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풀 플레이스 ㅣ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타나 프렌치 지음, 권도희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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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2월 아일랜드 더블린. 19살의 프랭크 매키와 로지 데일리는 끊임없는 폭력과 암울한 미래밖에 남지 않은 고향 페이스풀 플레이스를 떠나 잉글랜드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야반도주를 계획합니다. 하지만 당일 밤 로지는 약속장소인 16번지 폐가에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프랭크 홀로 고향을 등집니다. 그로부터 22년 후, 유능한 잠복수사관이 된 프랭크는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막내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습니다. 16번지 폐가에서 로지의 여행 가방이 발견됐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혼자 잉글랜드로 갔다고 여겼던 로지가 페이스풀 플레이스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 프랭크는 그날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망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랭크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한국에 소개된 타나 프렌치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데뷔작인 ‘살인의 숲’(2007)이 2010년에 출간됐으니 12년 만에 한국 독자와 재회한 셈인데, 뒤늦게라도 그녀의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를 다시 만나볼 수 있게 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20년 전 숲에서 두 친구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이 살인사건 전담반 형사가 되어 다시금 그 숲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를 다룬 ‘살인의 숲’과 마찬가지로, ‘페이스풀 플레이스’ 역시 22년이라는 짧지 않은 간극을 두고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과 비극으로 점철된 가족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페이스풀 플레이스’(Faithful Place)는 주인공 프랭크가 19살까지 나고 자란 작은 동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긍정적이고 우아하기까지 한 이름과는 달리 폭력과 욕설, 시기와 질투, 이간질과 염탐으로 물든 데다 타인의 불행을 고소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사람들이 살던 동네입니다. 22년 전 이 시궁창과도 같은 페이스풀 플레이스와 폭력적인 부모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프랭크와 로지의 꿈이 산산조각 나면서 모든 비극은 잉태됐고, 22년 동안 외면했던 가족과 고향을 다시 마주한 프랭크는 두 번째 지옥을 예감하면서도 로지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기꺼이 시궁창에 발을 들입니다.

 

22년 전 실종된 로지의 진실과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실은 이 작품의 중심서사는 애증으로 얼룩진 프랭크의 가족사입니다.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폭력으로 해소한 아버지, 정신적인 폭력으로 자식들을 압박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꼭 닮은 권위적이고 냉소적인 큰형 등 프랭크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22년 전 그로 하여금 첫사랑 로지와 함께 잉글랜드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로지의 여행 가방이 발견되면서 피할 수 없는 재회를 하게 된 프랭크와 그의 가족 사이엔 조금의 감동도 눈물도 없습니다. 오히려 폭발 직전의 팽팽한 긴장만 어른거립니다. 아내와 이혼한 뒤 9살 딸과 1주일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프랭크의 현재 처지도 불행까진 아니어도 신산 그 자체입니다. 과거의 가족과 현재의 가족, 그리고 두 가족 사이에 낀 프랭크의 복잡다단한 감정은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입니다.

 

