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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이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지는 예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을 토대로 하여 이야기를 구성하더라도 작가적 상상력이 더욱 중요한 경우가 있다. 그 작품을 둘러싼 어떤 이야기도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그러하다. '진주 귀고리 소녀'가 바로 이런 경우다. 그러나 작가인 트레이시 쉬발리에는 오히려 작가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힘을 얻어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작가에 대해 알려진 전기적 사실일 적을수록,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화가의 전기적 사실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가운데, 쉬발리에가 소설 구상을 위해 참조한 것은 베르메르가 생전에 남긴 그림 35점이 전부이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진주 귀고리 소녀' 뿐 아니라 베르메르의 그림 35점 모두가 이야기 속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동일한 장소인 것으로 추측되는 배경, 동일한 소품들(노란색 코트, 귀고리, 악기 등), 심지어는 모델의 얼굴조차 겹쳐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그림 속 소품과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상상의 세계인 베르메르의 화실을 창조했고, 주변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자주 등장하는 노란색 코트는 아내의 것으로 모델에게 빌려준다는 설정을 통해 소품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이유에 신빙성을 부여했다.
이런 이유로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옆에 두고 소설을 읽으면, 쉬발리에의 소설 창작 과정을 역으로 상상할 수 있다. (친절하게도 책은 필요한 부분에 적절한 그림을 삽입해 놓았다.) 소설은 17세기를 살았던 한 화가의 작품 창작 과정을 그리고 있고, 그 화가의 그림들은 21세기의 소설가의 창작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한 예술끼리의 역동적인 소통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흥미를 더한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면 동일한 공간과, 소품, 인물이 반복됨을 알 수 있다.
소설 속 세계는 협소하다. 소설의 중심적인 사건이 펼쳐지는 장소는 대체로 작은 화실 안이고, 조금 멀리 벗어나도 시청 주변의 시장, 도심을 흐르는 운하 정도이며, 기껏해야 델프트 시의 바깥까지 확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좁은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사건들을 지켜보는 그리트의 심리가 시시각각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매순간 변해가는 주인공의 속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정적인 공간에서 조차 역동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베르메르가 살았던 곳으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델프트

여자의 시선이 화가를 향하고 있는 사실에까지 쉬발리에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소설의 가장 큰 줄기라 할 수 있는 그리트와 베르메르의 사랑도, 특별한 사건 없이도 지루하지 않게 묘사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극적인 애정 표현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영혼과 영혼이 서로 부딪혀 울리는 듯한 순결한 사랑이 그리트의 심리 속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전해질 듯 전해지지 않는 그리트의 사랑, 카타리나와의 아슬아슬한 신경전, 베르메르의 그림에 대한 그리트의 감정,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나타나는 화가의 시선같은 것들을 담아 내기에 그 협소한 공간적 배경은 조금의 부족함이 없다.
소설은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 소녀'가 어떤 과정으로 탄생되었는지를 묘사하는 데 가장 큰 공을 들이고 있다. 그림 속의 소녀가 보여준 미묘한 표정 속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동안 그리트의 심리를 그토록 자세히 그려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트의 복잡한 심리를 '진주 귀고리 소녀'의 탄생이라는 클라이맥스의 순간까지 끌어오기 위해 작가는 심리묘사에 지극히 공을 들였던 것이다. 행복함과 슬픔, 두려움의 감정이 뒤섞인 그림 속 소녀의 묘한 표정은 쉬발리에의 상상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그리트가 느꼈을 복합적인 감정들-베르메르를 향한 설렘, 카타리나에 대한 죄책감, 하녀라는 신분적 한계에 마음 졸여야 하는 회한, 값비싼 진주 귀고리를 주인 몰래 달게 된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이 한 편의 그림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소설가의 상상력이 17세기를 살았던 한 화가의 정신과 만나는 지점이다.

소설 창작의 결정적인 동기가 된 '진주 귀고리 소녀'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는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문체가 현대적이며, 사건 보다 인물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었음에도 속도감 있게 읽힌다. 무엇보다 한 편의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전기적 사실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냈다는 신선한 발상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