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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A 살인사건
이누즈카 리히토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평점 :
20년 전 촉법소년 폐지 여론을 들끓게 했던 고쿠분지 여아 살해사건이 다시금 주목을 받습니다. 당시 14살이던 범인 소년A가 촬영한 범행영상이 최근 다크웹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불과 4년의 의료소년원 보호조치 이후 자유의 몸이 됐던 소년A에 대한 비난과 함께 촉법소년 논쟁이 다시금 불거지는 가운데 경시청 감찰계장 시라이시 히데키는 20년 전 수사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영상유출자 파악에 나섭니다. 한편 인터넷 사적 제재 사이트인 ‘자경단’에서 만난 료마와 에리코는 사이트 운영자 야요이와 함께 소년A의 정체를 세상에 폭로하기로 결심합니다. 가까스로 소년A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의 신상을 인터넷에 알린 그들은 잠시 승리감에 도취하지만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도리어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는 무척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재지만 동시에 읽는 내내 마음에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묵직한 불편함에 시달리게 만드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더는 소년, 소녀라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줘선 안 된다는 촉법소년 폐지 여론이 비등하고 개인적으로도 거기에 동의하는 입장이라 더 관심이 갔고, 이미 다수의 작품을 통해 활용됐던 촉법소년 소재가 과연 사적 제재 서사와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함과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여아 살해사건 영상을 유출한 20년 전 수사담당자를 찾는 경시청 감찰계장 시라이시 히데키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인터넷 자경단에서 만난 료마와 에리코와 사이트 운영자 야요이가 소년A의 정체를 추적하는 게 다른 한 축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가와 의미는 소년A의 정체가 세상에 폭로된 뒤부터 시작됩니다. 즉, 단순히 ‘벌 받지 않은 촉법소년에 대한 응징’을 넘어 결코 치유되지 않는 피해자 유족의 상처와 고통, “인간이 만든 법이 악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다면 인간 스스로 법을 초월해 악을 심판하는 수밖에.”라는 사적 제재에 관한 논쟁, 그리고 타인의 비극을 흥미나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거나 멋대로 자신만의 정의의 잣대를 내세워 단죄하려는 이기심과 영웅심 등 다양하고 무거운 주제들이 작품 전반에 녹아있습니다.
경시청 감찰계장 시라이시의 수사는 정통 경찰소설의 플롯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특수설정 혹은 기발한 트릭을 앞세운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적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정통 경찰소설 서사는 더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수사1과가 아니라 감찰계 소속의 주인공이 등장한 점도 매력적이었는데, 덕분에 이 작품으로 데뷔한 이누즈카 리히토가 앞으로 ‘시라이시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기를 기대하게 됐습니다.
인터넷 자경단 멤버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한데, 미성년자가 낸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야요이, 뛰어난 수사력과 행동력으로 자경단 사이트에 고발된 인물들을 찾아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는 료마, 그리고 자신이 사이트에 올린 범법자가 실제로 경찰에 체포되자 승리감과 영웅심을 맛봤던 에리코는 사적 제재의 정당성이라든가 익명성에 기댄 막연한 정의감의 문제를 독자에게 묻는 역할을 맡습니다.
‘소년A 살인사건’은 주제와 의미는 물론 매력적인 반전을 포함한 미스터리라는 점에서도 독자의 기대에 부응한 작품입니다.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라는 두 소재를 잘 융합시키면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된 주제를 잘 드러냈고, 시라이시와 자경단의 긴장감 넘치는 활약과 함께 영상유출범의 정체와 동기가 밝혀지는 막판 반전은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냈기 때문입니다.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은 소재에서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뽑아냈다고 할까요?
이 작품으로 2018년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대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누즈카 리히토는 이후 여러 작품을 펴내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나온 작품들은 ‘시라이시 시리즈’로 보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이라도 더 한국에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직은 신인에 가깝지만 재미와 주제를 잘 요리하는 작가를 만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