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 여덟 가지 키워드로 고전을 읽다
김진영 지음 / 메멘토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유명한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수전 손택은 예술 작품을 형식과 내용으로 철저하게 이분하면서 의미를 찾고 해석하려는 행위를 반대하고 예술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직관적, 총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의 저자 또한 문학작품의 관습화된 읽기를 비판하면서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주관적 독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주관성을 출발로 삼지만 자의적 독서가 되지 않게 설득력과 객관성을 가지고 과거의 담론 체계나 일상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소설 독법의 유효성을 증빙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같이 권위 있는 존재(본인이 원한 건 아니겠지만)의 제안은 회로화 되어버린 독서를 비판하면서 또 하나의 회로를 추가하는 격이 될 수 있다. 권위는 능동적인 사유와 비판을 회피하고픈 나의 욕망이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찍이 수전 손택이 지적한 지식인의 복수(해석)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타인의 해석을 나의 사유의 확장으로 귀결시키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좀 유치한 비유지만 ‘같은 소설을 읽은 친구를 만나 자기는 이렇게 읽었다고 얘기하는 걸 들어주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친구라는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 공감과 비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동등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카프카의 <변신> 강의에서 여성의 목이 주는 상징에 대한 해설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정말 안 그럴싸했다. 때문에 이 챕터 전체의 설득력과 객관성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반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성에 대한 감각의 우위성, 우연의 은총, 기억의 저장 주체로서의 신체(이 부분은 페터 한트케의 <왼손잡이 여인>에서도 반복, 변주된다.)에 대한 이야기들은 깊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이처럼 타인의 해석이 나의 의식과 사유에 스며들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 물론 어떤 스며듦은 많은 시간과 내공이 필요하기도 하다. 만약 잘 스며든다면 그 번짐을 관조하면 될 것이고. 이런 과정이 쌓이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사유가 좀 더 확장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