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당신에게  

산에 다녀왔습니다. 아주 오랫만에 산행이였습니다. 결코 높은 산도 아니였고, 비록 울며불며 못간다 앙탈부리면서긴 했지만 그래도 설악산도, 지리산종주도 다 했었는데 하면서 너무 자만했었나봅니다. 산을 중반도 오르지 못해 다리가 약간 뻣뻣해 오더라구요. (늘어난 체중때문이 아닐까.-ㅁ-;;;) 힘드니까 자꾸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당장 앞에 있는 바위 하나를 오르는것에 치중하고, 당장 지금 능선을 넘어 서는 것 만이 중요해 집니다. 같이 산을 오르는 사람과 말 한마디도 섞지 않고, 심지어는 귀에는 이어폰을 꼽은채 그저 앞으로 앞으로 걷기만 했습니다.  한참을 오르다가 종아리가 심상치 않아서 중간에 멈춰서 스트레칭을 했습니다. 발목을 뒤로 쭉 잡아 당기면서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참 파랗더라구요. 귀에서 이어폰을 그제서야 뺏습니다. 시끄럽게 각자의 할말을 떠들어 대던 귓가에 바람소리가 흐릅니다.  

잠시간의 정적.  

귓가에는 바람소리,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때리는 소리, 저 멀리 어디선가의 물소리, 그리고 함께 오르던 사람의 숨소리도 들립니다. 정작 들어야 할 것들을 못듣고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습니다. 정작 봐야 할 것을 못보고 온 것 같았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습니다. 이제까지 땀흘리고 올라오며 약간 더운듯한 날씨가 짜증이 났었는데, 새삼 좋은 하늘이 고마워 집니다.  

나머지 산을 오릅니다. 귀에서 시끄럽던 음악소리도 끄고, 지금 딛고 있는 바닥이 아닌 저 멀리 능선을 바라보며 조금씩 조금씩 올랐습니다. 산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보다 더 넉넉한 시간이 내게는 있었는데 그저 오르는 것에 버거워 마치 지금이 급한것 마냥 한걸음 옮기기가 힘들게 산을 오를 필요가 없다는걸 이제서야 다시 느끼게 됩니다.  

산 정상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한잔 마실 요량이였는데 막상 정상에 오르고 보니 그곳에서 막걸리를 잔으로 팔던 아주머니는 안계셨습니다. 아마도 설 연휴인지라 오지 않으신듯 싶었습니다. 아쉬운 입맛을 물로 채우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당신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아마도 당신도 이렇게 오르고 있을텐데. 쉽지 않은 삶을. 유독 바위도 많고 능선도 높던 당신의 삶을 오늘도 이렇게 오르고 있을텐데. 간혹 하늘은 보나요? 당신 귀를 막고 있는 이어폰은 간혹 빼내서 바람소리를 듣나요? 당신생각보다 당신의 시간은 넉넉해요. 그러니까 조금 천천히 오르더라도 함께 오르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요. 간혹 그 사람들에게 기대어 쉬기도 하세요. 그리고 다시 오르세요.  

당신이,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 파란 하늘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사히 산에 오르고, 다시 내려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부디.  

추신:나는 당신의 산 정상에서 막걸리를 팔아 줄게요. 명절 연휴라고 해도 쉬지 않고 거기서 당신을 기다려 줄게요. 물론, 당신이 허락해 준다면요.  

-2011년 첫 등반을 마치고, 따라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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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2-07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에 다녀왔나요? 거기서 누구를 생각했나요? 바람을 한아름 맞았나요?

다들 넉넉하게 천천히 올라요, 가끔 이어폰 빼고 숲과 새들의 노래도 들으며.
따라님. 올 한해 행복하게 즐겁게.

따라쟁이 2011-02-07 14:03   좋아요 0 | URL
네, 산에 다녀왔어요. 뭐. 산이라고 할 것 까진 없고, 그냥 뒷산정도. ㅎㅎ
하여튼 짧은 시간 산에 오르는데 참 많은 사람이 생각나더라구요.
많은 사람을 생각했는데 편지 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한 삼분정도 더 생각했어요 ㅎㅎㅎㅎ

마녀고양이님도 올 한해 행복하게, 즐겁게

차좋아 2011-02-07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만치 않은 뒷산 따라님 집 뒤에도 있군요. 저의 집 뒷산도 그래요. 뒷산은 수락산, 앞산은 불암산. 그래도 불암산이 만만하여 곧잘 가곤 하는데 지난 토요일에 올해 첫 산책을 갔었어요. 아가들과 아내랑 걸어서 한 시간 이야기하며 뛰며 하늘보면서요.
올해는 산에 만히 갈 참이에요. 혼자도 가고 아내랑도 가고 아이들과도 갈꺼에요. 따라님 편지보니 가벼운 결심이 더 다져지네요. 불끈!!

따라쟁이 2011-02-07 18:34   좋아요 0 | URL
오와. 좋은곳에 사시네요. 뒷산은 수락산 앞산은 불암산. 부러워요. ^^
아이들과 같이 가신다면 날씨는 좀 풀리신 후에 가세요. 아직 땀흘리고 내려오니 좀 춥더라고요. 덕분인지 감기 기운이 살짝 있거든요. ^^

2011-02-07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7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1-02-0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번 느낀건데,,,따라님 글 잘 쓰신다..

따라쟁이 2011-02-08 17:41   좋아요 0 | URL
아.. 어... 이거 기분이 좋은데, 되게 민망하고..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하나요? ㅠㅠ

카스피 2011-02-08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도 자주 가셔야 되요.한번은 동네 뒷산을 일주하다 힘들어서 죽을뻔 했지용^^

따라쟁이 2011-02-09 22:1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우습게 봤다가 저도 고생좀 했어요. 땀이 그렇게 날 줄 모르고 체온 걱정도 안하고.. 덕분에 감기만 얻어왔어요. ^_^

윤슬천사 2011-02-10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 늦게까지 야근하다가.. 오랜만에 따라쟁이님 서재에 들렀네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어폰을 끼고 산을 오르는 중이었는데,
이 글을 읽고 이어폰은 빼어낸 것 같 같네요..
밤 늦게 막걸리도 주나요?

따라쟁이 2011-02-10 18:35   좋아요 0 | URL
아. 반가워요. 우리 오랫만이네요^-^

밤늦게 혼자 있는 산속은 무서워요. 기다릴테니까 빨리 오셔야 해요^^

저절로 2011-02-1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라님이 막걸리 주면
나, 백두산도 간다!

따라쟁이 2011-02-10 18:34   좋아요 0 | URL
네, 갑시다 백두산 내가 아주 싸짊어 지고 오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