로지의 실종과 현재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실은 중후반쯤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어서 대단한 반전의 힘을 발휘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22년이라는 세월의 두께, 한없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애증의 가족사, 그리고 어떤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암울한 미스터리는 반전 이상의 힘과 여운을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세상의 불행을 혼자 다 짊어져온 프랭크의 삶은 아주 약간의 희망만을 남긴 채 마무리되는데, 그래서인지 이후 타나 프렌치의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어느 작품에서라도 한번쯤은 꼭 다시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며, 형사 한 명이 각 작품에서 주요 수사관으로 활동한다. 주인공은 다른 작품에서 보조 인물로 출연하는 식으로 각 작품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또 이 작품의 후속작인 ‘브로큰 하버’와 ‘시크릿 플레이스’도 곧 출간될 예정이라는데, 아쉽게도 프랭크가 주인공인 작품은 아닌 듯 하지만, 카메오처럼이라도 잠깐 만나게 된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The Likeness’도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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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먹잇감이 제 발로 왔구나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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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최상위 지보그룹의 차녀인 여고생 선초아가 납치됩니다. 범인들은 50억의 몸값을 요구하고 경찰 최고위층까지 나선 총력수사가 시작됩니다. 납치범의 리더인 전직 조폭 장강식만이 의뢰자의 신분을 알뿐, 그의 부하인 동욱을 비롯한 네 명의 공범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에게 떨어질 10억에만 혈안이 돼있습니다. 동욱의 동생인 재욱과 그의 애인인 나타샤, 그리고 탈북민 우향란은 장강식의 지시를 받고 납치한 초아를 여기저기로 유기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담당 수사관인 윤경위는 그야말로 ‘콩가루’에 가까운 지보그룹 선영태 회장 가족과의 면담을 진행하며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납치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 누구도 납치된 선초아의 안전에 관해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벌가 차녀 납치극’이란 외형을 갖고 있지만 시종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등장인물들 간에 팽팽하게 오가는 의심과 배신, 비밀과 거짓말입니다. 한편에선 5명의 납치범들이 거액의 돈 앞에서 의심과 배신을 주고받으며 탐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서로를 적대시하는 재벌가 가족 사이의 오랜 비밀과 거짓말이 납치사건을 계기로 임계점을 뚫기 일보직전까지 끓어오릅니다.

 

5명의 납치범들은 무척 단순하고 초짜 같은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그래선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재벌가 차녀 납치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설정은 의외의 엔딩을 위한 나름 특별한 설정이라 혹시 이들의 어설픈 행각 때문에 초중반에 실망하는 독자가 있다면 조금만 더 견디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반면, 지보그룹 총수 선영태 가족은 막장 중의 막장을 선사하며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느끼게 만듭니다. 뇌물과 지략으로 지보그룹을 키운 70대의 독재자 선영태 회장, 스무살에 국민여배우에 등극했지만 50대 선영태 회장의 후처를 선택했던 하미숙, 전처의 딸로 하미숙과 그 자식들을 혐오하며 장차 지보그룹의 후계를 탐내는 선도영, 그리고 하미숙이 낳은 선초석과 선초아 등 회장 일가족은 단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을 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막내 초아가 납치된 뒤 그 누구도 초조해하지도, 간절해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여 면담에 나선 경찰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작가가 초반부터 ‘외부 범인설’ 자체를 차단한 덕분에 독자 입장에선 회장 일가족과 집사, 비서, 가정부 외에는 달리 의심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는 ‘왜?’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래선지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놀라운 반전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여온 악의들이 어떻게 폭발한 것인지를 재확인하는 인상이 더 강했습니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엔딩이지만 그 무게감이 대단했던 건 바로 이 축적된 악의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이야기 구조상 납치범과 회장 일가족 사이에서 끼인 경찰의 역할은 어차피 미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정의감 넘치는 현장수사관’과 ‘탐욕에 찌든 지휘관’을 설정한 건 별로 임팩트도 없고 흥미를 끌지도 못해서 더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윤 경위, 임 총경 식으로 이름 석 자도 부여받지 못한 두 경찰은 독자에게 정보와 상황을 설명하는 것 외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좀더 두드러진 캐릭터와 역할을 맡았다면 이야기를 좀더 풍성하게 해줬을 거란 생각입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데다 초반부터 이야기와 문장 모두 가벼워 보여서 1/3쯤엔 접을 생각도 했던 게 사실이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깊고 단단해지는 맛이 느껴져서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적잖은 인물들의 관계와 심리를 잘 그려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총평하자면 만족감 반, 아쉬움 반 정도라고 할까요?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두 편쯤 더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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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의 밤 ㅣ 안 된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청미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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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오 슈스케는 제겐 참 애매한 작가입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은 작품은 ‘외눈박이 원숭이’가 유일하고, 그 외엔 다소 난해(랫맨, 스켈리튼 키, 투명 카멜레온) 혹은 중도포기(수상한 중고상점 =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 등 대부분 쉽게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책장에 꽂혀있는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광매화’ 등 그의 대표작을 아직 못 읽어서 타율이 저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선입견 비슷한 게 생겨버린 바람에 그의 작품들에 쉽게 손이 안 나가는 게 사실입니다.

