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 조건 : 옆집에 사는 이웃과 반드시 친하게 지내세요
네후네 하야세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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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의지와 희망을 포기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스무살 다카히로는 우연히 발견한 구인 광고에 사로잡힙니다. “지금 당장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사람 모집 중! 월급 15만 엔~”이라는 문구와 함께 광고가 내건 유일할 고용 조건은 ‘지정한 맨션에 입주하여 옆집의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것’. 그런데 맨션 702호에 입주한 다카히로를 기다리는 이웃은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대롱 같은 긴 입과 그 끝에 달린 눈알, 시커멓게 짓무른 손가락 등 괴이 그 자체인 이웃은 늘 “이건 친구한테 들은 얘기인데.”라며 이런저런 괴담을 들려주곤 “무서웠어?”라고 꼭 확인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카히로는 이미 23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702호를 거쳐 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호러물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꽤 읽었다고 생각해왔는데, ‘입주 조건’은 기존의 그 어느 호러물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독특한 형식에 특이한 인물들을 그리고 있어서 읽는 내내 굉장히 생경한 느낌이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살을 좀 붙이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이웃의 기묘한 공동생활을 그린 일상 호러’인데, 그렇다고 해서 유쾌하거나 가벼운 톤의 호러물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과 비현실이 묘하게 뒤섞여서 괴담의 색채와 농도를 독특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정체 자체가 의심스러운 10층짜리 쥐색 외관의 맨션은 4층까지는 평범함 그 자체지만, 5층부터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뿜습니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서 정원 초과 벨이 울리는가 하면, 우편함엔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이 종종 들어가 있기도 하고, 어떤 층은 밤이고 낮이고 인적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시도 머물지 못하고 도망치고도 남을 만한 곳입니다.

 

