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뇌는 어떻게 창조하는가 - 인공지능과 뇌과학으로 본 인간의 호기심과 창의성의 기원
다이코쿠 다츠야 지음, 김정환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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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뇌과학으로 본 인간의 호기심과 창의성의 기원

 

꽤 흥미로운 주제다. 지은이 다이코쿠 다쓰야는 인공지능이야말로 인간만의 창의성과 예술성이 더욱 주목받도록 만든다고 본다. 즉, 인공지능이 창의성과 예술성에 이른바 화룡점정(?龍點睛), 용의 눈을 그려 넣는. 마지막 점하나를 찍어 완성한다는 의미일까,

 

개성을 모두 재능이라 부를 수 없지만, 개성이 없으면 재능이 될 수 없기에. 아무튼, 개성이 무엇인지를 우선 아는 게 중요하다. 지은이는 뇌에서 생기는 동요, 흔들림에서 생기는 개성, 이 책은 뇌의 통계학습에서 시작하여, 2장 뇌는 어떻게 기억하고 변환되어 흔들림이 되는지, 3장에서는 힘과 동기, 4장 뇌의 통계를 사고의 관점에서 수렴적 사고와 확산적 사고, 여기서 생겨난 흔들림이 어떻게 창조적인 활동이나 획기적인 발명과 발견으로 이어지는지를, 그리고 5장에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인공지능이 따라잡기 힘든 인간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즉, 인공지능 시대에 재능을 키운다는 게 무엇인지, 인간의 가능성은 무엇인지. 1-4장까지는 뇌의 역할과 기능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결론은 제5장,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점,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이 책의 핵심이라면 핵심이다.

 

흔들림은 자신만의 것

 

흔들림이란 뇌에서 생기는 동요, 즉 망설임이라 해보자, 이런 망설임, 미묘한 벗어남, 우리 뇌는 통계 학습을 통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확률을 자동으로 계산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며, 불확실성을 높이고 낮추는 활동을 반복하면서 발생하는 동요를 즐긴다. 이 흔들림이 곧 개성으로, 창의성으로 탄생하는데, AI가 갖지 못한 인간만의 고유한 힘, 인간다움이다. 통계 학습을 배움으로 표현해보자,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스타니슬라스 드앤의<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로크미디어, 2021)에서 우리 뇌는 왜 기계보다 잘 배울까?, 라는 물음에 대한 답 또한 이 책에 들어있다.


뇌가 잘하는 것과 AI가 잘하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AI는 모든 정보를 모으는 수렴적 사고, 이를 바탕으로 분석(기계적인 분석인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하지만, AI 자체가 흥미, 호기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단지 처리할 뿐, 창의성과 호기심이, 창조의 힘이다.

 

아무튼, 지은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만의 길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울러 그것이 최선(왕도)이 아니어도 좋다는 것이다. 또, 외형적인 증명인 학위는 창조성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기에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기어 다니다가 걷기 시작할 무렵이면 각자의 방법으로 걷기를 시도한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지 모두가 똑같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른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개개인의 과정과 경로는 다르지만, 모두가 옳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성공한 방식을 강요하면 멀리 돌아가게 되거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노자의 말처럼, 공맹의 입신을 위해 바람직한 상을 따라 평생을 공부한 유학들이 좌절하고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은이는 참으로 보편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왕도가 아니라도 괜찮다

 

