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대가 -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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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성의 '나쁜 사마리아인' 서문에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언급된다. 장하성씨가 멘토를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제에 대한 관점이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비록 미국경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미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신문지상에 대기업들이 오르내릴 때마다 새로운 신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 대한민국 속에 또다른 나라같은 '강남'을 생각하면 책 속의 미국과 현재의 우리나라가 거의 같은 상황임을 알수 있다.


미국의 불평등은 대부분 시장 왜곡의 결과물이다. 즉 미국의 시장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행위 대신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부를 빼앗는 행위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다. 즉 상위 1%가 하위 99%의 부를 착취하고 있고 상위계층에게 돌아가는 부는 하위계층을 희생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불평등을 옹호하는 일부에서는 상위계층에 돈이 몰리면 시장이 가속화되어 모두가 그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낙수효과)하지만 현실은 돈은 상위 1%로 몰리고 사람들은 하위 99%로 몰리는 불평등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초래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역학 관계를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은 듯하다. 정보화 사회라고 하지만 대량으로 쏟아지는 정보는 왜곡되기가 쉽다. 상위계층은 여론조작을 통해서 하위 99%가 자신들도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또한 경제적 불평등과 상위계층의 공교육 축소는 균등한 교육기회의 제한을 야기하고 결국 하위 99%의 우민화와 상위계층으로의 진입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의 중요하다. 때문에 모두가 행복한 것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추구가 1차적 목적인 부유층은 강한 정부에 불안감을 느낀다. 강한 정부는 권력을 이용해서 부유층으로부터 부의 일부를 빼앗아다가 공익을 도모하거나 하위 계층에게 도움이 되는 공공 투자에 투입하여 사회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대규모 경제성장의 뒤에는 항상 정부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 하지만 부유층은 민간 시장의 실패 사례와 정부의 성공 사례를 무시하는 노력으로 확고히 작은 정부, 정부 서비스의 민관 이관, 민영화, 그리고 규제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사회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는 개인과 가구들을 당면한 위험들로부터, 특히 보험을 통해 대비할 수 없는 위험들로부터 보호해야 마땅하다.
기업들을 사업상 실수에서 벌어진 결과로부터 보호하거나, 기업들의 금고를 채워 주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정부의 임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위험에 빠진 개인과 가구들을 왜면한체 각종 보조금 등으로 대기업들의 배를 채워주고 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고 고민해 본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이런 불평등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정책을 바꾸면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반면에 이런 정책들을 만들어 내는 정치 과정을 바꾸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절망에 빠진다.

2016년이면 4월이면 총선이 있다. 하지만 막상 선거권을 행사하려고 해도 누구에게 표를 던져야 할지 막막하고 결국 선거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정치에 대한 환멸감의 결과이다.


각종 비리로 얼룩진 정치에 대한 환멸감은 하위계층의 정치 참여 위축을 가져오고 이는 실제 상위계층에 유리한 선거권 박탈 효과를 가져 온다.
즉 상위계층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하위계층의 선거권 축소에 항상 열심이다. 이는 선거권이 축소될수록 자신들의 이권이 선거에 반영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거참여자는 상위계층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상위계층에 유리하게 정치적 게임의 규칙 형성이 되는 것이다.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에 맞는 후보자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고민하고 우리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금방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노력들을 통해서 먼 미래라 할지라도 우리의 자손들이 더이상 이런 것들을 고민하지 않는 사회가 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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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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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삶과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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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책 -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들이 꼽은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들
존 코널리 외 엮음, 김용언 옮김 / 책세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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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문학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해를 제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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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킬리만자로의 눈 (한글판+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285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구자언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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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두 심장을 지닌 큰 강', '살인 청부업자들', '어느 다른 나라에서', '깨끗하고 환한 곳' 5편을 묶어 놓은 책이다.

얼마전에 읽은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들이 들뜬 광란의 분위기였다면 헤밍웨이의 단편소설들은 너무 조용하고 차분하다.

