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이동윤 옮김 / 푸른숲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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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피터 스완슨은 2016년 한국에 소개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하 ‘죽마사’, 원제 The Kind Worth Killing, 2015년)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가입니다. 13살 때부터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완벽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여주인공 릴리 킨트너의 맹활약(?)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7년 만에 그 후속작인 ‘살려 마땅한 사람들’(원제 The Kind Worth Saving, 2023년)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살려 마땅한 사람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러 인물이 화자를 맡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작에서 연쇄살인 용의자 릴리 킨트너를 추격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만 형사 헨리 킴볼(이 작품에선 사립탐정)이 메인 화자를 맡았고, 30대 중반이 된 릴리 킨트너는 킴볼을 도와 자신의 능력을 또 한 번 유감없이 발휘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 외에도 10대 시절부터 비밀 친구가 되어 수차례에 걸쳐 완벽한 살인을 저질러온 남녀가 중요한 화자로 등장합니다.

‘죽마사’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연쇄살인마 릴리 킨트너의 통쾌하고 속 시원한 폭주 스토리였다면, ‘살려 마땅한 사람들’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심리스릴러의 면모를 갖춘 작품입니다. 사건 자체보다는 각 인물들의 심리와 동기가 강조되고 있고, 킴볼과 릴리가 상대해야 할 범인이 일찌감치 노출되기 때문에 ‘왜?’와 ‘어떻게?’에 서사가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전작에서 릴리를 쫓던 형사 킴볼은 이제 고만고만한 사립탐정이 돼있습니다. 소소한 일거리 외에 무기력한 삶을 살던 킴볼은 과거 딱 1년 동안 재직했던 교사 시절의 제자 조앤이 나타나 남편의 불륜을 입증해달라는 의뢰를 하자 당혹감 속에서도 일을 맡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킴볼의 조사는 개운치 못한 상태에서 마무리되고 맙니다. 끝내 의심을 지우지 못한 킴볼은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릴리를 찾아가 의견을 나눈 끝에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대목이 여러 곳이라 애매한 줄거리 요약이 되고 말았는데, 킴볼과 릴리의 미묘한 관계 역시 ‘죽마사’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더는 자세히 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큰 뼈대는 오래 전부터 잔인하고 교묘하게 살인을 저질러온 두 남녀의 행각을 킴볼과 릴리가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사실 두 남녀의 행각도 그렇고 킴볼과 릴리의 조사 과정 역시 스펙타클하거나 반전이 거듭되는 숨 가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차분한 전개 속에 각 인물들의 심리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작품입니다. ‘죽마사’의 속사포 같은 서사를 기대한 독자라면 초반에 다소 처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차 고조되는 긴장감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실에 다가가는 킴볼과 릴리의 조사,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완벽하게 살해해온 두 남녀의 뒤틀린 심리와 공포, 그리고 킴볼에게 닥치는 거대한 위기와 릴리의 끝내주는 마지막 한 방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완만한 전개 속에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죽마사’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죽마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랄까요?

 

‘죽마사’ 이후 피터 스완슨의 팬이 되어 지금까지 한국에 출간된 작품들을 전부 읽었지만 매번 아쉬움을 느껴온 게 사실입니다. 데뷔작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인데, ‘살려 마땅한 사람들’ 역시 릴리의 대폭주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탓인지 살짝 아쉽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그래도 애착 캐릭터 중 하나였던 릴리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릴리 킨트너 시리즈’가 세 번째 작품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카메오로라도 좋으니 피터 스완슨의 다른 작품에서 한번쯤은 재회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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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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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을 지금까지 책으로 읽지 않은 건 20여 년 전 히로스에 료코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를 너무나도 인상 깊게 봤기 때문입니다. 매체를 불문하고 먼저 인상 깊게 보고나면 다른 매체로는 도무지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곤 하는데, ‘비밀’은 주룩주룩 눈물을 흘려가며 봤을 정도로 영화가 매력적이어서 그동안 계속 원작을 외면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지 20년도 넘은데다 왓차에 올라온 ‘비밀’의 포스터를 보니 새삼 원작이 궁금해지기도 했고, 좋아하는 번역가 양윤옥의 번역으로 2021년에 재출간됐음을 우연히 알게 돼서 큰맘 먹고 원작 읽기에 나서게 됐습니다.

 

평범한 가장 스기타 헤이스케의 삶이 하루아침에 붕괴됩니다. 한겨울에 일어난 비극적인 버스 사고로 인해 아내 나오코가 사망하고 딸 모나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긴 했지만 식물인간 상태가 됐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나미가 의식을 되찾자 스기타는 감격하지만 이내 모나미의 몸에 깃든 영혼이 아내 나오코라는 것을 깨닫곤 경악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채 스기타는 딸의 몸에 깃든 나오코와 일상을 꾸려가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당하지 못할 혼란에 휩싸이고 맙니다. 동시에 스기타는 사고버스의 운전자 유족과 인연을 맺은 뒤로 사고 이면의 기구한 사연을 접하게 됩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인연이지만 스기타는 그를 통해 버스 사고의 진실을 접하곤 말할 수 없는 회한에 잠깁니다.