하지만 다카히로는 앞서 702호에 머물다가 사라진 23명과 달리 이웃의 괴이와 아슬아슬한 공존을 유지합니다. 당초 입주 조건인 ‘옆집에 사는 이웃과 반드시 친하게 지내세요’를 충실히 지키며, 인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합니다. 그의 일상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순간은 이웃이 들려주는 이른바 ‘친구한테 들은 괴담’을 듣고 그에 대한 소감을 답하는 시간입니다. 언뜻 분위기 좋은 ‘서로이웃’이 된 듯 보이지만, 다카히로는 대화 도중 사소한 말실수 하나만으로도 언제든 그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는 극도의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카히로와 이웃 외에도 맨션 안팎에선 수시로 괴이들이 출몰하여 도시전설, 전통괴담, 학원괴담 등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분명 괴이들과 특별한 관계로 보이는 다카히로의 고용주의 비밀도 눈길을 끕니다. 말하자면 ‘다카히로와 이웃이 주인공인 괴담’, ‘이웃이 들려주는 괴담 속 괴담’, 그리고 ‘맨션 안팎의 괴이들이 펼치는 괴담’ 등 여러 층의 호러 서사가 겹쳐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입주 조건’은 한 편으로 끝나지 않고 후속작으로 이어집니다. 밝혀지지 않은 비밀, 해소되지 않은 갈등, 의문투성이의 괴담이 수두룩하게 남아있습니다. 삶을 포기하려던 다카히로가 아이러니하게도 괴이인 이웃과의 공동생활을 통해 점차 살아갈 의지를 되찾는 과정도 후속작에서 좀더 세세하게 그려질 것으로 보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소 박한 평점을 준 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입니다. 호러물은 제대로 무서워야 된다는 게 제 개인적인 취향인데, ‘입주 조건’의 경우 무서워질 만하면 현실의 일상으로 돌아가곤 하는 전개 방식이 잘 와 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처럼 스즈키 코지의 정통 호러라든가 세스지와 우케쓰의 ‘서서히 옥죄어드는 특수설정 호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입주 조건’이 다소 싱겁게 읽힐 수도 있지만, 독특한 형식과 서사를 품은 기발한 호러물을 찾는 독자라면 무척 흥미로운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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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혜영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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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카이도 벽촌 마을 출신으로 도쿄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29세 여성 오이시 리키는 생존의 문제를 고민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몰려있습니다. 그러던 중 고액을 보장하는 난자 제공에 대해 들은 리키는 고민 끝에 클리닉을 찾는데, 뜻밖에도 대리출산 제안을 받자 혼란에 빠집니다.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뒤 대리출산을 결정한 구사오케 부부를 만난 리키는 자신이 요구한 터무니없는 금액까지 받아들여지자 결국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서른 살 미만까지만 가능한 난자 제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의 실패 후 가까스로 임신에 성공하지만, 리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것은 물론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최근 1년 동안 장기 프로젝트 때문에 좋아하는 장르물을 읽지 못한 탓에 제 하반기 독서계획은 100여 권에 가까운 국내외 장르물로 가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나 스릴러 요소라곤 전혀 없는 대리모의 이야기를 먼저 읽기로 한 건 순전히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막장 드라마의 단골 설정이기도 하고,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은 소재를 갖고 과연 기리노 나쓰오는 어떻게 독자를 사로잡았을지 무척 궁금해진 것입니다. 또 선택지가 많지 않은 엔딩 가운데 기리노 나쓰오가 고른 카드가 무엇일지,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 지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이야기의 큰 얼개는 특별히 새롭진 않습니다. 대리출산의 당사자들인 오이시 리키와 구사오케 모토이-유코 부부가 ‘제안과 수락, 인공수정 시도와 임신, 그리고 출산’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갈등과 고민, 관계의 변화, 파국의 위기를 겪는 이야기가 때론 담담하게, 때론 극적으로 흘러갑니다. 세 주인공은 상황이 바뀔 때마다 극도의 불안과 동요에 휩싸이고, 롤러코스터마냥 수차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거나 상대의 결정에 동의와 비난을 번갈아 퍼붓습니다.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2세를 갖고 싶은 열망에 휩싸인 남편 모토이, 순조롭게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결국 방관자 또는 제3자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절망하는 아내 유코, 그리고 대리출산 자체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애써 자위하면서도 동시에 임신과 출산에 대한 공포, 그리고 태어난 아이에 대해 스스로 어떤 감정을 갖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리키 등 주인공들의 불안과 동요가 냉정하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 속에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기리노 나쓰오가 적재적소에 배치한 조연들의 각기 다른 입장도 세 주인공의 서사 못잖게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합니다. 대리출산에 반대하는 인물들은 모토이-유코 부부가 “팔 게 없는 여자에게서 자궁과 인생을 착취하는 것”이라며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리키를 만류합니다. 반면, 리키를 ‘출산 기계’정도로만 여기는 인물은 돈으로 리키의 자궁을 산 걸로 모자라 출산 후 그녀의 ‘시한부 모성’까지 사들이려는 파렴치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또, 리키의 처지와 결정에 공감하는 인물들은 그저 그녀의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일련의 과정을 조심스레 지켜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나 메인 스토리만 보면 다소 뻔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굳이 472쪽이나 되는 분량이 필요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기리노 나쓰오는 단 한 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예상 밖의 전개로 독자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곤 합니다. 때론 파격적인 행동과 결정을 주저하지 않는 리키의 행보라든가, 모토이-유코 부부의 느닷없는 변덕과 그로 인한 국면 전환, 그리고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연들의 역할은 금세 그리고 단 한 번에 마지막 장에 이르게 만듭니다.

 

출판사는 “이건 모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홍보했는데, 실제로 여성, 빈곤, 불임, 가부장 등 사회적 서사와 개인의 심리가 복잡다단하게 설정된 작품이긴 해도 그 밑바탕에 깔린 가장 중요한 토대는 역시 ‘모성’이라는 생각입니다. 막장 드라마에서 애용되던 대리출산이라는 소재가 기리노 나쓰오의 손끝에서 진정성 있는 소설로 확장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 역시 ‘모성’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족1.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원제(燕は戻ってこない)의 의미가 궁금했는데, 출판사 소개글 어디에도 그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사족2. p319에서 한 인물이 “그렇겠네. 유코 혼자만 낙동강 오리알이 됐으니.”라고 말하는데, 지문도 아닌 대사에 한국의 고유명사가 들어간 ‘낙동강 오리알’이란 번역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전에 한 일본 미스터리에서 화폐단위를 ‘엔’이 아니라 ‘원’으로 번역해놓은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원작대로 번역하고 각주를 달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족3. 올해(2026년) 초에 프리다 맥파든의 ‘대리모’가 한국에 출간됐습니다. 줄거리는 전혀 모르지만 과연 기리노 나쓰오와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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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안 사이코
버지니아 페이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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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그림월즈에 자리한 파운즈 가문의 저택에 새 가정교사 위니프레드 노티가 도착합니다. 불화와 신경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파운즈 부부, 망나니나 다름없는 13살 드루실라와 8살 앤드루가 노티가 상대할 가족입니다. 하지만 노티가 저택을 찾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도착하던 날, 황무지 너머 저택을 바라보며 노티는 예언하듯 다짐합니다. “세 달 안에 이 집 안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얼마 후부터 저택의 다락방에선 은밀한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하고, 이후 세 달이 흘러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노티는 자신의 다짐대로 무자비한 살육극을 벌입니다.