 

(개정판과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그의 21번째 작품인 ‘절벽의 밤’은 제 기준으로 분류하면 ‘흥미진진’과 ‘다소 난해’의 딱 중간쯤 되는 작품입니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왠지 엷은 우유막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모호함이 작품 전반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미스터리 자체는 그리 복잡하거나 난이도가 높진 않아도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깊고 어두운 감정들이 작품 전반에 도사리고 있는데다, 진상이 밝혀져도 깔끔함이나 통쾌함과는 거리가 먼 여운들이 기다리고 있고, 특히 독자를 최대한 객관적인 위치에 머물게 하려는 건조하고 무심한 듯한 문장들 역시 ‘우유막’의 일부분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런 점들이 미치오 슈스케의 특기이자 장점이기도 하지만 저처럼 그를 ‘애매한 작가’로 여기는 독자라면 초반부터 고전을 면치 못할 수도 있는데, 일단 재미있고 독특한 작품이니 미리 예단하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서로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주요 인물들이 비중을 달리 하며 여러 수록작에 교차 등장하기 때문에 연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의 세 작품이 서로 다른 살인사건들을 다루고 있고 마지막 작품에서 이른바 ‘종합편’처럼 마무리되는데, 흥미로운 건 작가가 미스터리의 진실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수록작 모두 “그래서 마지막에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야?”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데, 그 해답은 각 수록작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에 실려 있습니다. 문제는 독자에 따라 그 사진을 아무리 봐도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인데, 그래선지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독자들이 해설을 요청하거나 직접 해설을 게재하는 등 화제를 불러일으킨 소설”이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네 개의 사진 중 한 개는 결국 ‘옮긴이의 말’을 읽고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애매한 미스터리 때문에 답답함이 치밀더라도 마지막에 실린 사진들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다 보면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끽할 수 있으니 절대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는 자살 명소로 유명한 유미나게 절벽입니다. 자살 외에도 뺑소니 사고, 자살을 위장한 살인 등 여러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 오명이 더욱 심각해졌지만, 마지막 수록작에서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평화로운 공원으로 탈바꿈한 채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수록작에게 ‘거리의 평화를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제목을 단 건 무척 아이러니한 일인데, 겉모습만 평화롭게 바뀌었을 뿐 실은 그 아래에 감춰진 불행과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섬뜩한 경고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공원에서 자신들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자백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때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도 있다.”라는 씁쓸함을 남겨서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올봄에만 개정판을 포함하여 미치오 슈스케의 세 작품이 출간됐습니다. 매번 “다음에는 반드시 책장에 갇혀 있는 그의 대표작들을 읽을 테야!”라고 다짐하고도 금세 까먹거나 의도적으로 피해오곤 했는데, 아무래도 다음에 읽을 작품 역시 신간인 ‘용서받지 못한 밤’이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올해 안에 그의 대표작 한 권쯤은 책장에서 꼭 구해주도록 애써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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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티켓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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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천연두로 부모를 잃은 16살 잭 파커와 여동생 룰라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친척집으로 가던 중 은행을 털고 도주하던 강도들과 마주칩니다. 할아버지는 숨지고 여동생 룰라가 강도들에게 납치됐지만 그 누구도 잭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런 잭에게 손을 내민 건 거구의 흑인 추적자 유스터스와 난쟁이 총잡이 쇼티. 잭은 할아버지에게 받은 땅 문서를 내걸며 두 사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여동생 구출작전에 새로운 삶을 꿈꾸는 매춘부, 전직 현상금 사냥꾼인 보안관, 유치장 요강 청소담당인 흑인, 그리고 성질 고약한 멧돼지가 가세하면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추격전이 텍사스를 무대로 펼쳐집니다.

