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장난감 ㅣ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상민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면부족은 기본이고 비인간적인 초과근무에 대학병원 내 모든 직종의 ‘밥’이나 다름없는 신세라 공공연히 최하층 계급으로 불리는 인턴. 장래 정형외과 의사를 꿈꾸는 명성대학병원 인턴 강석호는 오로지 레지던트 합격을 위해 오늘도 지옥 같은 인턴 생활을 견디는 중입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한 두 환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이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것은 물론 인턴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곤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두 환자의 죽음이 자신의 실수 탓이 아니란 걸 입증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강석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사에 나서지만 그 과정에서 괴물과도 같은 대학병원의 민낯과 마주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를 무척 좋아합니다. 도조대학병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메디컬 스토리의 미덕과 미스터리의 강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첫 편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이후 한 편도 빠지지 않고 읽어왔습니다.

‘위험한 장난감’에 눈길이 갔던 건 무엇보다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라는 홍보 카피 때문인데,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로 보이기도 했고, 또 그 작품들에 맞먹겠다는 자신감이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학병원이라는 무대까지 닮은꼴이라 더 기대감이 들었는데, 드라마나 소설로 많이 봐온 일본 대학병원에 비해 정작 그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 대학병원의 속살을 들여다볼 기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인생 자체가 ‘개고생’인 인턴 강석호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두 환자의 죽음의 책임을 지고 그동안 쌓아온 것들과 다가올 미래를 통째로 내놓게 됐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한 명의 환자에 관한 한 자신의 책임이 아님을 확신한 강석호는 순진하게도 인간의 양심을 믿어보지만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미안하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냉정한 대답만 듣고 맙니다. 징계위원회까지 24시간도 채 안 남은 상태에서 강석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두 환자의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사망자가 발생한 병실의 환자들을 탐문하고, 몰래 시신 안치실에 잠입하고, 사망자들의 기록을 열람했던 의료진 명단을 입수하는 등 물러설 곳 없는 각오로 조사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해 엉뚱한 ‘희생양’을 찾는 탐정 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복잡한 의학용어들이 난무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습니다. 교수, 레지던트, 간호사, 사무직 등 인턴을 ‘밥’으로 아는 대학병원 내의 인간관계도 흥미롭습니다. 자칫 의사로서의 인생을 종치게 될지도 모를 강석호의 진실 찾기는 피를 말리는 시간제한 설정 속에 팽팽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대목에서 미스터리가 힘을 잃은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범인의 동기는 억지에 가까울 정도로 설득력이 없었는데, 앞서 그럴 만한 정황이나 밑밥이 뿌려진 적이 없다보니 “그 사람들이 그런 관계였어?”라는 허망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인 입장에서 살인으로 인해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점도 의아한 대목입니다. 범행수법들 역시 ‘설정을 위한 설정’, 즉 새롭고 기발한 방법을 고민하다가 오히려 사실감을 놓쳤다는 생각인데, 그중 한 가지 방법은 허술하고 들통 날 여지가 너무 많아서 범인의 수준을 훅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목은 대학병원 내의 치열하고 잔인한 권력구도입니다. 미스터리의 힘을 몇 배는 더 강렬하게 만드는 불쏘시개 역할 역시 그 권력구도입니다. ‘위험한 장난감’은 분명 그 권력구도를 밑바탕에 깔아두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몸통에선 그 부분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즉 최하층 계급이자 ‘모두의 밥’인 강석호의 수난사와 고군분투기가 대부분이라 뒤늦게 권력구도를 강조한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힘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에필로그와 ‘작가의 말’을 보면 ‘강석호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후속작에서는 밑바탕과 몸통의 조화가 좀더 잘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비웃는 숙녀 두 사람 ㅣ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급호텔에서 열린 동창회에서 독살사건이 일어나고, 관광버스가 폭발하며 수십 명이 사망합니다. 이어 학교 방화와 살인, 피트니스 클럽 폭파 등 테러 수준의 범죄가 꼬리를 물고 벌어집니다. 수백 명의 인력을 동원하고도 피해자들 사이의 접점은 물론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찾지 못한 경찰이 궁지에 몰릴 무렵, 놀랍게도 CCTV에 유력 용의자가 포착됩니다. 엽기적인 연쇄살인에 관여한 뒤 의료교도소를 탈주해 지명 수배 중인 우도 사유리. 그녀는 희대의 악녀 가모우 미치루의 지시로 대량살상을 저지르고 있지만 경찰은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필수까지는 아니어도 ‘비웃는 숙녀 두 사람’을 제대로 맛보려면 먼저 읽어야 할 작품들이 있습니다. 악녀 가모우 미치루의 소름 돋는 행적을 그린 ‘비웃는 숙녀 시리즈’ 두 편과 사이코패스 우도 사유리의 과거를 그린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두 편이 그것입니다. (좀더 오랜 사유리의 과거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의 첫 편인 ‘속죄의 소나타’에 소개됩니다.)

