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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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반 13년차 정연우는 후배 김상혁과 함께 폐광과 항구의 도시인 선양으로 향합니다. 지역 유지이자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던 에덴종합병원 원장 차요한이 기괴한 방식으로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병원 관계자의 지문이 묻은 살해도구가 금세 발견되자 관할서는 그를 체포하지만 정연우는 진범이 따로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편 변호사 차도진은 익명의 편지를 받고 충격에 빠집니다. “선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변호할 것. 안 그러면 15년 전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겠다.”는 그 메시지는 과거를 묻고 살아온 도진을 공포에 빠뜨립니다. 도진을 더욱 놀라게 한 건 선양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다름 아닌 아버지 차요한이란 사실입니다.

 

15년 전,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게 된 탓에 비극적인 사태를 맞이했던 도진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15년이 지나 그 사태를 야기한 자들을 향해 끔찍한 복수극을 벌이는 범인, 거기에다 악마의 탈을 쓴 채 폐광과 항구의 도시에서 은밀하게 참극을 자행했던 권력자들.

350여 페이지의 분량에 비해 꽤 복잡한 구도로 설계된 미스터리는 몸을 사리지 않는 열혈형사 정연우와 살해당한 병원장의 아들 차도진이 번갈아 화자를 맡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진행됩니다. 정연우는 사실을 은폐하는 듯한 병원 관계자는 물론 조급히 수사를 마무리하려는 관할서의 태도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난데없이 15년 만에 고향을 찾은 피해자의 아들 차도진을 의심합니다. 정연우의 의심을 감지하면서도 차도진은 범인이 노리는 마지막 타깃이 자신임을 확신하곤 15년 전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살인마저 불사할 각오를 다집니다.

 

과거와 현재로 나뉜 구성도 좋고, 속도감이나 긴장감도 놓치지 않은 매력적인 미스터리입니다. 말썽꾸러기들이긴 해도 순수한 청춘이었던 10대들이 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해 파멸에 가까운 비극을 맞이했고, 그 비극이 15년이 지난 현재 또 다른 비극을 낳고 있다는 설정도 독자의 눈길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서사에 비해 지나치게 쉽고 가볍게 느껴진 문장들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기도 하고 작가 특유의 개성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의 내용에 걸맞게 좀더 묵직한 문장들이 구사됐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일부 팩트나 캐릭터를 정보를 위한 도구로만 취급한 탓에 미스터리의 깊이가 부족해보인 점입니다. 살해된 병원장은 물론 잇따라 살해되는 자들의 캐릭터와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행적은 독자로 하여금 미스터리에 이입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들인데 대부분 두루뭉술하거나 지나치게 간략하게 묘사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인물과 사건에 대한 독자의 공감과 몰입도 방해했고, 이야기의 무게와 비극성도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또 수사를 맡은 정연우와 김상혁 콤비 역시 마지막 장을 덮고도 딱히 인상에 남은 점이 없었는데, 그들의 캐릭터가 꼭 필요하고 필수적인 부분만 묘사된 탓에 정작 어떤 사람인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콤비의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다면 시리즈를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래선지 더 아쉽게 느껴진 대목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만큼의 아쉬움도 함께 남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를 구성하고 설계하는 필력을 감안하면 작가의 후속작을 한두 편 정도는 더 지켜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전작들 중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 전에 한 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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