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 -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
장호철 지음 / 북피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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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평면적 역사서술 너머 입체적 역동적 인간의 모습으로 그들을 그리면서


지은이 장호철은 30여 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오마이뉴스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를 운영했다. 일제 강점기 20, 30대의 찬란한 청춘 시기에 자신의 실존을 걸었다가 스러져간 이들의 비극적인 삶과 투쟁이 나의 것일 수도 있다고 깨닫기도 했다고, 해마다 반복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 등 해묵은 갈등은 여전히 우리에게는 아픈 현실로 남아있다. 평면적 역사서술로 연대기로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나열하기도 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체적 역동적 인간의 모습으로 남겨진 그 날의 사진 속에서 그들을 그린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유명한 경구는 누가 했든 중요하지 않다. 역사를 잊지 말라는 뜻이 중요하니, 한국 사회에서 독립운동가는 계륵이다. 돌아가신 지 한참이 됐지만, 여전히 이러 저러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죽어서도 편히 눈감을 수 없을 정도로, 역사를 잊는 대통령과 극우들은 홍범도 장군을 육사 교정에서 몰아냈고, 이승만 기념관과 박정희 동상을 세우겠다고 설쳐댄다. 역사 망각의 태도에 맞선 기억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여기에 실린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촬영연대 순으로 배치한 것이라, 중요도에 따른 것은 아니다. 


책 구성은 2부로 1부는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그 청춘의 초상’에서는 16분의 이야기를, 고종의 통역을 맡았던 신여성, 조선의 앞길에 등불을 켜다의 주인공 스물여덟의 김란사를 비롯하여 스물일곱의 안창호, 서른세 살에 처형당한 사회주의자 김 알렉산드라, 샌프란시스코에서 울린 3발의 총성, 일본의 앞잡이를 처단한 서른두 살의 장인환,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서른 살의 안중근, 을사오적 이완용을 찌른 스물두 살의 이재명,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스물여섯의 김익상, 만세운동의 유관순, 김상옥, 나석주, 김마리아, 박자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그리고 스물네 살의 윤동주, 


2부 ‘돌아온 독립운동가들, 그 청춘의 초상’,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40, 50대 이상의 장년과 50, 60대의 노년이었다. 남북협상을 주도했던 김규식을 비롯한 10분의 이야기를, 서른 살의 김구, 전명운, 차미리사, 김원봉, 주세죽, 엄항섭, 권기옥, 정정화, 장준하 등이다. 여기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 우리는 이들을 찾아 역사의 전당에 모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벌어지는 지도자들의 역사 배반 행위에 항거할 근거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방향도 인식도, 용기도, 눈 앞에 펼쳐진 현실 앞에서 무너져 내려앉을 것이다. 


신여성 김란사의 “꺼진 등불에 불을 밝히다”


1세대 신여성, 1900년에 찍은 한 장의 사진 속 그녀는 평범한 얼굴이지만, 앙다문 입술에 서린 결기가 만만찮아 보인다. 스물여덟에 미국 웨슬리언 대학에 입학, 학사호를 받고 1906년 귀국 후 이화여학당의 교감으로, 대학설립 때는 한국인 교수로 활동, 1893년 하상기와 혼인, 2년 후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세례명 “낸시”를 받았고, 낸시의 음역이 란사 하, 하란사로 알려졌다가 최근에 김란사로 기록하는 추세, 1911년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는 한국선교현장(영문선교잡지)에 국내 여성 교육 불만 사항을 나열, 여성들이 요리와 바느질도 못 한다고 비판한 것을 김란사가 몇 달 후 같은 잡지에 “항의”라는 제목으로 윤치호의 주장을 맹목적인 편견이라고 재비판했다. 아무튼, 하란사든 김란사든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선 이름이다. 제자들에게 “꺼진 등에 불을 켜라”라고 말했다. 유관순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선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일깨워주었다. 