 

간략하게 두 사람의 캐릭터를 정리해보면, 자신의 손은 조금도 더럽히지 않은 채 상대를 치명적인 절망에 빠뜨리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거나, 심지어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희대의 악녀 가모우 미치루의 목적은 돈도 쾌락도 아닙니다. 그냥 툭 하고 머릿속의 방아쇠가 당겨지면 그 순간 상대를 으스러뜨리겠다는 욕망이 불붙고, 이어 누구도 생각해내기 어려운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그대로 실천할 뿐입니다. 반면 해리성 인격 장애와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지닌 우도 사유리는 어려서부터 의료소년원에 수용된 적이 있으며, 성인이 된 뒤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에 관여한 일로 의료교도소에 갇혔다가 탈주한 인물입니다. 두 악녀의 차이라면, 미치루가 동정도 자비도 공감 능력도 없으며 사람을 그저 벌레처럼 여기는 반면, 사유리는 적어도 상대를 ‘동족’으로 인식하기에 살인 행위에서 흥분과 희열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살육과 파괴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공포 불감증이기에 무감각하게 일을 벌일 수 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p293~294)

 

각각 다른 시리즈에서 희대의 악녀 역할을 수행한 미치루와 사유리가 콤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비웃는 숙녀 두 사람’은 올해 최고 기대작 중 한 편으로 꼽힐 만 했습니다. 과연 두 사람이 ‘원 팀’으로 활약할지, 아니면 누군가 죽어야 끝나는 벼랑 끝 게임의 적으로 만나게 될지 무척 궁금했는데, 결론적으론 두 이야기를 모두 맛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그동안 ‘개인’을 목표물로 삼았던 두 사람이 어마어마한 수준의 대량살상을 저지른다는 점입니다. 특히 앞선 작품들에서 타인의 악의를 부추겨 끔찍한 짓을 저지르게 사주하긴 했지만 단순히 악녀로만 볼 수 없는 선악의 경계선에 서있던 미치루가 독살과 폭탄을 이용하는 순도 100%의 악녀로 부활한 점은 꽤 충격적인 대목이었습니다. 테러 수준의 대량살상을 저지른 미치루와 사유리가 과연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나카야마 시치리는 예의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흥미롭고 서늘한 종장을 선보입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다른 시리즈의 인물들이 교차 출연하는 장면들입니다. 의료소년원에서 사유리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데다 현재는 그녀의 변호인 겸 신원보증인인 미코시바 레이지가 카메오 이상의 비중으로 등장하고,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에서 사유리를 쫓던 사이타마 현경의 신참 고테가와가 이제는 제법 구력이 붙은 형사로 찬조 출연합니다. 또 ‘비웃는 숙녀 시리즈’에서 미치루의 악행과 신출귀몰한 행적에 충격을 받았던 아소 반장은 수사를 이끄는 라이벌 기리시마 반장과는 사뭇 다른 추론을 내세웁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두 가지 아쉬움이 남았는데, 하나는 두 악녀의 폭발력이 기대만큼 강렬하진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경시청 수사1과 형사 미야마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 탓으로 보이는데, 물론 마지막 장에서 작가가 독자의 기대와 갈증 – 두 악녀의 정면충돌 - 을 해소해주긴 하지만 그 역시 살짝 모자란 느낌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블루홀식스의 작품답지 않게 여러 곳에서 발견된 오타입니다. 조사 등 단순 오타는 물론 인물 이름까지 틀린 경우가 제법 있어서 무척 아쉬웠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라도 꼭 수정되기를 바랍니다.

 

‘비웃는 숙녀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나카야마 시치리의 여러 시리즈 가운데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 입장에서 앞으로 적어도 몇 편 정도는 미치루의 이야기를 더 만나보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저지른 대량살상 때문에 미치루는 돌아올 수 없는 선을 확실히 넘었고 언젠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겠지만, 그 전까지 ‘악녀’ 미치루의 이야기가 좀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욕심은 아마 저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세에서 12세에 이르는 영국 소년들이 격추당한 비행기에서 비상 탈출한 뒤 태평양 무인도에 고립됩니다. 그들은 12세 소년 랠프를 대장으로 삼아 생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지만 얼마 못가 두 패로 갈라지고 맙니다. 랠프는 집단의 규칙을 정하고 봉화를 통한 구조요청을 최우선으로 삼지만, 애초 랠프가 대장이 된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잭은 멧돼지 사냥을 통해 소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무인도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들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끝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야만적인 형태에 이르고 맙니다.

