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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 시대를 앞서간 천재 버트런드 러셀의 비판적 세상 읽기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석봉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70년을 넘어 지금 다시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를 읽어야 할 때
버트런드 러셀의 인기 있는 에세이집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자신의 “인기 없는”이라 표현했지만), 앞에는 현란한 추천사가, 뒤에는 자신이 65세 때 쓴 “내가 쓰는 나의 부고”(1937)로 끝을 맺은 15년 동안의 써 온 철학에세이를 묶어 1950년에 출간했으니, 무려 32년을 더 살다 간 것이다. 1차 대전 발발 후에는 반전 평화 운동을, 2차 대전 후에는 핵무장 반대와 쿠바위기,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이른바 생각하고 실천했던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지금 왜 러셀의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인가,
시대를 앞서간 버트런드 러셀의 비판적 세상 읽기라서 그런 것인가 싶다. 오광일이 쇼펜하우어의 저작<소품과 부록>에 실린 글쓰기 철학이다<쇼펜하우어의 글쓰기 철학>(유아이북스, 2025)에서 ‘자신의 시대를 초월한 글을 써라’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게 바로 이 책이며, 70년의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가 그 내용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열두 꼭지의 글, 1장. 세상을 보는 냉철한 철학적 시선, 2장 불확실성을 견디고 판단을 유보하는 힘, 3장 인류의 미래를 위한 철학적 제언, 4장, 잘못된 사고를 꿰뚫어 보는 힘, 5장. 억압과 착취에 맞선 약자들의 숨겨진 힘, 6장.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7장. 어리석음에 대한 통렬한 고발: 인간은 왜 끊임없이 오류를 저지르는가, 8장. 교육, 사고의 틀을 깨는 힘, 9장. 진보의 역사: 인류를 발전시킨 위대한 생각들, 11장. 내가 만난 두 얼굴의 유명인들, 12장. 나의 삶, 나의 신념: 내가 쓰는 나의 부고가 실려있다.
맹목적인 믿음은 광기의 시작
교조주의를 경계하라, 러셀은 “맹목적인 믿음은 광기의 시작이다. 비판적 사고만이 우리를 진실로 이끈다.” 그가 남긴 말 중 “문제의 근본 원인은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 어리석은 사람은 확신에 차 있다는 것입니다.” Russell and Harry Ruja. Mortals and Others, VII: American Essays 1935, 1933년에 쓴 글이라 한다. 교조주의는 지적인 사고가 아닌 권위를 견해의 원천으로 삼는다. 글이나 말도 설득력 있는 자기주장의 논리를 펼 수 없으니, 유명 철학자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의견인 양 말하는 것 또한 교조주의다.
또 보자,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나는 평생 동안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왔습니다.”(1950), 역설적 표현이다. 제발 이성적으로 행동하라고, 군중심리를 타고,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무리 즉, 극단주의로 치닫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예비군 현상처럼,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나름의 위치에서 체면도 차리고 예의도 잊지 않고 행동하던)이 예비군복으로 갈아입고 집단에 섞이는 순간 바뀐다. 이성과 지성의 작동이 순간 멈춰버리고 대신에 무질서가, 규모가 크면 클수록 책임질 일이 없기에, 이게 군중심리다. 이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극단(극우든 극좌든)으로 치닫게 돼 있다. 러셀의 경고는 ‘교조와 극단’ 모두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내 상태가 맹목적 믿음에 빠진 혹은 경도된 상태인가를 어떻게 의식, 혹은 인식할 수 있는가다. 러셀은 자신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늘 인정, 즉 경계하라는 말인데, 이는 자기성찰과도 같은 맥락이다. 절대적인 주장을 늘 피하라는 말이다.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통하는 자기네 방식으로 세상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별종으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니 답답할 뿐이라는 생각(터널 현상과도 같이 주변이 보이지 않는 데서 생긴 말), 하지만 그 부류와 속한 사람들은 제각각의 목적으로 가지고 섞인 것이라면, 어떨 것인가, 러셀이 한 말을 보자 “어떤 의견이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그것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곧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 말도 옳고, 너의 말도 옳고, 부인 말도 옳소라고 했다던 황희정승의 사고의 유연함이자 상호 관용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러셀은 “좌파건 우파건 그 어느 쪽에서도 교조주의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개인의 자유, 학문의 자유, 상호 관용의 가치는 굳게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정치적으로 분열되었지만, 기술적으로는 통합된 이 지구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28쪽)
억압과 착취에 맞선 약자들의 숨겨진 힘
억압받는 자들에게 우월한 덕성을 부여하는 시기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다. 이는 억압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만 시작되며, 그들이 가진 권력이 더는 안전하지 않을 때만 일어난다. 피해자를 이상화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유용하다.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선주민을 고귀한 야만인으로, 잔혹한 산업주의로 농민을 끌어다 공장노동자로 만들어놓고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기라고, 또 여성에게는, 여성들을 더러운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은 남성들의 훌륭한 자기희생이란 개소리를 하는 것처럼. 덕성은 가장 큰 선이고, 복종이 덕을 만든다면 권력을 거부하는 것은 친절한 행위라고 했다. 억압받는 계급이 우월한 덕성이 권력을 갖는 것이라 주장할 것이고, 억압자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거꾸로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권력이 평등해지면 이런 우월한 덕성 이야기는 모두 헛소리였고 평등을 요구하는 근거로서 불필요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 우월한 덕성, 인류의 오래된 망상 중 하나는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거나 열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성별, 계급, 국가, 시대에 대해서도 그렇다. 로마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사유를 할 줄도 모르고 무엇이 사유인 줄도 모르는 사회,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그저 귀찮을 뿐이다. 정해진 경로와 얻어진 지위와 그에 따르는 권력의 영속성만을 생각한다.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 엄연한 질서이자 당대의 삶을 편안히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인간이란 본디 이런 모순을 살아있는 교육으로 깨어나게 하는 것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잠들어 버리면, 어떻게 깨울 것인가? 그래서 때때로 물음표를 달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