을사오적 이완용을 처단한 스물두 살의 청년 이재명 열사


노동이민으로 미국에 건너가 안창호가 설립한 애국계몽단체 “공립협회”에 들어가 활동했다. 1907년 을사늑약과 한일신협약 체결 후, 공립협회에서 나를 팔아먹은 도적의 숙청 결의에 따라 1907년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온 이재명은 1909년 12월에 이완용 처단, 죽이지는 못했고, 다음 해에 사형형으로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두 달 후의 일이었다. 황현의 매천록과 김구의 백범일지는 그의 의거를 전하고 있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던 임정을 살리다


임정은 집세도 낼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국내외 동포의 지지도 상실하여 존재 가치를 잃어가고 있던 때, 도쿄 한복판에서 펼쳐진 이봉창의 의거,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는 한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을 호전시켰다. 의거에 고무된 미국과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에 사는 동포들은 임정을 후원, 사업확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한편, 장제스와 김구는 육군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에 합의, 마오쩌둥은 임정 존재를 인정하기도, 1940년 광복군 창립대회에 중국공산당을 대표한 저우언라이와 둥비우가 참석할 정도였다고. 윤봉길 의사는 일경의 고문 끝에 1932.12.19.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으로 희미해지거나 잊힌 기억 속의 그들을 오늘로 소환한다. 26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끈 민주주의자의 조국광복을 위한 풍찬노숙의 역사 속 사진이 남아있다. 1906년 광진학교 교원 시절, 서른 살의 김구와 어린 학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도 보인다. 


사진이란 키워드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지만, 이 책은 시의적절하다. 역사를 잊어버리고 일본이 식민지근대화 도왔다는 말을 부끄럽지도 않게 서슴없이 해대는 오늘,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와 징용에 끌려갔던 한인들의 기억이 아직도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일본의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등재에 동의한 한국 정부, 이들에게는 잊혀야 할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에 더 잊히기를 바랄지도.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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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섬을 걷는 문화인류학자 -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발리에서의 여정
정정훈 지음 / 사람in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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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인도네시아 사회와 문화 연구자의 “발리” 현지 조사보고서


문화인류학자 정정훈, 그는 문화라는 마법의 단어를 품고 인도네시아의 사회와 문화를 연구한다. 적도의 태양이 길러낸 신비로운 공동체 마을 뉴꾸닝 사람들과 함께 오달란(마을 의례), 섣달 그믐날의 네빠데이, 장례식과 성인식, 관광업과 그들의 일상 속 깊이 들어가 관찰한 기록이 바로 이 책<신들의 섬을 걷는 문화인류학자>이며, 부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발리에서의 여정이라 붙였다. 


관광인류학과 문화정책 탐구를 위한 발리 여정은 관광 환경에서 지역 주민의 문화적 행위는 어떻게 표현되며, 관광객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주민 집단은 관광발전에 어떻게 대처하며 기존 문화를 어떤 방식으로 적응시키는가?, 문화의 상품화가 기존 문화적 가치와 전통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등의 과제수행을 위한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 같은 화두는 꽤 의미 있다. 관광자원 상품화, 즉 문화의 상품화가 기존 문화의 가치와 전통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는 주제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 구성은 19꼭지다. 지은이는 스쿠터(작은 모터사이클)를 타고 발리의 밀림을 누비면서 여는 첫 번째 이야기 ‘완벽한 마을을 찾아 나서다’를 비롯하여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진짜 발리의 탄생을 거쳐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 네삐데이, 오달란, 열아홉 번째 이야기 ‘보름 동안 이어지는 장례식과 성인식’ 등이 담겨있다. 


문화인류학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풀기 위한 답을 찾아 용맹정진의 길이다. 동남아시아의 인구 대국, 수만 개 섬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 2억 2,400명에 달하는 무슬림은 인구의 87퍼센트 정도다. 이 보고의 무대 발리는 400만의 힌두교 신자가, 인도의 힌두교와는 사뭇 다르다. 조상과 정령 숭배 믿음이 강한 곳, 마을과 일터에 사원 뿌라가 있다. 사원에서 치르는 의식을 통해 사회적 위치와 관계망을 구축한다. 




발리의 주도 덴파사르를 걷는다


힌두교 사원이 2만 개가 있다는 발리주 수도인 덴사파르에는 인구의 3분의 1이 사는 관광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지은이는 인도네시아를 배우면서, 현지 조사 지역 우붓으로. 발리를 여행할 거라면 알아두어야 할 사회문화 분위기가 실려있다. 한국의 60년대일까, 교통경찰관의 돈 뜯기. 외국인을 상대로, 이마저도 흥미롭다. 


