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협주곡 ㅣ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5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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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던 30년 전 어린 소녀를 토막 살해하여 ‘시체배달부’라는 별명을 얻었던 변호사 미코시바 레이지를 징계하라는 일반인들의 청구가 봇물처럼 쏟아집니다. 하지만 미코시바는 오히려 그들을 향해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합니다. 그런 와중에 사무소 직원 구사카베 요코가 갑자기 연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더구나 흉기에서 그녀의 지문이 발견된 탓에 곧바로 구치소에 수감되고 맙니다. 미코시바는 “자네가 살인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반드시 꺼낸다.”는 말과 함께 조사를 시작하지만 이내 자신이 요코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녀에게 누명을 씌운 자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요코의 과거를 캐던 미코시바는 그녀가 30년 전 자신이 토막살인을 저질렀던 곳에 살았던 사실을 알아내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시체배달부’였던 미코시바의 캐릭터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인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론 더는 그 과거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계속 그 과거에만 함몰된다면 어떤 사건이 등장하든 동어반복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2019년에 출간된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악덕의 윤무곡’을 읽고 쓴 서평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때만 해도 진심으로 더는 과거와 얽히지 않은 사건들을 다루기를 바랐지만, ‘복수의 협주곡’을 읽고 나니 실은 이 시리즈 자체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갱생과 속죄를 다룬 하나의 거대한 서사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즉 그의 과거가 얽히지 않은 사건은 이 시리즈에서 다룰 이유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30년 전 그가 저지른 토막살인이 그 어느 때보다 정면으로 다뤄진 ‘복수의 협주곡’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줬습니다.

 

미코시바의 미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블로그를 통해 일반인들을 끌어 모아 자신을 징계하라고 청구한 블로거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징계청구자 전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익명을 이용하여 제멋대로 선의니 정의니 떠드는 자들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것은 물론 현실적인 이익까지 얻어내려는 미코시바다운 대응입니다. 또 하나는 살인혐의로 체포된 사무소 직원 구사카베 요코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유일무이한 직원이지만 미코시바는 그녀에게 조금도 사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직원할인’을 받을 수 있는 의뢰인으로만 취급할 뿐입니다. “자네가 살인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반드시 꺼낸다.”는 건 그녀를 아끼고 지켜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평소 의뢰인을 대하는 미코시바의 태도이기 때문에 나온 말일 뿐입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미코시바를 당황하게 만든 건 자신이 요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의 고향도, 가족도, 살아온 이력도 전혀 몰랐던 미코시바는 누명을 씌울 만큼 원한 관계에 있는 자를 찾아내기 위해 요코의 과거를 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알게 된 그녀의 과거 – 30년 전 자신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점 - 는 미코시바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요코의 과거를 캐는 일은 곧 자신이 30년 전에 저지른 토막살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요코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미코시바가 품은 의문은 거의 마지막 장에 가서야 풀리는데, 그 해답 역시 미코시바를 꽤나 놀라게 만듭니다.

 

요코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은 다소 싱겁게 전개되고, 미코시바의 추리도 홀로 폭주하는 경향이 있어서 막판에 힘이 살짝 빠진 건 사실이지만, 미코시바가 지목한 진범의 정체는 다시 한 번 독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갱생과 속죄를 다룬 하나의 거대한 서사’라는 점을 절감하게 만듭니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미코시바의 탐문과 조사는 실은 30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사건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스런 과정이었고, 요코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또 하나의 속죄의 계단을 올랐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사는 단순하지만 속죄라는 주제는 그 어느 작품보다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2023년 3월에 일본에서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 ‘살육의 광시곡’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노인 요양센터에서 9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최악의 피고를 변호한다는데 과연 어떤 접점을 통해 미코시바의 속죄와 연결될지 쉽게 예상하기가 어렵습니다. 늦어도 내년 하반기에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빨리 출간되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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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의 살인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이수은 옮김 / 창심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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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화장실에서 6세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고교생으로 밝혀지자 일본 전역은 경악합니다. 이후 소년A라는 익명으로만 보도되던 범인의 이름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한 주간지를 통해 공개됩니다. SNS에서는 범인 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과 주거지를 추적하는 광기 서린 폭주가 이어집니다. 그런 와중에 상상치도 못한 피해를 입은 자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범인과 이름이 똑같은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입니다. 단지 이름이 같을 뿐이라고, 기분이 좀 나쁠 뿐이라고만 여겼던 그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크고 작은 피해가 벌어지자 격분합니다. 그리고 불과 7년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언론에 회자되자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은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고 진범의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심합니다.

