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 (그래픽 노블) 비룡소 그래픽노블
로이스 로리 지음, P. 크레이그 러셀 그림,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로이스 로리의 SF <기억 전달자>를 P. 크레이그 러셀이 그래픽 노블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효율을 극대화하고 갈등을 피하고자 모든 것이 통제되는 어떤 공동체에서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전달하는 '기억 전달자'와 그 기억을 받는 '기억 보유자' 12살 조나스에 관한 이야기다. 책을 읽고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두서없이 정리했다.

1. 공리주의
공동체 구성원들은 선택의 자유가 없다. 위원회의 결정에 순종하며 정해진 삶을 산다. 심지어 감정조차 통제 당하지만 모두 행복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유일하게 불행한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과거의 나쁜 기억과 감정으로 고통받는 기억 전달자다. 소위 개인의 불행으로 다수의 행복이 보장되는 시스템인 것이다. 비슷한 구도의 소설로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공간에 감금된 한 아이의 불행은 모든 사람이 누리는 행복의 절대 조건이다. 공리주의를 비판할 때 숱하게 인용되는 소설이긴 한데 어쨌든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의 행복을 빚어낸다면 그 희생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2. 언어
소설 속 사회에서는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과장이나 비유, 상징 등을 통한 의사소통은 금지되며 사랑, 죽음과 같은 추상적인 표현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주인공 조이스는 부모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어머니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일반화된 단어라 무의미할 뿐이니 정확한 언어를 쓰라며 다그친다. 예를 들어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즐거우세요?"라고 말이다. 기존의 불완전한 언어 사용이 불가피하게 불러오는 오해나 오류 따위가 없는 이런 세상이야말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바라던 세계다. 그들은 성긴 언어의 그물로는 세계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으니 형이상학적, 즉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과연 정제된 언어만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사회는 유토피아에 좀 더 가까울까?

3. 자유
소설 속 사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흔히 자유는 인간 존재의 필수 요소이며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불행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사르트르는 일찍이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주장하며 본질에 선행하는 인간의 실존은 매 순간 선택의 자유를 통해서만 유지되기 때문에 자유를 실존을 위한 일종의 '굴레'라고 해석했다. 반면에 영국의 철학자 존 그레이는 <꼭두각시의 영혼>을 통해 자유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아닌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도대체 자유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4. 기억
닿을 수 없는 타인과 공존하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기억의 공유'란 매우 특별한 현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은밀한 내면적 경험을 넘어 가족과 이웃 심지어 인류에 이르기까지 서로 가닿을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봄날의 따스한 햇살처럼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동시에 전쟁과 죽음 같은 공포와 절망을 심어 주기도 한다. 엔트로피의 열적 평형을 빗대 공기의 평형 상태를 모티브로 한 테드 창의 단편 <숨>처럼 <기억 전달자> 속 세계는 가히 ‘변화와 기억의 평형 상태’라 일컬을 만하다. 이런 디스토피아를 맞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행복한 기억뿐 아니라 고통과 절망의 기억조차 기꺼이 타인과 공유해야만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