지은이의 박사학위 논문 <노란 코코넛 마을: 발리 그리고 우붓 사람들>의 무대로, 2년 동안의 발리섬 경험의 스케치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우리에게 단편적으로 알려진 인도네시아의 발리섬, 그곳의 낙조가 일품이다. 신혼여행지로서 좋다. 보트도 타고는 그저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일상이다. 




이 책에서 중요한 대목은 문화인류학 연구자의 연구 생활이란 무엇인지, 현지어를 배우고 이론을 정립하고 현장 관찰을 통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 또한 문학인류학이란 학문 영역을 도전하려는 이들에게는 귀중한 지침서로서 작용할 듯하다. 발리 주 정부의 관광에 관한 인식이란 점에 눈길이 간다. 


관광이 가져올 폐해를 예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관광의 방향을 문화 관광으로 정한 것이다. 남태평양에 파라다이스 발 리가 아닌 역사와 예술이 살아있는 숨 쉬는 발리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발리인은 히따까라나(번영)의 세 가지 이유로 해석되는 전통철학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 신과의 조화, 사람들 사이의 조화, 자연과 환경의 조화 필요성(신, 인간, 자연 삼위일체의 조화)을 제시, 이를 위해 일상의 삶과 공동체의 협력, 건축의 공간 구성에 이르기까지 생활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관광 산업 지향점은 어디인가를 되묻게 한다. 앞다투어 트렌드를 만들고 이를 쫓는 획일화된 관광상품 개발의 천박함, 경쟁적으로 당해 지역 살리기라는 명분으로 근시안적이 인공물 조성과 상업성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관광의 지향점은 아닐 듯한데, 발리인들의 신, 인간, 자연과의 조화라는 삼위 일체적 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과 관광객 사이에 당연히 있어야 할 존중, 문화를 대하는 태도, 우리 지역을 찾는 이들에게 정성을 담아내는 먹거리 등은 사람들 사이의 조화다.





이 책의 시사는 “대한민국 관광의 목적과 방향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로 이어진다. 한 번 찾는 것으로 발길이 끊기는 관광, 이건 이미 실패다.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 마음의 안정을 찾는 곳, 삶에 지친 이에게 의욕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 관광이란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바람직한 관광이란 무엇이며, 전통과 문화가치와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봐야할 것인지, “돈보다 앞서는 것이 문화적 가치 혹은 문화가치”라는 점에서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할 듯하다. 아울러 사족일지 모르겠지만, 연구결과만 보고 평가해줬으면 좋겠다는 지은이의 언급, 논문을 누가 썼느냐, 논문 앞에 적인 "지방대학"보다는 내용을 살펴줬으면 한다는 바람이 곧 한국의 현실을 엿보게 한다. 아주 씁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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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도시 이해 - 북한 도시를 아십니까? 북한 도시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서…
강채연 지음 / 바른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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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북녘 도시의 이해


지은이 강채연은 국제정치학자로 통일연구원과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을 지냈던 국립 통일교육원 교수다. 성균관대학 정치외교학과 국가전략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의 학문적 관심 영역은 북한 연구 분야다. <북한의 발전 전략과 평화경제>, <북한 선군정치와 ‘관료적 시장경제’>, <김정은 시대 녹색 담론의 정치경제> 외 다수가 있다. 


그는 이 책<북한 도시 이해>에서 “도시란 무엇인가?” 지리, 역사, 정치와 경제환경에 따라 도시의 의미는 달라지기 마련인데, 도시는 단순히 철학과 정치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어떤 기준으로 도시를 규정하는 건 어렵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도시의 속살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공간이기에 그렇다. 지은이는 수년 전에 2년여에 걸쳐 25편의 북한 도시 연구를 주제로 다뤘던 북녘 사람들의 삶의 공간으로서 도시를 조감해본다. 북에는 28개 시(남한 85개시)가 있다. 특별시(평양, 남포, 나선)와 25개의 시, 이중 평안북도 구성, 정주, 평안남도 덕천, 강원도 문천, 양강도의 삼지연 등 다섯 곳을 빼고 23개 시의 도시를 스케치해본다. 