 

대부분의 이름이 세 글자뿐인 한국에는 워낙 동성동명인 경우가 많아 이 작품의 설정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명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가진 경우 보통사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유명 드라마의 주인공과 (성은 달랐지만) 이름 두 글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만일 연쇄살인범이나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인물과 이름 석 자가 모두 같다면 그 난감함과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프로축구 선수를 꿈꾸는 유망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야간고등학생, 건실한 영업사원, 개인 과외교사, 만화와 게임에 빠진 오타쿠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은 6세 소녀 살인사건의 범인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크고 작은 좌절을 겪게 됩니다. 주위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의 진로가 완전히 틀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잊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의 인생은 또다시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제안으로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살인범과 이름이 똑같다는 이유로 현실과 SNS에서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동성동명 등장인물들이 겪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그려나간다.”라고 돼있는데, 작품 속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이 겪는 건 단지 놀림과 조롱이 아니며 이야기 역시 결코 흥미롭거나 가볍지 않습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자신들이 ‘살인마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아님을 입증하고 싶을 정도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SNS의 마녀사냥은 그칠 줄 모르는데다 부정확한 정보로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일까지 반복되면서 그들은 마녀사냥이 언제든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사실 초반만 해도 “무슨 이야기로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채우려나?”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하겠다!”는 피해자 모임의 목표도 단선적으로 보였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울 재료들도 딱히 충분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인물’이라는 점을 잘 활용하여 예상치 못한 트릭과 반전을 수시로 끌어냅니다. 또한 피해자 모임 내부에도 시한폭탄 같은 장치를 심어놓아 서로를 100% 믿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거듭된 반전을 통해 독자를 이리저리 뒤흔들면서 앞선 페이지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앞서 한국에 소개된 시모무라 아쓰시의 전작 ‘시체 찾는 아이들’과 ‘생환자’를 모두 읽었지만 이만한 트릭과 반전을 맛본 적이 없어서 무척 의외였고 놀라웠습니다. 아이디어와 서사 모두 기발하고 탄탄해서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모두 23편의 작품을 출간한 걸로 나오는데 어쩌면 아직 한국에 그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머잖아 그의 또 다른 작품이 한국 독자들을 찾아오기를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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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 2023 제17회 ㅣ 나비클럽 소설선
박소해 / 나비클럽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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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름만 들어왔던 ‘황금펜상 수상작품집’을 처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한 해 동안(2022년 11월~2023년 10월) 문예지와 단행본에 발표된 단편 추리소설 가운데 수상작과 우수작을 뽑은 작품집으로 한국 추리소설의 현 주소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아직 그 이름이 생소한 작가들부터 서미애, 홍정기, 송시우 등 낯익은 작가까지 포진해있어서 예전에 유명작가와 신인작가들의 작품을 동시에 맛볼 수 있었던 황금가지의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수상작인 박소해의 ‘해녀의 아들’은 팔순이 넘은 한 해녀의 죽음에서 출발하여 그녀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70여 년 전의 비극 ‘제주 4.3사건’을 재조명한 작품입니다. 여전히 그 상처가 현재 진행형인 역사적 비극을 미스터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 있는 작업으로 보였습니다. 미스터리 자체는 복잡하거나 정교하게 설계되진 않았지만 과거와 현재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러 인물들의 심리가 돋보인 작품입니다. 그 외의 우수작들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①서미애 ‘죽일 생각은 없었어’

독초를 기르던 할머니 품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누구에게나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라는 말을 마음에 새겼던 주희는 어른으로 성장하며 ‘본투킬 살인마’로 진화합니다.

→ 냉정과 열정을 모두 갖춘 여성 빌런 ‘주희’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기대됨.

 

②김영민 ‘40피트 건물 괴사건’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인적이 사라진 마을에 도착한 대학 사진클럽 멤버들은 기괴하게 생긴 건물에서 중년여자의 시신을 발견하곤 각자의 방식으로 추리를 전개시킵니다.

→ 초반 설정은 흥미롭지만 다소 아쉬웠던 미스터리의 해법과 엔딩.

 

③여실지 ‘꽃은 알고 있다’

다양한 꽃과 식물이 자라는 마당 딸린 집. 히키코모리이자 불치병 환자인 ‘나’와 그 가족들은 그곳에서 점차 몰락과 붕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 스티븐 킹의 공포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불온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는 이야기.

 

④홍선주 ‘연모’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한 여고생과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교생이 9년 만에 재회하여 벌이는 로맨스 심리극입니다.

→ 사이코패스의 새로운 면모를 맛볼 수 있었던 작품.