 


‘빅토리안 사이코’라는 제목 자체가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부조리한 근대성을 상징하는 빅토리아 시대(1837년~1901년)와 사이코패스의 결합은 장르물 독자라면 누구나 솔깃한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첫 페이지 저택의 삽화 밑에 쓰인 “세 달 안에 이 집 안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라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는 이어 황무지에 둘러싸인 음울한 저택, 어둡고 묵직한 색채의 벽과 가구들, 식기장 위에 걸린 가죽이 벗겨진 소의 그림, 음산한 표정의 초상화 등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더욱 불길하게 만듭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작가를 ‘고딕 블랙코미디의 마녀’, 또 이 작품을 ‘어느 가정교사의 잔혹하고도 유쾌한 복수극’이라고 묘사했는데, 대략 절반쯤만 맞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로지 살인에만 골몰하느라 캐릭터가 희박해지는 여느 사이코패스와 달리 노티는 분명 블랙코미디 스타일의 개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행각이 결코 유쾌하다고 볼 순 없기 때문입니다. 잔인하지만 가볍고 웃긴 사이코패스 이야기를 기대한 독자라면 꽤 높은 수위에 놀랄 수도 있는데, 다만 피와 살이 난무하는 끔찍한 상황마저 요리조리 비틀어 묘사하여 결국은 독자를 웃게 만드는 영국식 블랙코미디의 미덕을 확실히 맛볼 수 있는 작품인 건 사실입니다.

 


노티의 현재와 과거, 그녀의 현실과 망상이 불쑥불쑥 교차되며 그려지는 가운데 은밀한 심리묘사까지 곁들여져서 276쪽에 불과한 분량임에도 읽는 데 꽤 시간이 걸립니다. 특히 독자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오히려 더 궁금증만 일으키는 ‘노티의 비밀’에 집중해야 되는데, 일반 장르물처럼 그저 사건의 흐름에만 주목하다 보면 이 작품의 핵심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우선 노티의 ‘동기’가 가장 궁금합니다. 사이코패스에게 ‘논리적이고 이해 가능한 범행 동기’를 묻는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흉기를 거침없이 휘두르며 살의를 내뿜는 노티에겐 더더욱 ‘왜?’를 물을 수 없습니다. 소설가 조예은의 평대로 그녀는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을 잔혹한 사이코패스’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왜?’라는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는데, 실은 노티가 저택의 가정교사가 된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티는 처음부터 “파운즈 씨는 내가 꼭 풀기로 마음먹은 수수께끼다.”라고 밝히는데, 이 미스터리 덕분에 노티의 무차별 살육극 이면의 비밀에 내내 궁금증이 들게 됩니다. 이 궁금증의 힌트는 노티의 과거 속에 숨어있지만, 막판에 그 누구도 눈치 채기 어려운 놀라운 반전을 통해 밝혀집니다.

 