 

(서평에 앞서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파리대왕’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다른 출판사 혹은 다른 번역가의 작품을 찾거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길 기다리는 게 낫다는 점입니다. 1999년에 1쇄가 나왔고 제가 읽은 건 2015년의 66쇄인데, 어설픈 직역 혹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번역으로 무려 16년 동안 66쇄까지 찍었다는 게 (출판사의 명성을 감안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소년들이 할아버지 말투로 말하고 있다.”는 한 독자의 비판은 형편없는 번역의 문제를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실은 이보다 심각한 대목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노벨상까지 받은 작품이 한국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게 그저 씁쓸할 뿐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뒤늦게 읽게 됐습니다.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괴물이 돼버리고 마는 이야기”라는 어설픈 정보만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설정인데다 명품 고전에 대한 지적 허영심까지 더해져 나름 큰 기대를 가진 작품입니다.

 

요즘의 6~12세라면 어른 뺨 칠 정도로 알 건 다 아는 나이지만, 이 작품이 집필된 1954년을 기준으로 하면 리더 역할을 하는 12세 소년이라고 해봐야 세상에 대해 이제 막 눈을 뜬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른 하나 없는 무인도에 고립된 그 또래 소년들이 원초적인 본능과 욕망 때문에 자연스레 권력투쟁을 벌이고 살인을 서슴지 않게 되는 과정은 도구와 불을 손에 넣은 원시인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주장하며 전쟁과 살상을 일으킨 먼 고대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모르긴 해도 15세 혹은 그 이상의 소년들이었다면 이 작품이 안긴 충격과 의미는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랠프가 법과 규칙을 통해 집단을 조율하면서 분업과 협동으로 구조 계획을 세우는 인물이라면, 자신이 대장이 되지 못한 것에 분노한 잭은 멧돼지 사냥을 통해 식욕이라는 원초적인 욕망을 채워주며 야만성과 본능에 호소하는 인물입니다. 애초 합리적인 대장 랠프에게 기울었던 소년들은 무인도라는 무자비한 환경에 시달리면서 점차 구조 자체보다는 잭이 제공한 기름진 멧돼지 고기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국 잭이 소년들을 손아귀에 넣을 무렵에는 통제 불가능한 광기가 무인도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자기편이 아닌 자는 단지 갈등의 상대가 아니라 죽여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 ‘배틀 로열’식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 아직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접하지 못한 무구한 소년들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권력투쟁의 당사자로, 무시무시한 괴물로 진화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섬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워낙 독하고 센 서사를 많이 접한 요즘 독자에겐 큰 감흥을 주기 어려운 이야기인 게 사실이고, 기대보다 다소 싱거운 엔딩 역시 무척 아쉽긴 했지만, 아마 1954년의 독자들에겐 꽤 큰 충격을 주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영화가 있는 걸로 아는데, 소설의 깊이와 무게감이 제대로 구현됐을지는 미지수지만 번역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찾아볼 생각입니다. 언젠가 다른 번역가에 의해 새로운 판본이 출간된다면 꼭 한 번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살인자의 쇼핑목록 ㅣ 네오픽션 ON시리즈 2
강지영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인자의 쇼핑목록’ 다섯 번째로 만난 강지영의 작품입니다. 제목만 보면 장편 ‘살인자의 쇼핑몰’의 후속작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표제작 ‘살인자의 쇼핑목록’을 포함하여 모두 7편의 작품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영수증 속 쇼핑목록을 근거로 엽기적인 연쇄살인마를 뒤쫓는 ‘프로관찰러’ 마트 캐셔, 향낭 주머니를 매개로 귀신들과 접촉하다가 위기에 빠지는 교수, 게임 속 캐릭터가 죽으면 그만큼의 현실 속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도시전설, 태어나 100일이 되기 전까지 전생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판타지, 타고난 사이코패스 기질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진화시키는 괴물, 그리고 마을의 결계를 하나둘씩 무너뜨리며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염병귀신 등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판타지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돼있습니다.

 