 

⑤홍정기 ‘팔각관의 비밀’

대기업 회장 박순찬의 생일잔치 도중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참석자들은 모두 죽은 자에게 살의를 품고 있었고, 현장은 기이한 형태의 팔각관이어서 진범을 특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 ‘십각관의 비밀’을 떠올리게 하는 미스터리. 단편보다는 장편에 어울리는 설정.

 

⑥송시우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한 초등학생이 납치 살해당한 뒤 손목이 사라진 채 발견됩니다. 유력한 용의자가 범행을 부인하는 가운데 이른바 ‘자기 캐릭터 커뮤니티’라는 온라인 역할극이 수사진의 관심을 끕니다.

→ 역시 단편보다는 장편에 어울리는 미스터리. 서사도 탄탄하고 미스터리도 쫄깃.

 

단편 특유의 맛과 다양한 소재 덕분에 꽤 풍성한 식탁이 차려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아쉬움이 좀 많이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추리문학상’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을 법한 미스터리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쉽거나 평범해 보였고 때론 수상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추리보다는 스릴러나 서스펜스로 분류될 작품이 적지 않았던 것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하지만 장편으로 확대하거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수록작도 있었는데, 송시우의 ‘알렉산드리아의 겨울’과 서미애의 ‘죽일 생각은 없었어’는 작가의 내공과 함께 흥미진진한 서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여러 작가의 작품이 함께 수록된 수상집이라 한 편 한 편 긴 코멘트를 달기는 어려워서 전체적인 인상밖에 언급할 수 없었지만, 애초 가졌던 “한국 추리소설의 현 주소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기대에는 조금은 부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내년 이맘때 출간될 18번째 수상집에서는 좀더 탄탄하고 신선한 미스터리 단편들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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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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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반 13년차 정연우는 후배 김상혁과 함께 폐광과 항구의 도시인 선양으로 향합니다. 지역 유지이자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던 에덴종합병원 원장 차요한이 기괴한 방식으로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병원 관계자의 지문이 묻은 살해도구가 금세 발견되자 관할서는 그를 체포하지만 정연우는 진범이 따로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편 변호사 차도진은 익명의 편지를 받고 충격에 빠집니다. “선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변호할 것. 안 그러면 15년 전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겠다.”는 그 메시지는 과거를 묻고 살아온 도진을 공포에 빠뜨립니다. 도진을 더욱 놀라게 한 건 선양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다름 아닌 아버지 차요한이란 사실입니다.

 

15년 전,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게 된 탓에 비극적인 사태를 맞이했던 도진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15년이 지나 그 사태를 야기한 자들을 향해 끔찍한 복수극을 벌이는 범인, 거기에다 악마의 탈을 쓴 채 폐광과 항구의 도시에서 은밀하게 참극을 자행했던 권력자들.

350여 페이지의 분량에 비해 꽤 복잡한 구도로 설계된 미스터리는 몸을 사리지 않는 열혈형사 정연우와 살해당한 병원장의 아들 차도진이 번갈아 화자를 맡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진행됩니다. 정연우는 사실을 은폐하는 듯한 병원 관계자는 물론 조급히 수사를 마무리하려는 관할서의 태도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난데없이 15년 만에 고향을 찾은 피해자의 아들 차도진을 의심합니다. 정연우의 의심을 감지하면서도 차도진은 범인이 노리는 마지막 타깃이 자신임을 확신하곤 15년 전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살인마저 불사할 각오를 다집니다.

 

