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던 먹잇감이 제 발로 왔구나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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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최상위 지보그룹의 차녀인 여고생 선초아가 납치됩니다. 범인들은 50억의 몸값을 요구하고 경찰 최고위층까지 나선 총력수사가 시작됩니다. 납치범의 리더인 전직 조폭 장강식만이 의뢰자의 신분을 알뿐, 그의 부하인 동욱을 비롯한 네 명의 공범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에게 떨어질 10억에만 혈안이 돼있습니다. 동욱의 동생인 재욱과 그의 애인인 나타샤, 그리고 탈북민 우향란은 장강식의 지시를 받고 납치한 초아를 여기저기로 유기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담당 수사관인 윤경위는 그야말로 콩가루에 가까운 지보그룹 선영태 회장 가족과의 면담을 진행하며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납치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 누구도 납치된 선초아의 안전에 관해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벌가 차녀 납치극이란 외형을 갖고 있지만 시종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등장인물들 간에 팽팽하게 오가는 의심과 배신, 비밀과 거짓말입니다. 한편에선 5명의 납치범들이 거액의 돈 앞에서 의심과 배신을 주고받으며 탐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서로를 적대시하는 재벌가 가족 사이의 오랜 비밀과 거짓말이 납치사건을 계기로 임계점을 뚫기 일보직전까지 끓어오릅니다.

 

5명의 납치범들은 무척 단순하고 초짜 같은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그래선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재벌가 차녀 납치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설정은 의외의 엔딩을 위한 나름 특별한 설정이라 혹시 이들의 어설픈 행각 때문에 초중반에 실망하는 독자가 있다면 조금만 더 견디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반면, 지보그룹 총수 선영태 가족은 막장 중의 막장을 선사하며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느끼게 만듭니다. 뇌물과 지략으로 지보그룹을 키운 70대의 독재자 선영태 회장, 스무살에 국민여배우에 등극했지만 50대 선영태 회장의 후처를 선택했던 하미숙, 전처의 딸로 하미숙과 그 자식들을 혐오하며 장차 지보그룹의 후계를 탐내는 선도영, 그리고 하미숙이 낳은 선초석과 선초아 등 회장 일가족은 단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을 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막내 초아가 납치된 뒤 그 누구도 초조해하지도, 간절해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여 면담에 나선 경찰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작가가 초반부터 외부 범인설자체를 차단한 덕분에 독자 입장에선 회장 일가족과 집사, 비서, 가정부 외에는 달리 의심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는 ?’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래선지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놀라운 반전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여온 악의들이 어떻게 폭발한 것인지를 재확인하는 인상이 더 강했습니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엔딩이지만 그 무게감이 대단했던 건 바로 이 축적된 악의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이야기 구조상 납치범과 회장 일가족 사이에서 끼인 경찰의 역할은 어차피 미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정의감 넘치는 현장수사관탐욕에 찌든 지휘관을 설정한 건 별로 임팩트도 없고 흥미를 끌지도 못해서 더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윤 경위, 임 총경 식으로 이름 석 자도 부여받지 못한 두 경찰은 독자에게 정보와 상황을 설명하는 것 외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좀더 두드러진 캐릭터와 역할을 맡았다면 이야기를 좀더 풍성하게 해줬을 거란 생각입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데다 초반부터 이야기와 문장 모두 가벼워 보여서 1/3쯤엔 접을 생각도 했던 게 사실이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깊고 단단해지는 맛이 느껴져서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적잖은 인물들의 관계와 심리를 잘 그려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총평하자면 만족감 반, 아쉬움 반 정도라고 할까요?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두 편쯤 더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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