구성은 4개 장이며, 1장 ‘가깝고도 먼 도시’ 에서는 평양, 사리원, 평양의 관문 평성, 서해평화협력지대의 꿈이자 남북 NLL(북방한계선)의 중심에 있는 해주, 남북분단의 완충지 개성 등 다섯 개 시를, 2장 ‘항구도시의 밤과 낮’에서는 북한의 항구도시를, 3장 ‘국경이란 무엇일까?’에서는 국경도시를, 4장 ‘금은보화에 가려진 그림자들’ 이란 주제로 광물 등 천연자원이 있는 도시를, 입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북한의 도시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건물의 변화에도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겨있듯이, 지금 북녘 도시의 색깔은 무엇일까? 상상해 볼 수 있는 것만으로 흥미롭다. 


국경이란 무엇인가? 북중, 남북의 경계선 도시들


철마를 달리고 싶다. 목포-신의주, 남과 북, 상징적인 판문점을 지나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러시아, 또 절반의 백두산 너머에 중국, 국도 1호선 기점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신의주는 북중친선의 냉온 교두보이자 한반도 통일의 교두보, 분단과 통일의 딜레마를 안고 있는 국경도시다. 조선 시대의 의주 땅이 새의주, 신의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해방 후 현재까지 화교가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인데, 해방 전부터 신의주와 단둥 사이의 무역은 동북아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교통 중심이었다. 북중 무역의 70퍼센트가 이루어지는 공식, 비공식 국제무역 도시다. 2000년대에는 김정일의 새로운 특구 구상에 따라 ‘신의주특별행정자치구’를 추진하기도,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으로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인 양빈을 임명하기도, 중국과 홍콩의 관계와 대비되는 곳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탕, 혼합지역이기도 한 신의주는 신흥자본가들이 모여든 곳으로 20만 달러 이상의 아파트 거래될 정도이니, 북한은 못살고 굶주린 한국의 60~70년대 도시 모습으로 생각했다가는 오산이다. 기업과 시장의 유기적인 공생관계가 구축된 이곳, 자발적 소유화와 민영화가 추진된 지역이라니, 가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압록강변의 만포진, 조선시대부터 전략요충지였던 북부내륙의 전략적 요새, 만포진은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 개시 후, 중국 남하군이 도강했던 곳이다. ‘사회주의 본태가 살아있는 곳’ 2017.12.3. 김정은이 만포시의 압록강타이어공장을 시찰하면서 한 말이란다. 지안-만포 사이의 만포 국경철도와 제3 압록강 대교를 통해 북중 교류가. 2011년 김정일이 이 철교를 통해 중국을 비공식 방문하기도, 한국인과 일본인의 이용, 방문은 현재까지는 엄금, 절대 금지 구역이다. 만포경제개발구가 현실화하면 제2 단둥-신의자 내지 나선경제무역지대와 같은 곳이 될 전망이다. 북의 군수공업을 대표하는 전략적 요충지인데.


북중 국경지대, 조선 시대 밀무역 지대였던 곳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형식과 내용은 변했을지라도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곳의 모습, “국경‘이란 무엇인가? 라는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조선왕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슬픈 역사가 깃들여 있는 곳이기도. 다음으로 압록강 연안의 교두보 자강도의 중심 ”강계“ 청동기시대,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내륙 고산지대의 역사유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장이다. 


이 책에 실린 도시 23곳, 그중 국경도시 몇 곳,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섞인 공간이자, 화교들이 모여든 곳이기도, 천연자원을 북에서 북으로 중국을 향해 끊임없이 트럭 행렬을,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남북공동경비구역이 남북공동 경제연합지역에 한반도 출신의 특별행정구 장관을 임명한다면, 개성에서 한때 손발을 맞췄던 남과 북의 경제협력, 개성 역시 국경지대다. 북중처럼 남북무역이 이루어지는 공간, 개성이 열리는 순간은 정전에서 종전으로 대치와 경쟁에서 협력과 평화로 뒤바뀌는 질적 변화가 오지 않을까, “금강산”관광이, 경제협력으로, 북중관계가 냉온탕을 왔다 갔다 하듯이, 남북 또한 그러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분단국가 70년은 한반도 평화 정착 부침의 과정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여전히 어색한 남북한 국경이란 말