두 번째는 ‘노티의 사이코패스 기질은 타고난 것인가, 키워진 것인가?’입니다. 초반만 해도 타고난 살인마로 노티를 그리던 작가는 조금씩 ‘빅토리아 시대가 키워낸 후천적 사이코패스’로서의 노티를 보여줍니다. 어려서부터 밥 먹듯 살인을 저질렀지만, 죄책감을 느낀 적도, 딱히 쾌감을 만끽한 적도 없는 순도 100%의 사이코패스이자 동시에 “귀족 사회의 위선, 사회 불평등, 약자에 대한 혐오 등 빅토리아 시대의 부조리”가 키워낸 ‘사회파 사이코패스’의 기질이 노티 안에 공존한다는 뜻입니다. 작가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절묘하게 결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희대의 사이코패스 노티에게 빠져들게 만듭니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2026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상영작으로 선정됐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쿠엔틴 타란티노와 코엔 형제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뒤섞인 영화가 아닐까, 추측되는데 올해 한국에서도 개봉된다고 하니 과연 원작의 독특한 분위기가 어떻게 영상으로 만들어졌을지 꼭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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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커레이드 라이프 ㅣ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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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경시청 수사1과 아즈사 경감이 이젠 호텔 코르테시아 도쿄의 보안과장이 된 닛타 고스케를 찾아와 수사협조를 요청합니다. ‘일본 추리소설 신인상’ 최종심사가 호텔에서 열릴 예정인데, 수상이 유력한 작가가 실은 살인사건의 용의자이며, 그가 심사 당일 호텔에 나타나면 바로 연행할 계획이란 것입니다. 호텔리어로 변신했지만 닛타는 아즈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경찰 시절 수도 없이 느꼈던 강렬한 위화감을 품습니다. 한편, 닛타의 심기를 건드리는 수상한 고객들이 호텔에 잇달아 투숙합니다. 평생 닛타를 데면데면 대해온 아버지 가쓰히사, 말 못할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한 모녀, 아즈사가 쫓는 살인용의자를 꼭 닮은 남자, 그리고 그를 몰래 지켜보는 여자 등이 그들입니다.


 

이미 전작인 ‘매스커레이드 게임’에서 예고됐음에도 불구하고, 경시청 형사가 아닌 ‘호텔 보안과장 닛타 고스케’를 보는 일은 몸에 안 맞는 정장을 입은 사람을 지켜보는 듯 영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호텔을 무대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자 예의 형사로서의 촉을 발동하는 그의 모습에서 안도감과 함께 ‘겸업의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시리즈 1~3편이 호텔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이 부각된 액션물 스타일의 미스터리였다면, 전작인 ‘매스커레이드 게임’과 이 작품은 호텔만이 지닌 미스터리 무대로서의 특징뿐 아니라 범죄에 연루된 인물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비극적인 아이러니까지 풍성하게 담고 있어서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휴먼 미스터리를 제대로 진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크게 두 개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하나는 신인상 유력후보이자 살인용의자인 아오키 하루마를 쫓는 닛타와 아즈사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변호사인 가쓰히사가 뜬금없이 아들 닛타가 근무하는 호텔에 투숙하게 된 사연입니다. 닛타는 경시청의 무리한 수사 압박과 출판사의 교묘한 계략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지휘하는 아즈사와 협력하여 아오키 하루마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동시에 어딘가 의심스러운 고객을 살피는 과정에서 아버지 가쓰히사가 호텔에 투숙한 진짜 이유를 눈치 채곤 무려 30년 전에 벌어졌던 집단살인사건의 진상과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진상을 추구하는 건 그런 거다. 그 끝에는 고통밖에 없을지도 몰라. 각오가 없다면 풋내 나는 정의감은 그냥 가슴속에 묻어둬.” (p37)

 

이 말은 변호사였던 가쓰히사가 경찰의 꿈을 품고 있던 고교생 아들 닛타에게 들려줬던 조언입니다. 닛타는 경시청 신참 시절엔 ‘풋내 나는 정의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베테랑 형사를 거쳐 예측불허의 고객들을 상대하는 호텔리어가 된 지금은 그 조언을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가 마주한 두 사건 모두 ‘끝에는 고통밖에 없는 진상’이 기다리고 있지만, 닛타는 신중하고 또 신중한 태도로 사건 자체와 거기에 연루된 인물들에게 다가갑니다. 일부는 자신의 노력과 추리로, 일부는 연루된 자들의 고백으로 진상에 이르긴 하지만, 안타까운 비극에 대처하는 닛타의 성실하고 진정성 담긴 태도는 미스터리의 깊이와 농도를 더욱 깊고 진하게 만듭니다.


 

‘옮긴이의 말’의 부제인 ‘가면을 품고 살아가는 인생’은 이 시리즈의 미덕을 잘 압축해놓았습니다. 소설 속 인물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때로는 가면을 쓰고, 때로는 가면을 벗고 살아갑니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가면의 모양도, 색깔도, 표정도 달라지고, 언제 가면을 벗고 민낯을 드러낼지도 오직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 면에서 인생 자체가 가면무도회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묵직한 주제를 바탕에 깔아놓곤 그 위에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을 구축함으로써 단순히 누가? 왜? 어떻게?, 라는 통속적인 미스터리 이상의 감흥을 이끌어냈다는 생각입니다.

