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의 구제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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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기업 사장 요시다카가 자택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사인은 맹독성 독극물이 들어간 커피. 수사가 시작되자 경시청 수사1과 구사나기는 요시다카와 불륜관계이던 히로미를 의심하지만, 신참 형사 가오루는 사건 당일 친정인 삿포로에 가있던 아내 아야네를 용의선상에 올립니다. 문제는 구사나기가 아야네에게 각별한 관심과 감정을 품은 탓에 그녀를 의심하는 가오루와 사사건건 충돌한 점. 결국 가오루는 딱 한 번 안면을 텄던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용의자 X의 헌신’ 이후 더는 경찰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던 유가와는 가오루로부터 사건 정황을 듣곤 조건부 협조를 약속합니다. 하지만 유가와는 범인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트릭’을 사용한 것 같다며 곤혹스러워합니다.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한 말은 내 마음을 죽였어. 그러니까 당신도 죽어줘야겠어.” (p12)

 

‘갈릴레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성녀의 구제’는 전작인 ‘용의자 X의 헌신’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동시에 범인의 정체와 동기를 밝힌 뒤 트릭의 정체를 파헤치는 구도를 취합니다. 독자와 달리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수사를 시작한 구사나기와 가오루는 각기 다른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하며 각을 세우지만, 두 사람 모두 ‘어떻게’를 입증하지 못해 곤란한 지경에 빠집니다. 더는 경찰에 협조하지 않겠다던 유가와의 관심을 이끌어낼 정도로 범인의 트릭은 허수해(虛數解), 즉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그늘에 슬픔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인간 드라마를 전개”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성녀의 구제’는 끔찍한 살인사건 이면에 숨어있는 치정, 시기, 질투, 자기혐오 등 사랑에 관련된 여러 가지 감정을 다룹니다. 결은 전혀 달라도 ‘용의자 X의 헌신’에서 맛봤던 여운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래선지 유가와마저 ‘허수해’라며 두 손을 든 사건이 부디 완전범죄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건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수사1과 베테랑 구사나기와 신참 가오루의 대충돌입니다. 객관적인 단서와 논리에 근거해 수사를 전개하는 정통파 구사나기와 달리 가오루는 여성적인 직감과 눈썰미가 대단하고 남들이 놓친 단서를 포착하는 능력까지 지녔지만 상상과 고집이 지나친 나머지 물증을 확보하기도 전에 무리한 추리를 펼치는 인물입니다. 전혀 다른 수사 방식을 고집하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 다른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하며 감정싸움에 가까운 충돌까지 벌입니다. 특히 가오루가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하는 아야네에게 구사나기가 티가 날 정도로 각별한 감정을 품은 탓에 독자는 과연 누가 위너가 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 직후에 나온 작품이라 여러 면에서 비교가 돼서 그런지 인터넷서점의 서평은 대체로 야박하거나 혹평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성녀의 구제’를 처음 읽었던 2010년 무렵엔 저 역시 작품마다 워낙 편차가 큰 ‘공장장’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 회의적인 눈길을 보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갈릴레오 시리즈’는 최소한 그의 명성에 어울리는 수준은 유지해왔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너무 큰 기대를 품고 다시 읽은 탓에 다소 실망했던 ‘용의자 X의 헌신’과 달리 ‘성녀의 구제’는 눈높이를 낮춘 상태에서 읽었기에 이런 무난한 평점을 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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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트 - 고통을 옮기는 자, 개정판
조예은 지음 / 북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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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해변의 폐건물에서 기이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남자가 피 웅덩이에 잠긴 채 살해됐고, 어린 소년이 납치됐던 흔적까지 발견됐는데, 문제는 흉기와 바닥을 물들인 피가 피살자의 것이 아니라는 점, 또 남자의 몸에서 갑자기 발병한 듯한 말기 피부암 증상이 발견된 점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조카 채린을 돌보기 위해 일부러 지방경찰서로 내려온 이창은 살해된 남자를 조사하던 중 어쩌면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율합니다.