'두 심장을 지닌 큰 강'은 불탄 숲을 지난 강에서 야영을 하고 숭어낚시를 마치는 것으로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주인공의 행위와 생각들을 잔잔하고 간결한 글로 묘사하고 있다. 솔직히 소설을 읽을면서 계속 긴장을 유지하였다. 숲에서 갑자기 늑대떼가 나타나 야영지를 공격한다던지, 강에서 악어나 나타나 주인공을 곤경에 빠트린다던지.... 주인공의 낚시바늘을 굉장히 큰 숭어가 물었을 때 바로 이것이다. 분명히 이제부터 괴물숭어와 주인공의 사투가 벌어지는 거야... 올 것(?)이 왔구나하고 극적인 긴장감과 반전을 기대했다. 하지만 낚시바늘이 떨어져 나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다른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피츠제럴드와 소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허탈감'이 찾아왔다. 과연 저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피츠제럴드나 헤밍웨이나 1차, 2차대전의 중심을 살다간 인물들이다. 그들은 1차대전의 승리에 도취된 사람들의 흥분과 반면 흥분속에 묻혀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었을것이다.

피츠제럴드가 광기어린 흥분의 중심에 섰다면, 헤밍웨이는 조용히 비켜나 관조적인 자세를 취한 것같다.

'두 심장을 지닌 큰 강'에서는 불탄 숲, 재로 인해 새까만 그 숲에서 사는 메뚜기떼가 등장하고 주인공은 그 메뚜기를 잡아서 어둡고 깊은 물 속에 있는 숭어를 낚는다.

1차대전이후 전쟁의 잔해는 고스란히 남았고 그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감에 도취된 흥분되어 있다.
전쟁의 어두운 새벽이슬에 젓어 있을 때는 숨죽이고 있던 그들도 어둠이 끝나고 햇볕이 비치면 흥분의 광란 속에서 메뚜기처럼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 광란 속에서 홀로 벗어나 강으로 왔다. 하지만 그냥 온 것은 아니다. 광란의 기억들, 메뚜기를 잡아서 왔다.
그리고 메뚜기들을 미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강 속에서 숨어있는  숭어를 잡는다.
비록 광란 속에 빠져있지만 꿈을 가진 그들을 통해서 미지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잡는 것이다.

많은 것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다만 먹을만큼만 잡는다. 헤밍웨이의 말처럼 '앞으로도 늪에서 낚시할 수 있는 날은 많을 것이다.' 전쟁끝난 지금 우리에게 미래의 꿈을 낚을 날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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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광란의 일요일 (한글판+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134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허윤정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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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 '광란의 일요일', '오월제', '오 적갈색 머리 마녀!' 3편이 묶어진 책이다.
짧은 분량의 글에 모든 것을 축약해서 담아야 해서인지 단편소설들은 긴 시와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읽고 난 다음에도 왠지 찝찝함이 느껴진다. 아니 찝찝함이라기보다는 머리 속에 아직도 실타래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미완의 불쾌함'이라고나 할까...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로 유명한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삶과 1차 세계대전 후 1900년대 초 시대적 분위기를 소설로 표현하였다.
그래서인지 각 단편소설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축제와 같은 들뜬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런 흥분된 들뜬 분위기는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결국 각종 사건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오월제'에서는 전쟁 후 여전히 집단생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못하고 떼지어 방황하는 군인들, 망나니같이 철없는 대학생들,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지식인들 등 각각의 시대를 대변하는 다향한 캐릭터들이 오월제라는 하루밤의 축제 속에서 마치 퍼즐처럼 잘 이를 맞추며 이야기를 구성해 간다. 그리고 이런 흥분 속에 동참하지 못하고 도리어 극도의 좌절 속에 있던 한 대학생의 자살로 이야기를 끝마친다.
그 시대에는 중도란 없었을까? 극도의 흥분이 아니면 극도의 좌절이 그 시대의 모습이었을까?


'오 적갈색 머리 마녀!'에서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 속에서 살았던 나...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환상일 뿐이었다. 인간이란 결국 자기자신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결국 세상 속에서 이용당하거나 세상 속에서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주인공 멀린은 캐럴라인(멀린이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실제 그녀의 이름은 알리시아 데어였음)이라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생을 마감할 때쯤 그녀의 실체를 알게 되고 그 환상이 깨어지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는 너무나도 악명이 높아 멀린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직 멀린만 40여년의 세월을 그녀에 대한 환상 속에서 외부와 단절된 자신만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 이야기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이 깨어지면 낙담하고 방황하고 극단적으로는 생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있다.
멀린은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었던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고 비뚤어진 여성에 대한 자신의 낭만적인 동경'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이미 젊음이 지나간 후'임을 후회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냉철한 통찰을 가지고 철저히 이성적인 삶을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환상 속에서 뜨거운 열정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비록 그것이 자신만의 환상일지라도 그것조차도 없는 로보트같은 사람들보다는 훨씬더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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