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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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성실'에 대한 알량한 사명감이 있다. 과도한 일중독 증세와 더불어, 오락적 유희마저 성실하게 끝장을 봐야 한다는 이상스런  집착이 그것의 방증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열광하면서, 게으름마저 성실하게 게으르고자 하는 건, 좀처럼 미치지 못하는 심심한 삶의 긴장을 조율하는 일종의 원칙같은 거다. 

 어렴풋하게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라던가 아주 오래전 손에 잡혔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의 (제목조차 까마득한)에세이를 기억하고 있다. 일찍이 단거리보다 장거리 달리기에 호기심과 애정을 품었던 나에게 두 책 공히 '완주'의 미덕을 설파했고, 마라톤은 성실함의 끝을 확인하는 징표와도 같았다. 인간의 근성과 끈기의 결정체로서의 '마라톤'이라는 행위에 열광했던 시절을 건너오면서도, 실제 '러너'가 되지 못했던 것은 나의 게으름의 소산이기도 했지만, 보다 합목적인 이유를 필요로 하는 삶의 태도의 변화때문이기도 했다. 달리기가 등산보다, 자전거보다 비용대비 효율성의 측면에서 유리한 기회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여전히 계산은 진행중이지만, 2009년이 '등산'이었다면 2010년은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책 때문이다.  

 내 독서취향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동안 내가 그의 책을 한권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에 적이 놀라곤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던 하루키와의 인연이 1Q84에서 시작되어 이 책에 이르기까지, 나도 슬슬 하(루키)빠가 되어가고 있는 스스로를 확인한다. 

 혹자는 현대도시인의 인간군상, 그 내면의 탁월한 심리묘사가 매력적이라고 했고, 혹자는 사회에 대한 적확한 문제제기에 언제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체념해버리는 패배주의적 냉소가 유감이라고 했다. 이제 꼴랑 두권의 책을 읽는 나는 감히 그에 대한 어떠한 단정도 할 수 없다. 다만, 한편의 소설과, '달리기'를 빌려서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회고록을 통해 그의 문학세계에 마음을 내준 바, "소설을 착실하게 쓰기 위해서 신체 능력을 가다듬어 향상시킨다"는 그의 다짐이 우리를 오랫동안 동시대에 머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물줄기는 강변을 적시고, 푸른 여름 초목을 무성하게 하고, 물새들을 키우며, 오래된 돌다리 밑으로 바져나가, 여름 하늘의 구름 모습을 물 위에 띄우고(겨울에는 얼음을 띄우고), 딱히 서둘러 급한 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쉬어가는 여유도 보이지 않고, 여러 검증 과정을 거쳐오며 굳어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관념이라도 지닌 듯 그저 묵묵히 바다로 향해 간다. - p.30  
   

 물처럼 살겠다고 공공연하게 되뇌이기 시작한지 어언 10년. 그 가치를 충분히 멋드러지게 그려지도, 그 뜻에 충분히 부응하지도 못한채로 흘러오기만 했다. 내가 흘러온 어느 한곳 초록색 생명이 자라나주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면서 다시 또 묵묵히 흘러간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직업적인 영역에 있어서나 타인과 우열을 겨루고, 승패를 다투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세계는 성립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와 같은 차이는 일상적으로 조그마한 엇갈림을 낳고, 몇 가지인가의 엇갈림이 모이고 쌓여 커다란 오해로 발전해갈 수도 있다. 그 결과 까닭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하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건 괴로운 체험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p.39-40
 
   

 만난지 4개월 된 혹자가 '너는 색깔이 너무 뚜렷하다'며, 의연하고 강단있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염두해서 노력한 결과이지만, 실상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색깔이 있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부침에 언제나 늘 한결같이 위해서 내면을 부지런히 단련할 뿐, 한가지 생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말랑말랑한 두뇌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삶의 방식을 정립하는데 게으르지 않았을 뿐.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p.115-116)

 
   

 직장에서 가장 많이 들은 조언이 '일에 끌려가지 말고, 일을 끌고 가라'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고 전전긍긍하면서 일에 휘둘리지 말고, 주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일을 처리하라는 뜻. 무언가를 꾸준히 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서 충분히 귀감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여기저기서 계속되고 있다. 얄팍한 꼼수로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날 즈음,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를 계속 달리게 한다. 

   
 

 무라카미씨처럼 매일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러다가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요? -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건전한 행위이고, 작가라는 사람은 공서양속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되도록 건전하지 않은 생활을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속세와 결별하고 예술적 가치를 지닌 순수한 뭔가에 더욱 근접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통념 같은 것이 세간에 뿌리 깊게 존재한다. 긴 세월에 걸쳐 그와 같은 예술가=불건적(퇴폐적)이라는 도식이 형성되어 온 것 같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자주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의-좋게 말하면 신화적인-작가가 등장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가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묘한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복어는 독이 있는 부위가 가장 맛있다고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건전한' 작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니만큼 작가(예술가) 중에는 실생활 그 자체의 레벨부터 퇴폐적으로 전락하고, 또는 반사회적인 의상을 걸치는 사람들지 적지 않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그와 같은 자세를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어느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오랜 시간에 걸쳐 유지해 나가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어딘가에서 그 에너지를 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기초 체력 위에 그 에너지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할까?  

-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p.149-150) 

 
   

  농담처럼 말한다. 담배도 술도 없는 반듯한 삶은 뭔가 진보적이지 않아. 그래서 서두의 돌발질문에 대한 하루키의 대답이 퍽 인상적이었다. 과시적으로 담배를 피우고, 전투적으로 술을 마시는 상처덩어리를 한사람이 떠올랐다. '불건전함'에 대한 애찬이 넘치는 와중에, '건전함'에 대한 적극적 옹호가 신선했다고나 할까 

   
   우리는 초가을 일요일의 소박한 레이스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다음 레이스에 대비해 각자의 장소에서 (아마) 이제까지와 같이 묵묵히 연습을 계속해간다.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혹은 훨씬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도는 매우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p.256-257)  
   

 그런 전차로 2010년은 부지런히 달리기로 했다. 42.195는 힘들겠지? 하프라도,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무시무시한 다짐 하나 덩달아 마음에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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