위에 말한 자기만의 방식으로, 교육 제도 안에서 모두가 같은 교과 과정에 따라 수업을 받는데 학습 내용, 수업 시간, 재학 기간은 어떤 학교든 유사하다. 개개인의 개성과는 관계없이 말이다. 이렇게 틀에 박힌 교육을 통해 사회에 나오면 또 하나의 틀이 존재하는데, 일류대학에서 일류 기업으로 과장에서 부장으로 가는 길을 걷게 된다. 여기서 탈락하면, 인생의 실패자가 된다. 자신이 알든 모르든 인생은 목적지가 같더라도 그곳에 도달하는 경로는 한가지가 아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개성 있게 걸어가면 그만이다.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AI가 현실 세계로 침투건, 도입이건 인간과 함께 협동, 협업할 수밖에 없는 시대다. AI가 인간의 일자를 뺏는다는 것은 단편적인 이해다. 농업이 발달하면서 수렵이 힘을 잃고, 산업 시대에 들어서 농경지 경작에 매달렸던 노동력은 제조업(공장으로 삶의 터전이 바뀌고), 서비스업 등으로 계속 옮아가면서 없어진 일자리와 새로 생겨난 일자리. 아무튼, AI가 잘하는 수렴적 사고와 인간의 창조적 능력, 확산적 사고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라는 점에 주목하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고, 새로운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공지능이 얼마나 발전하든지 인간의 창조성을 따라잡을 수 없는 구조라고, 쳇GPT가 에세이를 쓰고, 논문을 만든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수렴사고 체계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습작 시절, 자신이 좋아했던 미국 작가의 글쓰기를 따랐다고, 그렇지만 그에게는 창조성, 예술성, 그만의 개성이 존재했기에 그만의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은 그런 것이다. 수렴적 사고와 확산적 사고의 융합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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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란 무엇인가
맷 월시 지음, 남미희.신대섭 옮김 / 문곰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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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질문, 한 사람을 여자로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자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책<여자란 무엇인가> 지은이 맷 월시는 보수정치평론가, 논객이다. 여기서 논객은 19세기의 작가 오노레드 드 발자크<기자 생리학>(페이퍼로드,2021)에서 말한 논객의 개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발자크는 논객이란 몽테스키외, 보댕, 블랙스톤, 벤담, 루소 같은 위대한 작가에게 부여하는데, 숭고한 보편적 원리를 제시하는 사람이나, 예언자, 사상적 지도자들을 논객이라…. 지금은 강물에 떠다니는 작은 막대기처럼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바쁜 이들을 논객이라 말한다.

 

왜 논객이라는 낱말에 집중하는가? 시류에 따라 강물에 떠다니는 작은 막대기에 지은이를 비유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영향력 이른바 인플루언서가 젠더, 성, 여자, 성경, 킨제이보고서, 존 머니, 트랜스젠더, 동성애, 이성애 등 성에 관한 이슈를 쏟아낸다.

 

간단한 질문, 여자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면 당파성일까, 맷 월시는 세상의 절반이 여자인데, 출생신고서에 젠더, 성별 표기를 남, 여라고 쓰는 순간 상속재산에 관한 권리의 향방이 바뀐다고 누군가의 말을 빌려 이야기한다. 비약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만. 아무튼, 최근 한국 사회에서 보이는 이상하고 위험한 움직임, 한 자치단체의 인권 헌장 제정 공청회를 꽉 메운 특정 종교세력들, 동성애, 외국인, 불법 외국인, 다양한 가족 구성, 성 평등 등의 낱말이 헌장 안에 들어있다는 이유로 공청회장을 장악한다. 민주주의적 절차도 없고, 오로지, 세상 말세, 동성애는 성경에 반한다는 이유로. 마치 중세 1000년간의 햇빛을 가리던 어두운 신의 세계가 부활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번역의 오류인가, 아니면 맷 월시의 글쓰기가 이런가 하는 대목이 눈에 띄었지만, 뭐, 그렇다 치자, 그런데 왜 이 시기에 이런 책이 나온 거지라는 의문이 든다. 공부할 거리가 하나 늘어서 즐겁지만 말이다.

 

이 책은 10장으로 구성됐다. 1장, 위에서 말한 간단한 질문, 여자는 무엇인가로 시작하여, 2장에서 성별 이론의 역사를 살핀다. 아프리카의 인간에 대한 생각(한몸에 여성도 남성도 다 들어있다?), 킨제이보고서를 뜯어보면서, 3장 이른바 젠더에 관한 이론을 정리, 본격적인 논의를 한 것으로 보는 존 머니의 이야기를, 4장에서 젠더 이론이 교육과정에 들어오게 된 것인가를, 5장 트랜스젠더 점령, 6장 성전환 약속, 그리고 8장 트랜스젠더 문화전쟁 그리고 10장 반란까지, 꽤 불편한 까기 방식, 분명 참고문헌을 들이대면서 논리를 전개하는데, 문맥의 꼬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불량한 독자가 되어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 책 내용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조목조목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서 논박하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다만,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명확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깟 책하고 던져버려서는 안 될듯하다.

