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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1208/pimg_7540751262756519.jpg)
아까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호세 어쩌구 저쩌구 하는 사람이 말하길 '언어는 언제나 과잉이다' 라고 했단다. ('말은' 일지도 모른다, 찾아보니 나오진 않는다)
말은 내가 전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고, 그것이 오해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가질 것이다' 라고 착각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말이었는데 내가 잘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문득 어제 읽었던 이 소설이 생각났다. 노라와 모라. 7년을 같이 살았지만 서로를 절대적으로 몰랐던, 자신의 상처만 보느라 서로에게 소홀했던 외로운 두 소녀의 모습이 겹쳤다.
말에 아무리 과잉이 있다지만 한 번이라도, 한 쪽이라도 자기 마음을 털어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이 소설은 절반은 노라의 이야기고, 절반은 모라의 이야기다. 그리고 벤다이어그램처럼 가운데가 정확하게 겹치는 두 사람의 7년이 있다. 둘 중 하나의 이야기를 고르라면 모라를 고르겠다. 모라의 이야기를 읽다가 울었기 때문이다. 노라보다는 모라가 상실감이 심했다. 지금 당장 모라보다는 노라가 더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 상처의 강을 건너는데 한 명을 뭍으로 나왔고, 한 명은 아직도 덜 건넜다. 그리고 강이 얼기 시작했다. 속상했다.
노라의 이야기는 초록색 글씨로 전개된다. 작가가 원했는지 편집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른 글씨 색으로 나눠주니 읽기는 좋았다. 서술자가 교차하거나 여러명인 소설인 경우에 소제목을 달아주지 않으면 누구 이야기인지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모라는 검정색이다)
노라는 홀어미 슬하에서 자랐다. 어느날 아버지가 죽었고, 다소 거칠고 모진 말을 일삼는 엄마에게 상처도 입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춤바람이 났고, 남자를 데려왔고, 남자에겐 노라와 동갑인 딸 모라가 있었다. 여러가지로 공통점이 많다며 엄마는 좋아했지만 살림을 합치고서도 모라에게는 잘 안해주고 노라에게만 용돈을 쥐어주는 기행을 보였다.
노라는 모라와 등하교를 같이 했지만 서로 같은 방을 썼지만 서로 엄청 친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라와 양아버지가 왔을 때처럼 그렇게 떠났다. 엄마는 지금도 이혼이 자기의 재산을 지킨 길이었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노라는 어려웠던 회사생활을 그만 두고 종묘상에서 일하면서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20년전에 헤어진 모라였다. 모라의 아버지가 객사를 했는데 장례식에 와달라는 전화. 7년간 같이 살았지만 두툼한 손 이외에는 별 생각나는 것이 없는 엄마의 옛남자. 노라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월차를 내고 모라를 만나러 간다.
모라는 진짜 힘들게 살았다. 어릴 때 엄마가 비디오 틀어주고 나간 후로 여태 연락 두절이고, 소문을 피해 아버지는 여섯살짜리 딸을 시골 친척집에 맡겼다.
홀로 1년을 상실과 모멸에 몸부림치던 모라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노라 모녀와 함께 살게 된다. 노라엄마가 대놓고 하는 차별을 견디며 또 버림 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어느날 너무 무서운 마음에 딱 한 번 노라의 이불 속에 파고든 경험 이외는 노라 모녀에게 사랑받거나 보호받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그마저도 7년의 세월이 지나자 끝난다. 아버지는 늘 모라를 두고 떠났고, 결국은 죽은 채로 돌아왔다. 모라는 아버지를 혼자 보내기 싫어서 노라를 불렀고, 자기가 얼마나 노라를 미워했었는지 상기했다.
이 소설 속 두 여자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설명이 적다는 생각이다. 그저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아마 이 두 아이들도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엄마 사먹으라고 노라에게 쥐어주던 돈은 늘 1인분 값이었으며, 노라는 모라의 아버지에게 한 번도 아버지라는 말을 안했다는 것들에서 모라에게는 채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자리지만 노라에게는 그다지 불필요한 아버지라는 존재였다는 것. 그 아버지의 자리는 노라에게 이름을 지어준 노아무개씨 뿐이었다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다. 솔직히 한 명이라도 따지고 들었으면 어땠을까. 여타의 다른 집 애들처럼 머리라도 끄잡고 싸워봤더라면 말이다. 한 명이 한 명에게 '너는 왜 내 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하지 않냐.' , '너는 왜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왔냐.' , '너는 왜 하교길에 나를 피하냐.' , '너는 왜 나에게 다 털어놔서 나를 비참하게 하냐.' 는 식의 속풀이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때로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켜켜이 쌓은 응어리를 털어내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때로는 터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 자존심을 뭉개는 게 아니라 먼지처럼 부유하는 오해와 자조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란 것을 몰랐기 때문에,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둘 사이는 가까이 하지 못하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돼 버린건 아닐까.
안다, 너무 어렸다는 것을. 안다,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하지만 성인이 돼서 만났을 때 만이라도 서로 옛이야기를 주절거릴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구나 자기만의 마음의 방이 있을테다. 어떤 이는 누가 훅 열고 들어와도 그러려니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조금의 노크도 마뜩찮게 여길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외려 활짝 열고 언제든지 들어오라고 하는 반면 누군가는 아예 빗장을 걸고 없는 척 하며 살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기 마음이지만 처음부터 닫아거는 사람일수록 즐거움이나 행복에서 가까운 사람을 보질 못했다. 나의 모든 것을 오픈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함께 사는 누군가에겐 나의 마음을 표현해보는 것도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좋은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은 시절이 조금 더 많았던만큼 노라가 좀 더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 같다. 결국 노라는 자기만의 방에 빗장을 건 모라에게 손을 내민다. 그 손의 의미는 독자들이 파악할 몫이지만 먼저 내밀 수 있는 용기는 조금이라도 사랑받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개인적으로 노라와 모라가 다시 잘 지냈으면 좋겠다. 오랜기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자매처럼, 오래전 산 밑 집에서 함께 살 때 새 소리를 흉내내던 그 엷은 미소의 어느날처럼. 모라는 노라의 손을 잡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