참고자료: 문영대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 컬처그라피)

그래서 더! 이 책이 좋았다. 표지 슬로건처럼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점점 빠져들었다.  그리고 울었다. 몇번이고 눈물이 찔끔씩 났다. 시대가 오랠수록 아픔이 컸다. 현재라고 예술가들이 겪는 고충이 왜 없겠냐마는 어지러운 시대땐 더 그랬을 것이다. 나라가 더 강한 나라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민족이 처참하게 도륙당하고 간신히 그에게서 벗어났나 했더니 민족 상잔의 비극이 전쟁으로 치달아 아들을 뺏긴자, 가족과 생이별한 화가들의 일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 예술을 놓치지 않으려고, 민족의 얼을 화폭에 담으려고 발버둥치는 화가들을 만날 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그래서 우리 한국의 미술이 포기하지 않은 굳은 의지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것이 못내 감명깊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자의 말하기 방식이 마음을 많이 흔들었다. 개개의 일화가 슬픈 것은 맞지만 눈물까지 안 쏟았을지도 모르는데 어미를 '-했다' 로 끝내지 않고 '했어요' 로 끝내는 , 이른바 말하듯이 서술하는 기법이 마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아서 화가들의 애달픔이 더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자의 말하기 방식이 얼마나 눈에 쏙쏙 들어오는지 이해가 쉽고 내용이 거의 다 기억이 난다. 왜 이렇게 인기를 끌었는지 알 수 있었다.

미학에세이를 어려워 하는 독자들도 쉽게 접할 수 있으니 꼭 한 번 읽어보길 잘한다. 그리고 나도 [방구석 미술관] 1편도 꼭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찌감치 읽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싶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는 이응노 화백이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그림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유럽까지 가서 한국의 미술을 전하고자 애썼던 이응노 화백을 부끄럽지만 처음 알았다. 아들을 6.25에 잃고 가족과도 생이별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는데 후배들을 위해 가진 돈을 다 주고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그림을 그렸다. 그 고생 다하고도 간첩으로 몰려서 교도소에 복역했고, 정권이 바뀌어 출소 했지만 그 후에도 감시당했던 비운의 화가.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멋있었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합쳐서 문자로 드러낸 그림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알고 있는 화가들도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정보가 많아졌다. 나혜석과 이응노가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건 몰랐다. 이중섭이 가족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와 그림을 보고는 콧날이 시큰해 졌다.

몰랐다가 알게 된 화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은 유영국의 그림들이었다. 화가가 안됐으면 사업가로 대성했을 거라던 유영국 화백은 원래 금수저라 잘됐겠지 뭐 싶었는데 일본인 선생의 패악에 학교를 딱 때려치우고 나오는 그 카리스마를 접하는 순간 사실은 살짝 오해했던 부분이 풀리기도 하고 그랬다. 그의 그림이 좋은 이유는 왜 그런지 따뜻해보여서다. 저작권 문제로 여기까지 올릴 수는 없지만 아마 책을 본 독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추상화는 사실은 잘 몰라서 좋아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유영국의 그림은 저자가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했고, 그 색감이 뭔가 집에 걸어놓고 싶은 정도로 따뜻한 감성이 묻어났다. (꼭 한 번 찾아보시기를)

천경자의 그림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프리다칼로를 정말 좋아하는데 여인상의 이미지가 좀 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화려한 색채와 뱀이 얹힌 머리가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생생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훌륭한 화가가 많은데 잘 모르는다는 이유로 서양화가만 알고 찾았던 나를 반성했다. 아쉬운 것은 지금 국적이 한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히 우리 민족인 변월룡 선생에 대해서도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사실은 조금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엄청 좋은 책이다. 화가들의 삶을 이렇게 쉽고도 알차게 엿볼 수 있을까? 미학자로 유명한 사람들의 책도 읽어보고 잘 모르는 저자의 미술 에세이도 읽어보고, 매일 한 쪽씩 읽게 해준다는 책도 읽어보았지만 이토록 세밀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미학 에세이는 처음이다. 근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운이 좋아서 지원받은 덕에 기한내 읽느라고 허겁지겁 읽었지만 시간이 되면 두고두고 찾아서 읽고 보고 하고 싶다. 수록된 한국화가만큼은 누가 물어도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기억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서 인덱스 스티커를 붙이다 붙이다 다 못 붙이고 읽었다. 정말 좋은 책으로 따뜻하게 연말을 마무리한다.

코로나가 물러가서 빨리 미술관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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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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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호세 어쩌구 저쩌구 하는 사람이 말하길 '언어는 언제나 과잉이다' 라고 했단다. ('말은' 일지도 모른다, 찾아보니 나오진 않는다)

말은 내가 전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고, 그것이 오해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가질 것이다' 라고 착각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말이었는데 내가 잘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문득 어제 읽었던 이 소설이 생각났다. 노라와 모라. 7년을 같이 살았지만 서로를 절대적으로 몰랐던, 자신의 상처만 보느라 서로에게 소홀했던 외로운 두 소녀의 모습이 겹쳤다.