국경이란 말이 여전히 어색하다. 3.8도 선이니, 휴전선, 비무장지대가 오히려 익숙하다. 유엔의 동시 가입으로 국제법상으로는 남북은 독립국이지만, 정서적으로는 하나의 국가, 분단된 상태, 통일이 소원인 남북,  법적으로도 북한은 미수복지역인 대한민국의 영토다. 여전히 남과 북은 정전상황이라 체제 유지에 서로를 적절하게 무기로 삼고 있다. 때때로 TV뉴스에서 들리는 국가보안법 위반, 북과 당국의 허락없이 통신, 만남,소통했다는 이유, 북을 찬양했다는 죄명으로, 분단이 낳은 슬픈 상황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북녘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이들도 눈치작전도 하고 시장주의 경제가 부분적으로 통용되기도, 사람 사는 곳은 경제체제와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곳이라는 ”북한“ 그것에도 사람이 살고 있음을, 범죄도, 사회 이슈도 유행도, 휴대전화도, 호텔도, 유원지도, 술도 노래도 있는 사람 사는 곳이라고. 국경도시 개성은 남북 문화교류, 경제교류의 장으로 하면 남북 사이의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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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 스터츠의 내면강화 - 흔들리면서도 나아갈 당신을 위한 30가지 마음 훈련
    필 스터츠 지음, 박다솜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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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자유로운 삶, 고통 마주하기 연습


    이 책<필 스터츠의 내면 강화>은 지은이 필스터츠의 40년 동안의 정신건강의로서 경험을 담았다. 그가 임상 의료 현장에서 마주했던 현실, 정신과 진료 규정이라는 매뉴얼은 결코 심리치료에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내담자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의 환상 속에, 현재가 없는 전통적인 치료법의 구조 자체가 내담자의 변화를 막는다고 느꼈다. 이를 극복하는 대안이 내담자 앞에 현재에 깃든 무한의 지혜의 문을 열어주는 “툴스” 였다. 이 치료의 특징은 세 가지, 첫째는 과제, 진료실 안에서 체험하는 짧은 경험만으로는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없다. 인생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이기에 “과제”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 앞으로 나아가기, 셋째, 고차원의 힘을 끌어올리기다. 어떤 한계를 경험하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힘이다. 


    책 구성은 6장이며, 1장 ‘고통은 어떻게 문을 여는가’ 에서는 철학으로 삶을 준비했더라면, 그게 바로 당신에게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행동할 때 알게 된다. 나는 착한 사람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내 안에 이미 있다는 것이다. 2장 ‘돌아갈 수 없는 길’은 과거에 갇힌 전통적 심리치료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쥐고 있는 강력한 도구 한 가지, 고통이 나에게 알려준 것, 3장 ‘진정 자유로운 삶’ 물고기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칠 때 자유롭다. 4장 ‘내 삶에 더 큰 힘을 들이는 법’에서는 떠밀려 살지 않는 삶을 위한 것들, 5장 ‘어둠만이 알려주는 것들’ 만약 당신의 삶이 내 것이었다면, 모든 것이 부서지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6장 ‘아픔을 넘어서는 관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의존과 친밀의 차이, 감당이 아닌 사랑하기 위하여 등을 다루고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고 평가하든 신경 쓰지 말고, 누군가를 가혹하게 평가하려 들지말라 


    함께하는 사람과 이웃 등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평가하든 신경 쓰지 마라, 아울러 누군가를 평가하려 들지 말라. 우리의 에고는 자부심에 중독돼있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이를 신념이라고 하면 신념이고 고집이라면 고집이겠지만, 평가하려는 순간을 방해하라, 지금 다른 누군가를 가혹하게 평가하는 순간, 우리의 정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이런 끈을 놓아라. 정신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껴보라.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은 행동할 때 알게 된다


    현재다. 익숙하지 않은 행동에 나서는 일은 대부분 사람에게 원초적 두려움을 일으킨다. 두려움을 넘어서려면 행동을 새롭게 보는 태도가 필요한데 지은이는 효과적인 행동을 만드는 세 가지 원칙으로 속도와 밀도, 자기 전 성찰을, 속도는 말 그대로 속도다. 행해지면 바로 실행, 주어진 시간보다 많은 행동, 자기 전 10분 만 그날의 행동과 다음 날 하고 싶은 행동을 적어보라.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동기를 찾지 못해 무기력해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고정된 생각으로 동기를 보지말라, 지금 걷고 있는 길에 아무 확신이 들지 않더라도 당장 행동하는 것이 동기를 만드는 것이다. 즉, 동기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우리를 가두는 것은 스트레스 없는 삶을 꿈꾸는 게 망상이란 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