 

‘납치된 여동생 구출하기’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16살 소년인데다 구출을 위해 조직된 팀원 면면이 어딘가 블랙 코미디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처음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서부극 정도로 여겼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빅 티켓’은 걸쭉하고 노골적인 음담패설, 피와 살이 튀는 무자비한 폭력, 총잡이가 활약하던 서부시대와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시대가 묘하게 겹친 19세기 말 미국의 혼란 등 날것 같은 잔혹함을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추격전 자체도 흥미롭지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인물 하나하나의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선교사인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16살 잭은 사건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주님의 계획대로 이뤄진다고 믿으며 살인을 죄악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을 구출하기 위한 여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인을 비롯한 온갖 불법을 저지르게 되자 단단했던 종교적 신념이 무너지면서 크나큰 혼란에 휩싸입니다.

백인+흑인+코만치 인디언 혼혈인 유스터스는 흑인과 거지와 무법자의 시신을 묻고 수고비를 받는 천민이지만, 간간이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술에 취하면 피아를 구분 못하고 총질을 해대는 게 문제지만, 뛰어난 추적꾼의 기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난쟁이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끝에 어린 시절 서커스단에 버려졌던 쇼티는 그곳에서 세상과 문학과 사격술을 배운 독특한 인물입니다. 핸디캡인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정찰병과 탐정을 거쳐 뛰어난 현상금 사냥꾼이 됐지만, 밤마다 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하고 항상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탐독하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합니다.

16살 잭의 동정을 책임진 매춘부 지미 수는 새로운 삶을 위해 매춘굴을 도망쳐 나온 뒤 잭의 팀에 합류한 당차고 활달한 인물입니다. 매춘부가 될 당시 끔찍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선지 강도들에게 여동생을 납치당한 잭에게 큰 위안과 힘이 돼주기도 합니다.

 

잭 일행의 추격전은 피비린내 그 자체입니다. 가는 곳마다 강도 일당이 저지른 참혹한 살인 현장과 마주쳐야 했고, 일당을 숨기려는 자들과 예상치 못한 총격전을 벌이며 큰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추격전 위주의 액션물에 그치지 않고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의 희망과 체념을 골고루 채워 넣어 두텁고 탄탄한 서사를 구축합니다. 한편에선 현상금을 노리는 총잡이와 법적 절차를 무시한 교수형이 횡행하고, 다른 한편에선 금덩이 노릇을 하는 석유 유정탑과 부의 상징인 자동차가 혼재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의 다채로운 캐릭터는 스토리 못잖게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특히 잭을 돕는 추적팀이 밑바닥 출신의 혼혈 흑인, 모든 이에게 손가락질 받는 난쟁이, 돈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매춘부로 구성된 점은 뿌리 깊은 차별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는 특별하고도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적잖이 발견된 오타와 간혹 이해가 잘 안 되는 번역 때문에 별 0.5개를 빼긴 했지만 ‘빅 티켓’은 기대 이상의 재미와 흥분을 안겨준 명품이란 생각입니다. 휴스턴 크로니클은 “‘톰 소여의 모험’의 어두운 버전과 코엔 형제 영화처럼 느껴진다.”라는 평을 남겼는데, 만일 이 작품이 코엔 형제에 의해 영화화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찾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 중이라고 하는데, 코엔 형제가 감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려한 볼거리와 독특한 서사를 맛볼 수 있을 게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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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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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서 추리소설 전문서점을 운영하는 40대 맬컴 커쇼는 어느 날 FBI 요원 그웬 멀비의 방문을 받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맬컴이 오래 전 블로그에 올린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란 포스팅을 그대로 모방한 살인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그녀의 추측 때문입니다. 실은 그 포스팅은 ‘가장 독창적이면서 실패할 확률이 없는 완벽한 살인’을 다룬 여덟 편의 추리소설을 소개한 것으로 당시 맬컴이 일하던 서점의 홍보를 위해 올린 것에 불과하지만, 그웬의 주장대로 누군가 ‘현실 속 완벽한 살인’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면 그것은 엄청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엔 본인이 살인용의자 혹은 공범으로 의심받게 될 상태에서 맬컴은 그웬과 함께 일련의 살인사건을 하나하나 조사해보기로 결심합니다.