 

11살 딸의 몸에 깃든 36살 아내의 영혼과의 동거는 스기타에게 여러 가지로 곤혹스러운 상황을 안겨줍니다. 참담할 정도로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3자, 즉 독자가 볼 때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해프닝들이 연이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분명 대화를 나누고 밥을 함께 먹는 상대가 아내의 영혼이긴 하지만 어쨌든 눈에 들어오는 외관은 11살 딸이기 때문에 잠자리를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 귀여운 초등학생이던 모나미가 중고교에 진학하면서 어느 새 자신이 나오코임을 잊은 듯 에너지 넘치는 10대의 모습을 보이며 남학생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스기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을 자아내는 장면들입니다. 아빠이면서 아빠가 아닌, 남편이면서 남편이 아닌 스기타의 처지는 그야말로 난감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나오코가 진심으로 ‘모나미’로서 새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자 스기타의 감정은 단순한 질투를 넘어 집착과 분노에 이릅니다. 더구나 나오코는 이제 ‘스기타의 아내’가 아니라 ‘모나미’로서 살아가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스기타는 더욱 더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몸의 성장과 함께 조금씩 변해가는 나오코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스기타의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기복에 할애됩니다. 뜻하지 않게 10대로서 새롭게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나오코의 기대와 동요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집니다. 그런 면에서 ‘비밀’은 빙의를 소재로 한 극적인 가족소설 혹은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막판의 두 차례의 큰 반전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에서 맛볼 수 있는 특유의 충격과 감동이 곁들여져 있어서 “똑같은 소재를 갖고도 이렇게 요리할 수 있다니!”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대목입니다. 행복하다고 할 순 없지만 나름 안정을 되찾은 듯한 스기타가 연이어 뒤통수를 맞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압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기타-나오코-모나미의 이야기와 함께 병행되는 건 사고버스 운전자의 유족과 스기타가 맺은 불편하면서도 운명적인 인연입니다. 이 인연은 특별한 반전이나 사건을 포함하진 않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非미스터리 작품에서 종종 느낄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참사를 일으키고 본인도 현장에서 사망한 버스 운전자의 사연, 그의 유족이 감당해야 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그 유족과 이어진 또 다른 가족의 오래된 비밀은 스기타-나오코-모나미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이어지면서 따뜻한 엔딩을 맞이합니다.

 

20년도 넘은 기억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영화는 원작소설을 큰 폭으로 각색한 것 같습니다. 분명 큰소리로 웃으면서 보다가 마지막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던 영화에 비해 원작소설은 많은 부분에서 감정적으로 정제된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새삼 왓차에 올라온 ‘비밀’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20여 년 전처럼 ‘웃다가 주룩주룩’하게 된다면 역시 제겐 소설 ‘비밀’보다는 영화 ‘비밀’이 더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게 될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다 읽고도 이 작품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이유나 인터넷서점에서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되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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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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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獨蘇)전쟁은 2차 대전 중이던 1941~1945년에 벌어진 독일과 소련의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자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돼있습니다. 4년 가까운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은 900만 명, 소련은 2,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이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소련의 여성 저격수 세라피마와 그녀의 동료들이 겪은 지옥도와도 같은 참상을 그린 반전소설이자 여성소설입니다.

 

주민 40여 명의 작은 마을 이바노프스카야가 독일군에 의해 몰살당합니다. 눈앞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한 18살 소녀 세라피마는 저격병 훈련교관 이리나에 의해 구조된 뒤 저격병 훈련을 받게 됩니다. 세라피마는 침략자인 독일에 대한 복수는 물론 어머니를 죽인 독일 저격수 한스 예거, 자신을 구해줬지만 어머니의 시신을 모욕하고 마을을 불태운 교관 이리나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훈련에 몰두합니다. 고된 훈련 끝에 ‘저격병여단 제39독립소대’가 된 세라피마와 동료들은 스탈린그라드 탈환 작전을 시작으로 죽음이 지천에 널린 전쟁에 투입됩니다.

 

“나는 이리나를 따라 살인자가 되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나는 살아가는 의미를 얻기 위해 복수를 갈망했다. 전부 틀렸다. 죽이기를 거절하고 살아가는 삶, 그쪽을 선택하는 길이 눈앞에 있었다.” (p509)

 

외교관을 꿈꿨지만 저격병이자 ‘살인자’가 되고만 세라피마의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그 어떤 픽션보다도 묵직하고 가슴 아프게 읽힙니다.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은 뒤 동료를 지키고 여성을 지키고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저격병이 된 세라피마는 숱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습니다.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전쟁의 화마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웃으면서 적병을 쏘고, 죽인 적의 숫자를 자랑하듯 떠벌리며 살인을 즐기는 괴물이 돼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괴물이 아니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에 세라피마의 혼란은 더욱 더 극심해집니다.

