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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평점 :
가장 흔한 것은 삶이란 결국 허망한 것이라는 메시지다.
김영민 교수의 신작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이 질문에 가장 잘 마주하는 때는 언제일까? 아마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마주할 때가 아닐까?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불치병을 통보받거나 또는 가까운 지인의 투병이나 부고를 받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일시정지가 된다. 그리고 진지하게 묻게 된다.
"이제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열심히 일한 대가가 결국 이 시한부 인생 뿐이라는 것인가?"
이 질문 속에 누구도 속 시원히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 없는 질문. 그 침묵 속에는 분노와 허망함이 찾아올 뿐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한때 직장 동료였던 지인의 부고를 받았을 때 그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갑작스런 부고에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을 보며 질문했다. '왜 그렇게 즐기지도 못하고 일만 하다 사셨어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인간을 허무에 빠뜨리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허무의 가장 큰 주범인 죽음, 노화, 치매, 노동 등등.. 여러 예술작품을 통해 삶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어떻게 허무를 대해야할 것인가를 말한다. 저자는 독자들을 위로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결국 삶 자체가 허무한 것임을. 죽음도 피할 수 없고 노년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허무를 극복하기보다 허무를 인정하고 허무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부서진 성수대교는 말한다.
삶은 온전하지 않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고,
과거에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이 부서져버렸다고,
현재는 상처 없이 주어진 말끔한 시간이 아니라
부서진 과거의 잔해라고.
그러나 그 현재에 누군가 살고 있다고,
폐허를 돌이킬 수는 없으나 폐허를 응시할 수는 있다고,
폐허를 응시했을 때 인간은 관성에서 벗어나 간신히 한 뼘 더 성장할지 모른다고,
성장이란 폐허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폐허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일이라고.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지난 날을 되돌아본다. 2022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 새 끝자락을 향해 있는 지금, 시간의 무상함을 느낀다. 누군가는 초조해하고 누군가는 설레여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번에는 기필코 목표를 달성하겠노라고. 열심히 살겠노라고. 자본주의 사회 또한 우리를 채찍질한다. 열심히 일하라고. 뼈를 갈아도 성공할까말까하다고.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목표를 달성 못하면 삶이 무의미해져버리는 것일까?
일 또한 마찬가지다. 과학 기술이 진보했지만 과연 인간의 노동은 해방되었는가? 죽을 때까지 무거운 돌을 구르는 시시포스의 신화는 현대에서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절대로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동은 우리를 허무하게만 만드는 존재인 것인가?
이 허무함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재즈는 즉흥이다.
재즈의 핵심은 악보에 집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즐기고 궤도를 이탈해가면서 즉흥 연주를 얼마나 유연하게 해내느냐에 있다.
삶도 소울 재즈라면,
미리 정해둔 목표 따위는 임시로 그어놓은 눈금에 불과하다.
관건은 정해둔 목표의 정복이 아니라,
목표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자기 스타일을 갖는 것이다.
저자는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을 예로 든다. 삶의 의미를 목표가 아닌 순간 순간을 연주하는 소울 재즈.
즉흥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즐기는 소울 재즈처럼 우리 인생에 의도하지 않은 즉흥곡이 흘러나오면 그 즉흥곡에 맞춰 춤을 추라고. 그 순간을 즐기라고 말한다. 노동 또한 마찬가지다. 노동의 과정을 돈 벌기 위한 목표 지향적인 관점이 아닌 일상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재디자인해보라고 말한다.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저서 <마흔에게> 에서 삶은 마라톤이 아닌 춤이라고 말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기가 아닌 춤을 추면서 기쁘게 내려오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목표를 향해 뛰는 선수가 아닌 하는 일상의 순간 순간을 춤을 추며 나아가야 한다고. 이 춤을 추며 나아갈 때 우리는 오늘의 허무를 이겨나갈 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본다. 죽음은 인간을 가장 큰 허무함에 빠뜨린다. 왜 그럴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 묻는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를 응용한다. 죽음의 사신에게 자신이 따라가기 전 아이들에게 맛있는 크리스마스 빵을 만들어줘야 한다. 사신은 이걸 죽음을 미루기 위한 핑계로 생각하지만 정성껏 빵을 만든 후 할머니는 홀가분해하며 사신에게 이제 자신을 데려가라고 말한다. 의아해하는 죽음의 사신에게 할머니는 말한다.
"찰다(cialda) 속에 레시피를 숨겨두었으니 이제 비밀은 아이들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거예요. 이제 갈 시간이야."
비록 자신은 가지만 다음 세대에게 달콤함의 레시피를 남길 수 있다는 말. 그건 죽음 이후 몸은 떠나지만 그 이후에도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또 다른 세대의 삶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나는 가지만 내 아이들이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의 삶은 다음 세대를 통해 영원할 수 있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는 저자다운 유머러스함으로 허무함을 대하는 여러 방법을 이야기해준다. 저자가 던지는 질문과 대답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삶이란 허무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허무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정상이다. 그러니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카르페 디엠"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