 

일본 기준으로 2011년에 시리즈가 시작되어 2025년까지 다섯 편이 나왔으니, 평균 3년에 한 편 꼴인 셈인데, 과연 닛타 고스케의 여섯 번째 이야기가 이어지긴 할지, 이어진다면 그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독자 앞에 나타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워낙 인물도 많고, 사건에 관한 팩트들도 복잡다단해서 일일이 다 소개하진 못했는데, 동시에 자잘한 소개조차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은 작품이라 가급적 ‘내용’을 다룬 서평들은 읽지 말고 바로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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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커레이드 게임 ㅣ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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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이션 살인, 즉 여러 범인들이 가담한 교환살인으로 보이는 세 개의 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피살자들이 ‘사람을 죽이고도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았던 전과자’라는 공통점이 드러나면서 경시청 수사1과 닛타 고스케는 과거 사건 피해자 유족들의 사적 복수를 의심합니다. 그런 가운데 유족들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에 일제히 투숙하자 경시청은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질 거란 확신을 품곤 닛타를 포함한 대규모 인원을 위장 잠입시킵니다. 하지만 유족들은 만나기는커녕 서로를 모르는 척 할뿐이고, 딱히 범행을 모의하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동시에 투숙한 이유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닛타는 생각지도 못한 난관 때문에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시리즈 프리퀄인 2편 ‘매스커레이드 이브’를 제외하고) 세 번째로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의 프런트 직원으로 위장 잠입한 덕분에 이제 형사 못잖게 호텔리어로서의 품격까지 갖춘 닛타 고스케. 하지만 가족을 참혹하게 잃은 유족들이 터무니없이 가벼운 처벌을 받았던 가해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사적 복수이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마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전작에서 잠시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을 떠났던 베테랑 호텔리어 야마기시 나오미는 총지배인의 요청으로 긴급히 복귀하여 닛타의 수사를 돕습니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간파할 수 있게 된 닛타와 나오미지만, 역시 ‘고객의 가면을 지키려는 호텔리어’와 ‘그 가면을 벗겨내 진상을 캐내려는 형사’로서의 갈등은 여전합니다.

 

닛타와 나오미 외에 독자의 주목을 끈 인물은 경시청 수사1과 팀장인 아즈사 경감입니다. 남녀차별이 횡행하는 경시청에서 오로지 능력으로 팀장 자리에 오른 아즈사는 닛타와는 사건을 대하는 태도, 수사 기법, 정의감 등 여러 면에서 대립하는 인물로, 결과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주 형사입니다. 호텔에서의 위장 잠입 수사라는 특별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즈사는 닛타와 번번이 대립하며 무리수를 두는데, 대부분의 독자는 그런 아즈사가 닛타에게 제대로 한 방 먹겠구나, 기대를 하게 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뜻밖의 전개를 통해 닛타와 아즈사만의 흥미로운 서사를 이끌어냅니다.

 

단순한 교환살인이 아니라 여러 인물이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 로테이션 살인, 피해자 유족에게 큰 상처를 남긴 사법부의 부당하고 가벼운 형량, 그로 인해 빚어지고 만 사적 복수, 그리고 언제나 무거울 수밖에 없는 속죄와 용서라는 주제 등 ‘매스커레이드 게임’은 앞선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제 취향에 맞는 소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히가시노 게이고 표 정통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진범의 정체와 동기가 드러나는 대목에선 지금까지 읽은 사적 복수 미스터리의 결말과는 사뭇 다른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며 눈가가 뜨끈해질 정도였습니다. 또한 앞선 작품들이 호텔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강조한 액션 스릴러 스타일의 미스터리였다면, ‘매스커레이드 게임’은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집요하게 그린 덕분에 몰입감이 훨씬 더 강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편인 ‘매스커레이드 나이트’의 서평에 “닛타 역시 새로운 모습을 보이거나 새로운 상황에 부딪힐 때가 된 듯해서, 다음 작품에선 과연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궁금해집니다.”라고 쓴 적 있는데, 이야기 막판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변화가 닛타에게 찾아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작품 이후 3년이 지나 출간된 최신작 ‘매스커레이드 라이프’(일본 2025년, 한국 2026년 출간)에선 그런 큰 변화를 겪은 닛타의 전혀 새로운 모습이 그려질 텐데, 과연 닛타와 나오미가 어떤 사건과 위기를 다시 한 번 함께 헤쳐 나갈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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