 

또한 저격 말고는 어떠한 능력도 없는데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마을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세라피마는 애초 자신이 왜 저격병이 됐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진 채 허우적댑니다. 세라피마의 혼란과 회의와 절망은 너무나도 생생한 전쟁 장면 묘사 덕분에 마치 독자 자신이 겪는 것처럼 절절하게 피부에 와닿습니다. 새삼 전쟁의 비극이란 것이 얼마나 깊고 지독한 것인지 깨닫게 되면서 말입니다.

 

전쟁의 화마에 휘말려 삶이 붕괴된 한 저격병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여성소설로서의 미덕도 갖추고 있습니다. 작가 스스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속 500명 이상의 여성 병사들의 증언을 읽고 그것을 모티브로 삼았다.”라고 밝힌 것처럼, 이 작품에는 여성만이 감내해야 하는 전쟁의 참극이 다양하게 묘사돼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여성을 약탈과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전쟁의 악마성은 80여 년 전에는 훨씬 더 날것 같은 잔인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짓밟히는 사람부터 살아남기 위해 적군의 연인이 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세라피마의 눈을 통해 전쟁이 여성에게 가한 갖가지 비극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물론 ‘마녀부대’로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친 세라피마와 동료들 역시 여성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에 수시로 내몰리곤 합니다. 그래선지 “여성은 약자가 아니라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저격병이 됐다.”고 당당하게 밝힌 세라피마의 동료 샤를로타의 일성은 지금도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전쟁의 참상, 그 안에서 똑같이 적군을 죽이고도 유독 ‘살인자’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저격수의 운명,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옥과도 같은 전쟁의 한복판을 가로질러야만 했던 한 소녀의 비극.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쟁의 또 다른 민낯을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만은 절대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에 그려진 비극은 그 전쟁들 속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작은 메아리에 불과하겠지만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가 전하는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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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개미지옥
모치즈키 료코 지음, 천감재 옮김 / 모모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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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부터 성매매를 일삼아온 20대 여성 두 명이 연이어 살해당합니다. 수사본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 식품회사에 “세 번째 희생자를 내기 싫으면 2억엔을 준비하라.”는 협박문이 도착합니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던 두 사건 사이에 접점이 생기자 수사는 오히려 더 큰 혼선을 빚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인 기베 미치코는 자신이 취재해오던 식품회사 협박 건 때문에 성매매 여성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게 됐고, 특유의 부지런함과 촉을 발휘하여 수사본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건 이면의 진실을 하나하나 밝혀냅니다.

 

2013년 ‘대회화전’, 2014년 ‘신의 손’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모치즈키 료코의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흥미롭게 읽어서 그 뒤로 신작을 기대했었는데, 무려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새 작품을 만나게 됐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읽고서야 이 작품이 ‘기베 미치코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일본출간 2018년)이란 걸 알게 됐는데, 2014년에 한국에 소개된 ‘신의 손’이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일본 출간 2004년)이라고 합니다. 다른 작품들도 한국에 꼭 소개됐으면 좋겠는데, 다소 무겁고 어두운 소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한국 독자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인 기베 미치코가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과 협박사건을 취재하며 진상을 파헤친다는 게 큰 줄기이긴 하지만, 작가는 기베 미치코를 슈퍼 히로인으로 묘사하지도, 자칫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를 흥미 위주의 미스터리로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읽는 동안 소설이라기보다 르포에 가깝다는 인상을 자주 받을 정도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합니다. 또한 성매매, 아동학대, 빈곤 등 사회적 문제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서 주인공 기베 미치코가 어떤 진상을 밝혀내든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으로 보이는 일군의 인물들을 공개합니다. 어떻게든 양지로 나가고 싶었지만 빈곤과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막장에 갇힌 요시자와 스에오, 번듯한 의사 집안의 장남이자 명문대 학생이지만 도박과 폭력과 기행에 빠진 반사회적 인물 하세가와 쓰바사, 성매매를 일삼으면서 숱한 인간들에게 무시와 경멸을 받지만 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어 보이는 노가와 아이리, 그리고 조폭 출신처럼 보이는 불량배 산토 가이토가 그들입니다.

작가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이른바 ‘개미지옥’(원제 ‘蟻の棲み家’는 ‘개미가 사는 집’이란 뜻입니다), 즉 아무리 탈출하려 발버둥 쳐도 더 깊은 수렁으로 가라앉기만 하는 지독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독자 입장에선 ‘누가 범인인가?’보다도 개미지옥의 참상에 더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미스터리 소설보다는 르포에 가깝게 읽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이런 점이라는 생각입니다.