 

젠더, 트랜스젠더,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

 

트랜스젠더, 남자의 생식기를 달고 나왔는데, 몸과 마음이 일치, 즉 남성성, 제2의 성징 수염이 나고 뭐 어쩐다하지만, 그런 특징이 두드러지지 않고, 자꾸만 남성을 피하려 하는 이건 또 뭔가, 몸은 분명 남성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부조화다 이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생물학적 문제인가, 심리학적 문제인가, 존 머니는 “양육”의 태도에 따른다는 것이다. 여아와 남아에게 각각 사회적 성으로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여자아이는 이렇게 하는 게 바르다고, 구분을 짓고 그렇게 길렀다면, 어떻게 될까?, 왜 자꾸만 마음은 여성쪽으로 기우는 걸까,

 

맷 월시는 논객이다. 이 책에서 그가 말하는 내용은 간단한 질문,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별로 생각한 적이 없을법한 “여자란 무엇인가?” 여기에 구체적인 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전문가이건 보통의 사람이든 답변의 수준이 거의 같다. 전문용어를 섞어서 이야기하지만, 말하면 할수록 모르고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적어도 지은이가 그런 의도로 편집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오히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거꾸로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젠더, 트랜스젠더라는 뭔가요. 그간에 나온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구요. 우리가 얼마나 틀이 갇혀있었는지, 당신의 머리로 생각해보세요. 제발... 아마도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전 미국의 한 대학 수영팀에서 트랜스젠더 여성과 함께 샤워실과 탈의실을 썼던 여학생들이 성희롱을 당했다고...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꿨다하더라도 남자아이냐는... 여전히 이런 갈등은 현실이다. 꽤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있어,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아울러,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 (통나무,2000)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에서 "여성" 그리고 서양의 멘(MAN)과 동양의 人의 미 등을 통해서 여자란 무엇인가를 접근하고 있다. 이를 함께 읽어보면, 좀 더 폭 넓은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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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문답·계방일기 - 인간과 만물 간의 경계를 넘어 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클래식 아고라 3
홍대용 지음, 정성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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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의 관심, 과학의 세계

 

담헌 홍대용, 그는 조선 후기의 뼈대 있는 가문, 영?정조시대 국정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노론 계열이니 요즘 말로 금수저 중에 금수저급, 상위 1% 안(조금 너무 했나 아무튼)에 드는 명망가 출신이다. 이른바 입신출세하기 위한 모든 환경과 조건이 갖춰진 셈인데, 과거에는 관심도 없었던 듯하다. 40이 넘어서 정조가 아직 세손일 무렵, 음직으로 출사하여 세손의 교육을 맡았던 적도 그때의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것이 이 책에 들어있는 “계방일기”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그는 두어 차례 태인 현감과 영천군수를 잠깐 지냈다. 그에게 고을수령자리란 역시 족쇄였던 모양이다.

 

그는 도학자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당대의 지배적인 학문 경향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은 아니어서 그의 저서 가운데 경서해설도 남아있다. 아무튼 그는 조선이라는 소중화 사상의 자가당착적인 사람들(소인배들?)과는 달랐다. 1731년 태어나 12살 때부터 당대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원행을 스승으로 석실사원에서 35살때까지 지내다가, 중국 사신단의 서장관을 맡은 작은 아버지 홍억의 자제군관으로 새로운 세계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남긴 여행기 “을병연행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과 함께 조선 3대 여행기라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현대에 홍대용 다시 보기, 톺아보기가 과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지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영역에서도 지구적 전환 라투르의 대지설과 사고전시, 홍대용의 지전설과 (무한우주관) 관점주의를 비교한 허남진 등의<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지구인문학의 발견”>(모시는사람들, 2023)연구도 있다.

 

의산문답(醫山問答)

 

의산문답, 홍대용의 혁신적인 세계관이 담긴 저술이라는 평가와 함께 그가 우주와 지구 그리고 기상현상, 생물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당대 청나라 연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조선 사신단이 꼭 들리는 곳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의무려산”이었다니.

 

홍대용은 의무려산에 사는 실옹(實翁=세상의 이치를 꿰뚫는)이라는 이름의 노인과 조선의 젊은 학자 두 사람을 등장시킨다. 조선 선비의 이름은 허자(虛子=30년 동안 책을 읽어 자신만만하지만, 중국에 가서 좌정관천임을, 스스로 공부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은, 속에 든 것이 없는 사람, 뭐 이른바 허당인 것이다)

 

홍대용은 왜 의무려산에서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을 주장했을까?