    스트레스 피하려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을 의식하고 두려워하기에 엘리베이터나 비행기에서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른바, 없는 것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에 집착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망상이 흔히 누릴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유대감이나 열정 등을 가로막게 하는 것이다. 인생은 목적을 향해 가는 고차원적 힘이다. 살다 보면 돈을 벌려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다고 느끼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상실 받아들이기 


    자유를 원하지만, 지금 자유로운 삶인지조차 모를 때가 많다. 하지만 상실감은 정확하게 느낀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말이다. 피하는 게 좋은지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는 게 좋은지는 별론으로 하고, 우선 상실을 수용해야 한다. 상실을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상실에서 고차원적 힘을 가능성 인식하기, 즉,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는 생각 말이다. 상실이 일어나는 순간에 상실 경험을 처리할 능력 키우기다. 이 역시 앞으로 밀고 나아가기다. 내려놓아라. 돈과 지위 그 모든 것은 애초부터 내 소유가 아니라 잠시 나에게로 와서 머물다 가게 마련인 것이라고, 상실로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어지니, 이런 맥락에서는 갈등 또한 마찬가지다. 


    무엇무엇이 없는 상태, 또 무엇무엇이 완전히 나에게 머문 상태란 그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걸 바라는 요행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집착하고, 잡으려 하고, 아쉬워하는 마음 때문에 스트레스, 갈등, 상실 등으로 나를 지키지 못하고 누군가를 위해 사는 “떠밀려 사는 삶”이 되기 쉽다. 왜 이런 것이 어려울까?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기에 현자가 됐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은 스트레스와 갈등, 그리고 상실을 느꼈다. 


    자유스러운 삶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지향하는 삶의 상태, 바람직한 삶의 모습일 수 있다. 멀리서 보면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 과정에 이르는 길이 순탄치 않기에 “자유”를 더 갈망하고 갈증을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마주해 이를 넘어서는 순간 자유스러움의 의미를 알게 될 터인데, 고통은 피해가려고 간다. 아무튼, 금수저든 흙수저든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고통이 따른다. 자유스러운 삶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달리 특별한 게 없다. “특별”함은 망상일 뿐이다. 이 망상에서 깨어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강화하는 길뿐이다. 과정의 고통은 이겨내야 할 분명한 장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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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 시대를 앞서간 천재 버트런드 러셀의 비판적 세상 읽기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석봉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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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70년을 넘어 지금 다시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를 읽어야 할 때


        버트런드 러셀의 인기 있는 에세이집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자신의 “인기 없는”이라 표현했지만), 앞에는 현란한 추천사가, 뒤에는 자신이 65세 때 쓴 “내가 쓰는 나의 부고”(1937)로 끝을 맺은 15년 동안의 써 온 철학에세이를 묶어 1950년에 출간했으니, 무려 32년을 더 살다 간 것이다. 1차 대전 발발 후에는 반전 평화 운동을, 2차 대전 후에는 핵무장 반대와 쿠바위기,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이른바 생각하고 실천했던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지금 왜 러셀의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인가, 


        시대를 앞서간 버트런드 러셀의 비판적 세상 읽기라서 그런 것인가 싶다. 오광일이 쇼펜하우어의 저작<소품과 부록>에 실린 글쓰기 철학이다<쇼펜하우어의 글쓰기 철학>(유아이북스, 2025)에서 ‘자신의 시대를 초월한 글을 써라’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게 바로 이 책이며, 70년의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가 그 내용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열두 꼭지의 글, 1장. 세상을 보는 냉철한 철학적 시선, 2장 불확실성을 견디고 판단을 유보하는 힘, 3장 인류의 미래를 위한 철학적 제언, 4장, 잘못된 사고를 꿰뚫어 보는 힘, 5장. 억압과 착취에 맞선 약자들의 숨겨진 힘, 6장.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7장. 어리석음에 대한 통렬한 고발: 인간은 왜 끊임없이 오류를 저지르는가, 8장. 교육, 사고의 틀을 깨는 힘, 9장. 진보의 역사: 인류를 발전시킨 위대한 생각들, 11장. 내가 만난 두 얼굴의 유명인들, 12장. 나의 삶, 나의 신념: 내가 쓰는 나의 부고가 실려있다. 