 

“될 수 있으면 모르고 지나치고 싶은 일,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을 독자의 목덜미를 붙잡고 억지로 눈앞에다 들이민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기베 미치코 시리즈’는 지독한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출생지, 개미지옥’ 역시 결코 뒷맛이 개운한 작품은 아니지만, 읽고 돌아서면 금세 기억에서 휘발되고 마는 가벼운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작가가 그린 개미지옥은 비록 ‘나의 일’은 아닐지라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래서 외면하고 무시할 수만은 없는 명확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 ‘기베 미치코 시리즈’ (원제, 일본 출간년도)

1. 신의 손 (神の手, 2004, 한국 출간)

2. 살인자 (殺人者, 2004)

3. 저주인형 (呪い人形, 2004)

4. 부엽토 (腐葉土, 2013)

5. 출생지, 개미지옥 (蟻の棲み家, 2018, 한국 출간)

6. 들불의 밤 (野火の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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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걸 배드 걸 ㅣ 스토리콜렉터 106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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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혹한 범죄가 벌어진 현장에서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어린 소녀가 발견된다. 6년 후, ‘이비 코맥’이라는 이름으로 소년원에 수감돼있는 소녀는 법적으로 성인임을 인정받아 소년원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그때 사이러스 헤이븐이라는 경찰 심리학자가 나타나 이비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소녀의 특별한 능력에 관심을 가진 그의 도움으로 이비는 마침내 소년원을 벗어난다. 그렇게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한편, 15세 소녀 조디 시핸이 숲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곧 체포되지만, 사이러스는 의구심을 품고 조디 시핸의 가족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인다. 이비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사용해 그를 도우려 하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굿 걸 배드 걸’은 마이클 로보텀이 새롭게 런칭한 ‘사이러스 헤이븐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조 올로클린 시리즈’ 역시 임상심리학자가 경찰을 도와 사건을 해결하는 스릴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주조연의 직업과 캐릭터는 물론 서사 역시 큰 틀에서 비슷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큰 차이점이라면 사이러스의 파트너 역할을 맡게 된 정체불명의 소녀 이비 코맥의 존재입니다. 끔찍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그녀는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난독증에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소년원에서도 위험한 인물로 분류돼있습니다. 심리학자인 사이러스의 관심을 끈 건 이비가 ‘진실 마법사’, 즉 상대방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신이 참혹한 가족사 – 약에 취한 형이 부모와 여동생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 를 지닌 사이러스는 이름도, 나이도, 가족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비에게서 연민 이상의 ‘공통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한 사이러스는 이비를 소년원에서 빼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정상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려 합니다.

 

사이러스와 이비의 기묘한 동거와 탐색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15세 소녀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병행됩니다. 지역사람 모두가 사랑스러운 소녀이자 유망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칭송하던 조디의 잔혹한 죽음은 큰 충격을 몰고 옵니다. 용의자가 금세 체포되긴 하지만 사이러스는 심문 영상을 지켜보던 중 의구심을 품게 되고, 소녀의 가족과 지인에 대한 탐문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이비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 자신이 유능한 심리학자지만 ‘진실 마법사’라 불릴 정도로 촉이 뛰어난 이비의 거짓말 탐지 능력은 사이러스에게 큰 힘이 돼줍니다.

 

유일하게 중도 포기했던 ‘완벽한 삶을 훔친 여자’를 제외하곤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은 ‘조 올로클린 시리즈’와 스탠드얼론 모두 높은 평점을 주며 재미있게 읽어왔습니다. 새로운 시리즈의 런칭이라 기대감이 너무 높았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굿 걸 배드 걸’은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량 면에서 살짝 아쉬움이 남은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이다 보니 두 주인공의 캐릭터 설명과 관계 설정에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됐습니다. 살인사건은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해결되긴 하지만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비해 다소 단선적인 구성이라 긴장감을 극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물론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이러스와 이비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궁금증과 긴장감을 자아내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읽게 만들지만 말입니다.

 

끔찍한 과거사와 트라우마는 물론 상대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통점을 지닌 사이러스와 이비의 콤비 플레이는 이미 3편까지 나와 있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비의 과거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 몇 가지를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이러스가 조 올로클린의 제자라는 에필로그의 한 줄을 통해 어쩌면 후속작에서 조 올로클린이 ‘특별출연’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갖게 만듭니다. 이 두 가지 점 때문에라도 후속작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한 가지만 더 바란다면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될 사건들이 조금은 더 세고 독했으면 하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마이클 로보텀다운 스릴러를 만끽하고 싶은 작은 욕심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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