과거와 현재로 나뉜 구성도 좋고, 속도감이나 긴장감도 놓치지 않은 매력적인 미스터리입니다. 말썽꾸러기들이긴 해도 순수한 청춘이었던 10대들이 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해 파멸에 가까운 비극을 맞이했고, 그 비극이 15년이 지난 현재 또 다른 비극을 낳고 있다는 설정도 독자의 눈길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서사에 비해 지나치게 쉽고 가볍게 느껴진 문장들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기도 하고 작가 특유의 개성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의 내용에 걸맞게 좀더 묵직한 문장들이 구사됐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일부 팩트나 캐릭터를 ‘정보를 위한 도구’로만 취급한 탓에 미스터리의 깊이가 부족해보인 점입니다. 살해된 병원장은 물론 잇따라 살해되는 자들의 캐릭터와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행적은 독자로 하여금 미스터리에 이입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들인데 대부분 두루뭉술하거나 지나치게 간략하게 묘사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인물과 사건에 대한 독자의 공감과 몰입도 방해했고, 이야기의 무게와 비극성도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또 수사를 맡은 정연우와 김상혁 콤비 역시 마지막 장을 덮고도 딱히 인상에 남은 점이 없었는데, 그들의 캐릭터가 ‘꼭 필요하고 필수적인 부분’만 묘사된 탓에 정작 ‘어떤 사람’인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콤비의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다면 시리즈를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래선지 더 아쉽게 느껴진 대목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만큼의 아쉬움도 함께 남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를 구성하고 설계하는 필력을 감안하면 작가의 후속작을 한두 편 정도는 더 지켜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전작들 중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 전에 한 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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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 마을에서
사노 히로미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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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이와타의 조사원인 마사키는 보육원에서 갓 독립한 소녀 마키와 함께 하토하 지구라는 부유한 마을로 향합니다. 19년 전 하토하 지구에서 살다가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곤 갑자기 실종돼버린 가족을 찾아달라는 마키의 요구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보육원을 나오자마자 가족 찾기에 나섰던 마키는 가까스로 어머니 료코와 절친이던 변호사 이와타를 찾아냈고, 이와타는 왠지 껄끄러워 하면서도 마사키에게 마키를 도우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사키와 마키가 찾아간 하토하 지구는 외부인에게 지독히도 폐쇄적인 것은 물론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에서 실종사건 같은 건 없었다고 잡아뗍니다. 즉 마키의 가족은 19년 전 자발적으로 마을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사키와 마키가 당시 이웃이던 기모토 지하루와 접촉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하고, 그때부터 두 사람을 향한 마을 전체의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됩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세부 장르는 ‘동조 압력 미스터리’입니다. 즉 그것이 잘못된 일이나 생각임을 알면서도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집단 심리에 휘둘린 끝에 심각한 오판을 저지른 자들을 다룬 미스터리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다니던 자동차 회사의 결함 은폐를 알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눈감아버렸던 마사키, 학폭 피해자가 되기 싫어서 가해자 편에 섰다가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고 만 마사키의 딸 에리, 업계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진실 찾기를 포기했던 변호사 이와타, 그리고 죽은 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에서 계속 살기 위해 이웃의 비극에 눈감았던 기모토 지하루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대부분이 이른바 ‘동조 압력’의 피해자들이자 동시에 공범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현재의 이야기로, 19년 전 벌어진 마키 가족의 실종을 조사하는 마사키의 행보이고, 또 하나는 과거의 이야기로, 22년 전 유치원생 아들 다카유키가 납치 살해된 시점부터 19년 전 마키의 가족이 옆집으로 이사 온 뒤 실종되기까지의 사건들을 1인칭 시점으로 설명하는 기모토 지하루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재 시점의 하토하 지구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22년 전의 유치원생 납치살해, 19년 전의 일가족 실종, 현재의 사건 등 모두 세 개의 사건이 등장하는데, 이 사건들은 하토하 마을에서 벌어졌다는 공간적 공통점뿐 아니라 실은 모두 ‘동조 압력’이라는 집단 심리에 의한 것이라는, 즉 크게 보면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 비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품 속 하토하 지구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기이한 마을입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남편, 전업주부이자 현모양처인 아내, 자녀는 둘 이상!”이라는 입주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방범대를 조직하고 외부인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것은 물론 마치 집단 세뇌에 걸린 사람들처럼 획일적인 사고와 행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지향점에 동조하지 않는 자에겐 노골적인 왕따를 퍼부어 굴복시키거나 떠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든 이 마을에 남아 살아가는 자들은 이런 기이함을 당연한 일인 듯 받아들이며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에서의 삶을 긍정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맹신과 동조가 마을 내부에서 벌어진 ‘잘못된 일’마저 오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 납치살해범이 있을 리 없다!” “우리 마을에서 실종사건 같은 건 절대 벌어질 리 없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20여 년에 걸친 끔찍한 비극들이 양산된 것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해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왔지만, 동조 압력이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여러 가지 사건과 잘 엮어냈다는 점에서 ‘누군가 이 마을에서’는 오래 기억에 남을 개성 넘치는 작품입니다. 서론이 다소 길어 보였고, 하토하 마을의 비현실성이 자꾸만 발목을 잡은 점 때문에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긴 점도 이 작품의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 내가 하토하 마을에 살았더라면, 또 만약 내가 동조 압력의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여러 인물들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과 행동을 했을까?”라는 자문이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 뇌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노 히로미는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지만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꼭 찾아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왕이면 마사키-이와타 콤비가 다시 한 번 활약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면 좋겠지만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더라도 나름 기대되는 바가 큰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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