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성장에는 아픔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 현실의 논리로는 굳이 참일 필요가 없지만 소설의 논리로는 당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소설은 가볍게 읽어내릴 수만은 없는 그만의 무게를 가진다. 현실의 직시와 극복, 성장으로 이어지는 천편일률적인 패턴에도 불구하고 성장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주인공에게 따르는 '아픔'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아픔이라는 것은 종류나 강도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 따라서 성장소설은 인물이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 속에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투사하기 쉽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그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은 어리디 어린 소년 한동구이다. 동구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더없이 착하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의 불행은 조금씩 어긋나 있는 가족관계에서 시작된다.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의 지독한 고부갈등은 항상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이를 방관하거나 일방적으로 할머니의 편을 들어 어머니에게 상처주는 아버지의 무심함에 동구의 예민한 감성은 늘 상처받는다. 게다가 그 자신은 귀한 4대독자이지만 며느리 기를 살리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심술로 인해 구박의 대상이 되었으며 난독이라는 불명예스런 장애까지 떠안고 있어 이래저래 기가 죽어 지내는 신세이다.    

그러던 중 6살 터울의 여동생 영주가 태어나면서 동구의 입장은 조금 달라진다.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의 미움을 사 한복자라는 이름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뻔했던 영주는 타고난 귀염성과 영리함을 내세워 순식간에 한씨집안의 복덩어리로 등극한다. 딸이라는 큰 핸디캡을 가지고도 어느모로 보나 어리숙한 동구보다 뛰어났던 영주는 얼음장같은 집안의 분위기를 단숨에 녹여버린다.

동생의 존재는 동구에게 있어 성장의 시작이다. 오빠라는 이름이 주는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다. 3학년이 되어도 글을 읽지 못하는 동구에게 3살에 이미 글을 깨우쳐 주위를 놀라게 한 동생의 존재는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열등감을 안겨 준다. 이러한 어린 동생에 대한 동구의 이중적인 심정과 그 갈등은 천사 같은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는 동구를 더욱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동구의 삶에서 동화처럼 완벽하고 이상적인 화해와 화합의 순간은 끝내 찾아오지 않는다.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동구의 참된 성장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동구의 기억속에 남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인해 그의 유년이 조금은 아름답게 기억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 소설에서 독자는 어린 소년의 시점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 군부독재와 민주항쟁이라는 정치적 혼동기는 소년의 시점 속에서 두루뭉술하게 흘러가 버린다. 동구의 눈에 비친 그 혼란의 시대는 어마어마한 탱크의 실물을 볼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일 뿐이며, 박영은 선생님이 바지를 다려 입었다는 것만으로 비난을 들어야 했던 수상한 시대일 뿐이다. 이처럼 소년의 시점은 미숙한 시선으로 현상의 겉모습만 비춰보일 뿐이지만 가끔씩은 어른들이 보는 세상보다 더 정확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본질을 꿰뚫는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에 매우 충실하게 쓰여져 쉽게 읽힌다. 군데군데 직설 화법이 많아 상징과 생략의 묘미는 없지만, 주인공의 섬세한 내면 심리와 감정이 적절히 드러나 있어 재미를 준다. 해학적이면서 서정적인 문체로 독자를 웃고 울리는 완급 조절도 뛰어나다. 다만 이상적인 여교사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안이한 결말이 소설의 긴장을 다소 떨어뜨린다.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상징이 작품 전체를 일관적으로 꿰뚫고 있지 못하다는 점도 아쉽게 느껴진다. 그러나 작가의 처녀작임을 감안할 때 향후 행보를 기대하기에 충분한 역량을 보여준 소설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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