 

북경 방문길에 들렀던 의무려산은 화이(華夷,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을 짓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는 중국과 오랑캐, 즉 화이의 구분을 부정하기 위함이었다. 허자는 홍대용 자신이다. 지난 30년 동안 성리학 공부만 하던 허자가 세상에 나와 야심 차게 내뱉은 말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실옹은 우주무한론을 설파하는데, “우주의 뭇 별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중화라는 것은 중심이고, 중앙이란 것이며 그 주변은 이, 오랑캐라는 구분법을 벗어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지도를 그린 선각자... 당대의 소중화 주의에 빠진 헛똑똑이들,

 

역외춘추라, 공자가 춘추를 지어 내외를 구분한 것은 단지 공자가 주나라 사람이기에 주나라를 기준으로 내외를 정했을 뿐

 

역외춘추란 생각은 촌철살인이다. 놀랍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아전인수를 마치 진리인 것 마냥...이 밖에도 지원설(땅은 둥글다)은 18세기 이후 문헌비고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후로는 땅의 형체론으로 인정받게 됐다. 지원설의 수용은 세계의 중심이 어느 한 곳에 만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우주관이다. 무한공간설,

 

계방일기(桂坊日記)란

 

홍대용이 세자익위사의 시직(종8품)으로 근무했던 때의 일기로 마흔 네살 되던 해 1774년 음력 12월부터 9개월간의 기록이다, 내용은 세손 시절의 정조에게 경사를 강의하고 문답한 말이다.

 

서연의 주도자는 교수들이 아니라 세손이었다. 20대의 세손은 학문적 식견이 상당이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홍대용은 계방(주로 문의를 전달하는 것, 세자익위사의 별칭, 본디 무신들이 맡은 호위였지만, 학식이 높은 이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문신들이 배치됨)역할에 충실했지만, 때때로 자신의 교육관을 적용, 세손에게 강조한 것은 ”유학적 소양과 정치적 역량 함양“이다. 홍대용은 계방에 속했지만,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인 춘방의 역할도 했던 모양이다.

 

홍대용은 일기에서 세손에게 사람의 감각이란 잠시도 만족을 모르는 것이니 비록 천하의 사치를 다하여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논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새롭고 기이한 것이 생각나는 법이라 점점 기이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이 필연의 이치라. 사치라는 것은 만족을 모르는 것이기에 결국에 가서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의 장래를 책임질 세손에게 임금과 왕실의 검소한 생활은 백성의 편안한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북학파의 흐름을 만든 홍대용, 실학, 실천, 실사구시...허명과 허영을 멀리하고...

 

홍대용이란 인물, 세속의 영달을 탐하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도학자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지구가 둥글다, 하여 중국이 세상이 중심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고, 화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오랑캐 유목민이 청을 세웠다 하여, 학문의 정통, 도리가 조선으로 옮겨왔다는 소중화사상은 참으로 우물안에 개구리로다. 실제 천명을 받은 천자만이 역법을, 달력을 시간을 다룰 수 있었다. 홍대용이 청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서양인들 주로 가톨릭 신부들의 손에 의해 시간이 관리되고 있음을.

 

정성희 선생이 친절하게 해석한 의산문답, 계방일기, 모두 홍대용과 우리의 거리를 좁히는 데 도움을 준다. 박지원과 홍대용, 우리가 따로따로 알고 있는 인물들이 실은 연결돼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집에 설치된 사설천문대 '농수각'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 왜 우리는 의산문답, 계방일기를 읽어야 하는가?, 꽤 유의미한 고민이다. 왜 지금 고전을 읽어야 할까, 새로운 발상으로 접근하는 지구 인문학과 과학의 발전, 실사구시, 참 된 복지란 무엇인가... 홍대용의 큰 사고 틀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힌트들이지 않을까,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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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낙엽 푸른사상 소설선 50
김유경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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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문학에서 통일문학으로 이어지는 푸른 낙엽, 김유경 소설집은 매력적이다. 구수한 글이다. 한국 근대문학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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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낙엽 푸른사상 소설선 50
김유경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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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낙엽

- 갑작스러운 한파에 단풍으로 미처 물들지 못한 채 땅과 마주한 푸른 이파리들-

 

탈북한 북한 조선작가 동맹 소속의 작가, 소설가 김유경,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절반은 아직도 북쪽에 있기에, 통일 세상이 오면 필명 김유경에서 본명으로 바뀔 수 있을까, 어떤 이유로 필명을 쓰는 작가도 있는데 왜 필명을 쓰냐고 물어보지 않듯, 그저 소설가 김유경의 사정을 들으며 <푸른 낙엽>을 읽는다.