말에 아무리 과잉이 있다지만 한 번이라도, 한 쪽이라도 자기 마음을 털어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이 소설은 절반은 노라의 이야기고, 절반은 모라의 이야기다. 그리고 벤다이어그램처럼 가운데가 정확하게 겹치는 두 사람의 7년이 있다. 둘 중 하나의 이야기를 고르라면 모라를 고르겠다. 모라의 이야기를 읽다가 울었기 때문이다. 노라보다는 모라가 상실감이 심했다. 지금 당장 모라보다는 노라가 더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 상처의 강을 건너는데 한 명을 뭍으로 나왔고, 한 명은 아직도 덜 건넜다. 그리고 강이 얼기 시작했다. 속상했다.

노라의 이야기는 초록색 글씨로 전개된다. 작가가 원했는지 편집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른 글씨 색으로 나눠주니 읽기는 좋았다. 서술자가 교차하거나 여러명인 소설인 경우에 소제목을 달아주지 않으면 누구 이야기인지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모라는 검정색이다)

노라는 홀어미 슬하에서 자랐다. 어느날 아버지가 죽었고, 다소 거칠고 모진 말을 일삼는 엄마에게 상처도 입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춤바람이 났고, 남자를 데려왔고, 남자에겐 노라와 동갑인 딸 모라가 있었다. 여러가지로 공통점이 많다며 엄마는 좋아했지만 살림을 합치고서도 모라에게는 잘 안해주고 노라에게만 용돈을 쥐어주는 기행을 보였다.

노라는 모라와 등하교를 같이 했지만 서로 같은 방을 썼지만 서로 엄청 친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라와 양아버지가 왔을 때처럼 그렇게 떠났다. 엄마는 지금도 이혼이 자기의 재산을 지킨 길이었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노라는 어려웠던 회사생활을 그만 두고 종묘상에서 일하면서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20년전에 헤어진 모라였다. 모라의 아버지가 객사를 했는데 장례식에 와달라는 전화. 7년간 같이 살았지만 두툼한 손 이외에는 별 생각나는 것이 없는 엄마의 옛남자. 노라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월차를 내고 모라를 만나러 간다.

모라는 진짜 힘들게 살았다. 어릴 때 엄마가 비디오 틀어주고 나간 후로 여태 연락 두절이고, 소문을 피해 아버지는 여섯살짜리 딸을 시골 친척집에 맡겼다.

홀로 1년을 상실과 모멸에 몸부림치던 모라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노라 모녀와 함께 살게 된다. 노라엄마가 대놓고 하는 차별을 견디며 또 버림 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어느날 너무 무서운 마음에 딱 한 번 노라의 이불 속에 파고든 경험 이외는 노라 모녀에게 사랑받거나 보호받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그마저도 7년의 세월이 지나자 끝난다. 아버지는 늘 모라를 두고 떠났고, 결국은 죽은 채로 돌아왔다. 모라는 아버지를 혼자 보내기 싫어서 노라를 불렀고, 자기가 얼마나 노라를 미워했었는지 상기했다.

이 소설 속 두 여자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설명이 적다는 생각이다. 그저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아마 이 두 아이들도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엄마 사먹으라고 노라에게 쥐어주던 돈은 늘 1인분 값이었으며, 노라는 모라의 아버지에게 한 번도 아버지라는 말을 안했다는 것들에서 모라에게는 채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자리지만 노라에게는 그다지 불필요한 아버지라는 존재였다는 것. 그 아버지의 자리는 노라에게 이름을 지어준 노아무개씨 뿐이었다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다. 솔직히 한 명이라도 따지고 들었으면 어땠을까. 여타의 다른 집 애들처럼 머리라도 끄잡고 싸워봤더라면 말이다. 한 명이 한 명에게 '너는 왜 내 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하지 않냐.' , '너는 왜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왔냐.' , '너는 왜 하교길에 나를 피하냐.' , '너는 왜 나에게 다 털어놔서 나를 비참하게 하냐.' 는 식의 속풀이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때로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켜켜이 쌓은 응어리를 털어내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때로는 터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 자존심을 뭉개는 게 아니라 먼지처럼 부유하는 오해와 자조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란 것을 몰랐기 때문에,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둘 사이는 가까이 하지 못하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돼 버린건 아닐까.

안다, 너무 어렸다는 것을. 안다,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하지만 성인이 돼서 만났을 때 만이라도 서로 옛이야기를 주절거릴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구나 자기만의 마음의 방이 있을테다. 어떤 이는 누가 훅 열고 들어와도 그러려니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조금의 노크도 마뜩찮게 여길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외려 활짝 열고 언제든지 들어오라고 하는 반면 누군가는 아예 빗장을 걸고 없는 척 하며 살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기 마음이지만 처음부터 닫아거는 사람일수록 즐거움이나 행복에서 가까운 사람을 보질 못했다. 나의 모든 것을 오픈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함께 사는 누군가에겐 나의 마음을 표현해보는 것도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좋은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은 시절이 조금 더 많았던만큼 노라가 좀 더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 같다. 결국 노라는 자기만의 방에 빗장을 건 모라에게 손을 내민다. 그 손의 의미는 독자들이 파악할 몫이지만 먼저 내밀 수 있는 용기는 조금이라도 사랑받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개인적으로 노라와 모라가 다시 잘 지냈으면 좋겠다. 오랜기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자매처럼, 오래전 산 밑 집에서 함께 살 때 새 소리를 흉내내던 그 엷은 미소의 어느날처럼. 모라는 노라의 손을 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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