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입주 조건 : 옆집에 사는 이웃과 반드시 친하게 지내세요
네후네 하야세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6년 5월
평점 :
살아갈 의지와 희망을 포기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스무살 다카히로는 우연히 발견한 구인 광고에 사로잡힙니다. “지금 당장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사람 모집 중! 월급 15만 엔~”이라는 문구와 함께 광고가 내건 유일할 고용 조건은 ‘지정한 맨션에 입주하여 옆집의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것’. 그런데 맨션 702호에 입주한 다카히로를 기다리는 이웃은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대롱 같은 긴 입과 그 끝에 달린 눈알, 시커멓게 짓무른 손가락 등 괴이 그 자체인 이웃은 늘 “이건 친구한테 들은 얘기인데.”라며 이런저런 괴담을 들려주곤 “무서웠어?”라고 꼭 확인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카히로는 이미 23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702호를 거쳐 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호러물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꽤 읽었다고 생각해왔는데, ‘입주 조건’은 기존의 그 어느 호러물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독특한 형식에 특이한 인물들을 그리고 있어서 읽는 내내 굉장히 생경한 느낌이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살을 좀 붙이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이웃의 기묘한 공동생활을 그린 일상 호러’인데, 그렇다고 해서 유쾌하거나 가벼운 톤의 호러물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과 비현실이 묘하게 뒤섞여서 괴담의 색채와 농도를 독특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정체 자체가 의심스러운 10층짜리 쥐색 외관의 맨션은 4층까지는 평범함 그 자체지만, 5층부터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뿜습니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서 정원 초과 벨이 울리는가 하면, 우편함엔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이 종종 들어가 있기도 하고, 어떤 층은 밤이고 낮이고 인적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시도 머물지 못하고 도망치고도 남을 만한 곳입니다.
하지만 다카히로는 앞서 702호에 머물다가 사라진 23명과 달리 이웃의 괴이와 아슬아슬한 공존을 유지합니다. 당초 입주 조건인 ‘옆집에 사는 이웃과 반드시 친하게 지내세요’를 충실히 지키며, 인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합니다. 그의 일상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순간은 이웃이 들려주는 이른바 ‘친구한테 들은 괴담’을 듣고 그에 대한 소감을 답하는 시간입니다. 언뜻 분위기 좋은 ‘서로이웃’이 된 듯 보이지만, 다카히로는 대화 도중 사소한 말실수 하나만으로도 언제든 그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는 극도의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카히로와 이웃 외에도 맨션 안팎에선 수시로 괴이들이 출몰하여 도시전설, 전통괴담, 학원괴담 등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분명 괴이들과 특별한 관계로 보이는 다카히로의 고용주의 비밀도 눈길을 끕니다. 말하자면 ‘다카히로와 이웃이 주인공인 괴담’, ‘이웃이 들려주는 괴담 속 괴담’, 그리고 ‘맨션 안팎의 괴이들이 펼치는 괴담’ 등 여러 층의 호러 서사가 겹쳐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입주 조건’은 한 편으로 끝나지 않고 후속작으로 이어집니다. 밝혀지지 않은 비밀, 해소되지 않은 갈등, 의문투성이의 괴담이 수두룩하게 남아있습니다. 삶을 포기하려던 다카히로가 아이러니하게도 괴이인 이웃과의 공동생활을 통해 점차 살아갈 의지를 되찾는 과정도 후속작에서 좀더 세세하게 그려질 것으로 보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소 박한 평점을 준 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입니다. 호러물은 제대로 무서워야 된다는 게 제 개인적인 취향인데, ‘입주 조건’의 경우 무서워질 만하면 현실의 일상으로 돌아가곤 하는 전개 방식이 잘 와 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처럼 스즈키 코지의 정통 호러라든가 세스지와 우케쓰의 ‘서서히 옥죄어드는 특수설정 호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입주 조건’이 다소 싱겁게 읽힐 수도 있지만, 독특한 형식과 서사를 품은 기발한 호러물을 찾는 독자라면 무척 흥미로운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