 

<푸른 낙엽>에는 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한세대전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 문예사조를 모르기에 그저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꽤 몰입도가 높다. 단숨에 읽었을 만큼,

 

눈에 띄는 두 편의 소설, “평양손님” “자유인”은 북한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듯한 아니, 묘사했을 것으로 여긴다. 읽는 이들은 북한의 현실을 모르기에. 우리 민족의 지구상에 많은 휴전, 분쟁국 중 아마도 이처럼 세계의 이목을 끄는 희한한 조합도 없을 듯하다. OECD 국가요. 세계 경제에 이름을 올리는, 여전히 세계최강의 미국과 한판 뜰 배짱을 보이는 북한, 아무리 경제제재를 가해도,

 

 

 

 

북의 속 사정, 한국전쟁 중에 남한으로 탈출한 아버지와 큰아버지 때문에 반동으로 몰린 러시아 유학을 했던 물리학박사, 학자로서 꿈은 정치범으로, 산골 오지로 어머니와 하방한 허수혁, 소설의 주인공 “나”는 인텔리에 늠름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잘생긴 남자를 짝사랑했고, 아무튼 결혼했다. 수혁은 평양에서 쫓겨올 때, 가재도구보다 좋아하던 책 한 권을…. 언제부터인지 그 책을 찢어서 담배 말이 종이로 쓴다. 그리고 농촌에 묻힌다. 농투성이처럼, 논과 밭과 채소와 이야기를 하는 천상 농군의 모습으로…. 평양에서 찾아온 손님, 대학 동창이란다. 평성과학원 연구사로 복귀하라는 소환 명령을 받지만, 거절한다. 필생의 소원이었을 복귀를 후~하고 뿜어내는 담배 연기 속으로 날려버리고, 여전히 묵묵히.

 

 

 

북한의 해외 공작조의 단장으로. 독일의 한 비행장에서 사라졌다. 평양에서는 죽었다고 보고 영웅으로 추숭했다는 데, 바닷가에서 쓰레기 줍는 환경미화원으로, 경찰서에서 탈북민을 관리하는 형사는 그에게 카리스마를 느끼고. 탈북해 한국에서 잘나가는 연구원은 그가 외국에서 공작할 때 모셨던 단장이라고.

 

자유인, 그저 바닷가와 산골. 그는 왜 탈북을 했을까, 북한의 고위층으로 권력의 중심부에서 호의호식을 했을 텐데, 자유인은 혼잣말처럼, 죗값을 치른다고 말한다.

 

북한을 탈출해서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어쩌고저쩌고, TV에 나와서 희화적으로 북한을 이야기하는. 묘한 경계선에 서 있는 듯한 느낌, 동백림사건에 관련됐다고 의심을 받았던, 재독학자 송두율 선생의 말처럼 작가 김유경은 남도 북도 아닌 경계선에서 서 있는 한반도의 상황이 만들어 낸 탈북문학일까,

 

한 세대 전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은 빼어난 글솜씨에 묻어있는 한국 근대문학 같은 냄새가 난 때문인가,

 

탈북민이란 낱말도 새터민이란 단어도 차별적으로 들린다. 아니 차별이다. 탈북문학이란 장르가 아닌 북한을 무대로 펼쳐진 낯선 삶과 남한의 생활, 평생을 살아온 북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향수가 없을 리 없고, 불만이 없을 리 없고, 남한 사회에서 북한 사회를 비난하는 듯한 분위기와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김유경 소설선은 결이 다르다. 평양 손님의 태도와 허수혁, 자포자기가 아니다. 자신의 삶이 억울하다고 누구를 원망하던 시간도 지나갔다. 인생이란 그런 거라고 농사를 짓던 연구실에서 연구하든,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대차게 받아친 허수혁은 이미 홀로 일어서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민족의 모순, 한반도의 분단, 정전에서 종전으로, 평화에서 통일로…. 남북 문화 충돌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통일문학 장르라 해두자.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깐 선전문학보다는…. 통일문학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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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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