        맹목적인 믿음은 광기의 시작


        교조주의를 경계하라, 러셀은 “맹목적인 믿음은 광기의 시작이다. 비판적 사고만이 우리를 진실로 이끈다.” 그가 남긴 말 중 “문제의 근본 원인은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 어리석은 사람은 확신에 차 있다는 것입니다.” Russell and Harry Ruja. Mortals and Others, VII: American Essays 1935, 1933년에 쓴 글이라 한다. 교조주의는 지적인 사고가 아닌 권위를 견해의 원천으로 삼는다. 글이나 말도 설득력 있는 자기주장의 논리를 펼 수 없으니, 유명 철학자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의견인 양 말하는 것 또한 교조주의다. 


        또 보자,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나는 평생 동안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왔습니다.”(1950), 역설적 표현이다. 제발 이성적으로 행동하라고, 군중심리를 타고,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무리 즉, 극단주의로 치닫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예비군 현상처럼,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나름의 위치에서 체면도 차리고 예의도 잊지 않고 행동하던)이 예비군복으로 갈아입고 집단에 섞이는 순간 바뀐다. 이성과 지성의 작동이 순간 멈춰버리고 대신에 무질서가, 규모가 크면 클수록 책임질 일이 없기에, 이게 군중심리다. 이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극단(극우든 극좌든)으로 치닫게 돼 있다. 러셀의 경고는 ‘교조와 극단’ 모두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내 상태가 맹목적 믿음에 빠진 혹은 경도된 상태인가를 어떻게 의식, 혹은 인식할 수 있는가다. 러셀은 자신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늘 인정, 즉 경계하라는 말인데, 이는 자기성찰과도 같은 맥락이다. 절대적인 주장을 늘 피하라는 말이다.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통하는 자기네 방식으로 세상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별종으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니 답답할 뿐이라는 생각(터널 현상과도 같이 주변이 보이지 않는 데서 생긴 말), 하지만 그 부류와 속한 사람들은 제각각의 목적으로 가지고 섞인 것이라면, 어떨 것인가, 러셀이 한 말을 보자 “어떤 의견이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그것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곧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 말도 옳고, 너의 말도 옳고, 부인 말도 옳소라고 했다던 황희정승의 사고의 유연함이자 상호 관용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러셀은 “좌파건 우파건 그 어느 쪽에서도 교조주의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개인의 자유, 학문의 자유, 상호 관용의 가치는 굳게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정치적으로 분열되었지만, 기술적으로는 통합된 이 지구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28쪽)


        억압과 착취에 맞선 약자들의 숨겨진 힘


        억압받는 자들에게 우월한 덕성을 부여하는 시기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다. 이는 억압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만 시작되며, 그들이 가진 권력이 더는 안전하지 않을 때만 일어난다. 피해자를 이상화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유용하다.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선주민을 고귀한 야만인으로, 잔혹한 산업주의로 농민을 끌어다 공장노동자로 만들어놓고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기라고, 또 여성에게는, 여성들을 더러운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은 남성들의 훌륭한 자기희생이란 개소리를 하는 것처럼. 덕성은 가장 큰 선이고, 복종이 덕을 만든다면 권력을 거부하는 것은 친절한 행위라고 했다. 억압받는 계급이 우월한 덕성이 권력을 갖는 것이라 주장할 것이고, 억압자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거꾸로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권력이 평등해지면 이런 우월한 덕성 이야기는 모두 헛소리였고 평등을 요구하는 근거로서 불필요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 우월한 덕성, 인류의 오래된 망상 중 하나는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거나 열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성별, 계급, 국가, 시대에 대해서도 그렇다. 로마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사유를 할 줄도 모르고 무엇이 사유인 줄도 모르는 사회,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그저 귀찮을 뿐이다. 정해진 경로와 얻어진 지위와 그에 따르는 권력의 영속성만을 생각한다.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 엄연한 질서이자 당대의 삶을 편안히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인간이란 본디 이런 모순을 살아있는 교육으로 깨어나게 하는 것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잠들어 버리면, 어떻게 깨울 것인가? 그래서 때때로 물음표를 달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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