다섯 번째 만남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강지영과 처음 만났던 단편집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입니다. 당시 서평에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이나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남의 일’, 오츠이치의 ‘ZOO’ 등이 생각나곤 했다.”라고 적을 정도로 ‘흥미로운 불쾌감’을 만끽했기 때문인데, ‘살인자의 쇼핑목록’은 그에 못잖은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수위나 기괴함에 있어선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 압도적인 게 사실이지만, 이 단편집에 실린 7편의 작품 역시 잘 차려진 고급 뷔페처럼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표제작인 ‘살인자의 쇼핑목록’과 귀신호러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전설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각시’는 단편영화나 단막극으로 만들어진다면 원작 못잖게 서늘한 공포를 발산할 작품들이라 영상화가 기대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읽은 작품들에게 준 평점이 2.5개에서 4.5개에 이를 정도로 개인적인 호불호가 심하긴 하지만, 두 편의 단편집에 유독 높은 평점을 준 건 한국 장르물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뛰어난 강지영의 상상력 때문입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하지만 발상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 보니 어떤 작품이든 초반부터 옆구리를 찔린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단지 뛰어난 발상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는 건 강지영만의 특별한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덧붙이자면, 형식의 힘, 즉 단편이기에 그 매력이 더욱 빛난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래선지 다음에 만나게 될 새 작품 역시 장편보다는 단편집이기를 더 기대하게 됩니다. 욕심을 부리자면 ‘개들이 식사할 시간’과 ‘살인자의 쇼핑목록’보다 조금 더 독하고 센 이야기라면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소년A 살인사건
이누즈카 리히토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년 전 촉법소년 폐지 여론을 들끓게 했던 고쿠분지 여아 살해사건이 다시금 주목을 받습니다. 당시 14살이던 범인 소년A가 촬영한 범행영상이 최근 다크웹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불과 4년의 의료소년원 보호조치 이후 자유의 몸이 됐던 소년A에 대한 비난과 함께 촉법소년 논쟁이 다시금 불거지는 가운데 경시청 감찰계장 시라이시 히데키는 20년 전 수사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영상유출자 파악에 나섭니다. 한편 인터넷 사적 제재 사이트인 ‘자경단’에서 만난 료마와 에리코는 사이트 운영자 야요이와 함께 소년A의 정체를 세상에 폭로하기로 결심합니다. 가까스로 소년A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의 신상을 인터넷에 알린 그들은 잠시 승리감에 도취하지만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도리어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는 무척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재지만 동시에 읽는 내내 마음에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묵직한 불편함에 시달리게 만드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더는 소년, 소녀라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줘선 안 된다는 촉법소년 폐지 여론이 비등하고 개인적으로도 거기에 동의하는 입장이라 더 관심이 갔고, 이미 다수의 작품을 통해 활용됐던 촉법소년 소재가 과연 사적 제재 서사와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함과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여아 살해사건 영상을 유출한 20년 전 수사담당자를 찾는 경시청 감찰계장 시라이시 히데키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인터넷 자경단에서 만난 료마와 에리코와 사이트 운영자 야요이가 소년A의 정체를 추적하는 게 다른 한 축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가와 의미는 소년A의 정체가 세상에 폭로된 뒤부터 시작됩니다. 즉, 단순히 ‘벌 받지 않은 촉법소년에 대한 응징’을 넘어 결코 치유되지 않는 피해자 유족의 상처와 고통, “인간이 만든 법이 악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다면 인간 스스로 법을 초월해 악을 심판하는 수밖에.”라는 사적 제재에 관한 논쟁, 그리고 타인의 비극을 흥미나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거나 멋대로 자신만의 정의의 잣대를 내세워 단죄하려는 이기심과 영웅심 등 다양하고 무거운 주제들이 작품 전반에 녹아있습니다.

 

경시청 감찰계장 시라이시의 수사는 정통 경찰소설의 플롯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특수설정 혹은 기발한 트릭을 앞세운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적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정통 경찰소설 서사는 더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수사1과가 아니라 감찰계 소속의 주인공이 등장한 점도 매력적이었는데, 덕분에 이 작품으로 데뷔한 이누즈카 리히토가 앞으로 ‘시라이시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기를 기대하게 됐습니다.

인터넷 자경단 멤버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한데, 미성년자가 낸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야요이, 뛰어난 수사력과 행동력으로 자경단 사이트에 고발된 인물들을 찾아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는 료마, 그리고 자신이 사이트에 올린 범법자가 실제로 경찰에 체포되자 승리감과 영웅심을 맛봤던 에리코는 사적 제재의 정당성이라든가 익명성에 기댄 막연한 정의감의 문제를 독자에게 묻는 역할을 맡습니다.

 

‘소년A 살인사건’은 주제와 의미는 물론 매력적인 반전을 포함한 미스터리라는 점에서도 독자의 기대에 부응한 작품입니다.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라는 두 소재를 잘 융합시키면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된 주제를 잘 드러냈고, 시라이시와 자경단의 긴장감 넘치는 활약과 함께 영상유출범의 정체와 동기가 밝혀지는 막판 반전은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냈기 때문입니다.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은 소재에서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뽑아냈다고 할까요?

 

이 작품으로 2018년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대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누즈카 리히토는 이후 여러 작품을 펴내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나온 작품들은 ‘시라이시 시리즈’로 보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이라도 더 한국에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직은 신인에 가깝지만 재미와 주제를 잘 요리하는 작가를 만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