 

한국에 출간된 피터 스완슨의 작품은 빼놓지 않고 모두 읽었는데, 매번 데뷔작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맞먹는 작품을 기대했다가 다소 아쉬움만 느끼곤 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서사 대신 늘 새로운 설정을 추구하는 점은 높이 평가해왔고, 그래서 이번 신작 역시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고전 추리소설 팬들을 위한 오마주”라는 출판사 소개글이었습니다. 처음엔 이야기 자체가 고전적이란 뜻으로 해석했는데, 읽어보니 애거서 크리스티를 위시한 황금시대(1920~30년대) 작품부터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에 이르기까지 미스터리 팬이라면 한번쯤 들어봤거나 필독서 목록에 올려야 할 명작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맬컴이 작성한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에 등장하는 애거서 크리스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아이라 레빈, 도나 타트 등 ‘가장 독창적이면서 실패할 확률이 없는 완벽한 살인’을 그려낸 당대의 거장들의 작품들이 자주 언급됩니다.

 

초반부만 해도 맬컴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다소 엉뚱한 추측과 개연성 없는 추리를 펼치는 FBI 요원 그웬 멀비를 과대망상증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를 과정에 끼워 맞춘 듯한 그녀의 추리는 무리수로 보였고, 단지 서점 홍보를 위해 블로그에 글을 올렸던 맬컴이 엉뚱한 상황에 휘말리는 것으로 보일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쇄살인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자) 가운데 맬컴의 서점에 자주 드나들던 여성이 거론되자 맬컴은 그웬에겐 밝히지 않은 자신의 은밀한 과거를 떠올리며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자신과 그웬이 편의상 ‘찰리’라고 별명 붙인 그 연쇄살인범이 어쩌면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더 이상의 줄거리 소개가 쉽지 않은데, 초중반에 폭로되는 결정적인 변곡점(맬컴의 은밀한 과거)을 언급하지 않고는 그 뒷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변곡점으로 인해 맬컴은 ‘찰리’라 별명 붙인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유일한 아군이던 그웬마저 그를 돕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맬컴은 조금씩 진실에 다가가지만 결국 독자와 함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으며 예상치 못한 엔딩을 맞이하고 맙니다.

 

이 작품에서 언급된 수많은 고전 가운데 제대로 읽어본 작품은 몇 편 안 됩니다. 가장 자주 언급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ABC 살인사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은 워낙 어릴 적에 청소년 버전으로 읽은 기억밖에 없어서 무척 아쉬웠는데, 그래도 맬컴의 입을 통해 설명된 정보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줄거리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새삼 꼭 한 번 다시 읽어야겠다는 욕심이 들었는데 나머지 고전들 역시 기약할 순 없어도 필독 목록에 꼭 올려놓을 생각입니다. 다만, 이 작품에는 몇몇 고전에 대한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들어있으니 그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맬컴의 은밀한 과거, 블로그 포스팅을 모방한 연쇄살인범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중간중간 “어?”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위화감 가득한 서술 등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꽤 입체적인 구도를 지닌 작품입니다. “범인은 누구?”라는 미스터리 서사에다 복잡하고 몽환적인 심리스릴러의 면모까지 갖춰서 풍성한 볼륨감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다만, 팽팽한 긴장감과 막판 반전에 대한 기대감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엔딩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나름 몇 가지 반전이 일어나지만 이야기의 구도 상 모든 걸 뒤집는 짜릿하고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진 못합니다. 오히려 심연에 가까운 고통스럽고 씁쓸한 맛이 더 강하게 남는다고 할까요? 지금까지의 피터 스완슨의 작품들과는 완연히 다른 스타일의 작품인 건 맞지만 여전히 ‘죽마사’에 눈높이가 맞춰진 저로선 도리 없이 별 1개를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린다면 주저 없이 달려들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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