 


‘시프트’는 2017년에 출간된 조예은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최근 꽤 많은 작품이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작년(2024년)에 ‘적산가옥의 유령’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인데, 기대 이상의 재미와 만족을 느낀 덕분에 그녀의 첫 장편소설 개정판을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고통과 질병을) 옮기기만 할 뿐 없앨 수는 없어요. 누군가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죽어야만 해요. 그래서 저는 제 능력이 저주스러워요.” (p95)

 

굳이 장르를 분류한다면 판타지 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란에게 ‘고통을 옮기는 기이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란이 고통과 병에 시달리는 ‘환자’와 그것을 옮겨 받을 ‘그릇’이 될 사람의 손을 양손에 쥐고 있으면 그를 매개로 하여 ‘환자’의 고통과 병이 ‘그릇’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고통과 병을 제거해준다는 점에서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누군가 그 고통과 병을 받아내야 한다는 점, 즉 대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형 찬과 함께 인신매매범이자 사이비교주에게 납치됐던 란은 찬이 그 기이한 능력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죽어가던 찬이 그 능력을 자신에게 물려준 걸 깨달았습니다. 저주받은 능력이지만 란은 찬의 복수를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는데,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자신의 능력을 꿰뚫어 본 자가 나타나면서 그에게 위험천만한 위기가 닥칩니다.

사고로 숨진 누나 부부가 남긴 조카 채린이 불치병에 걸리자 이창은 어린 시절 직접 목격했던 ‘기적’을 떠올리곤 그 능력자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선술집 직원인 란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란에게서 알아낸 ‘기적’의 진상은 너무나도 참혹해서 이창으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만듭니다.

 

지금껏 읽은 그 어떤 판타지나 호러에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능력을 소재로 삼았지만 그 작동원리가 너무나도 단순명쾌해서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주받은 능력을 품은 채 복수에 나선 란과 그 능력이 너무나도 간절하지만 조카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그릇’이 돼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이창의 이야기는 적절한 비율로 배합된 판타지와 미스터리와 복수 스릴러 서사 속에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설정된 건 아쉬웠지만, 그 점만 빼면 란과 이창의 이야기는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

 

찬과 란의 능력을 악용하는 악당들의 캐릭터와 역할도 잘 설정돼서 끝까지 두 주인공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롤러코스터 같은 흥미진진함을 유발합니다. 징악(懲惡)의 짜릿함을 만끽하려면 그만큼 악당이 탄탄하게 설정돼야 하는데, ‘시프트’에 등장하는 여러 악당은 뚜렷한 동기와 무자비한 잔혹함에다 개연성 있는 캐릭터까지 품고 있어서 주인공들의 분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적산가옥의 유령’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시프트’ 역시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선사했습니다. 이제 그동안 관심만 갖고 있던 조예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독자들의 서평을 훑어보며 어떤 작품을 가장 먼저 장바구니에 담을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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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매 살인사건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 / 스토리텔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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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 눈길이 끌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읽어보진 못했지만 중국 4대 기서 중 하나로 꼽히는 ‘금병매’를 원전으로 한 미스터리라는 점 때문이고, 또 하나는 닌자를 소재로 한 관능적인 액션소설 ‘인법첩 시리즈’의 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너무 음란한 탓에 청나라 시절에 금서가 된 뒤 1985년에야 연구자들을 위한 출판이 허락됐다는 ‘금병매’는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로 검색만 해봐도 금서가 된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성(性) 묘사의 수위가 무척 세고 독한 작품입니다. 그런 ‘금병매’가 원전인 살인사건 미스터리라고 하니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한국에 소개된 ‘인법첩 시리즈’ 다섯 편 가운데 딱 한 편밖에 읽지 못했지만 닌자와 관능과 사랑이라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잔인하고 애절하면서도 에로틱한 서사들의 조합이 무척 흥미로웠기에 과연 야마다 후타로가 어떤 식으로 ‘금병매’를 재창조했을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마다 후타로는 1922년에 태어나 2001년에 타계했으며, 이 작품은 일본에서 1959년에 발표됐습니다)

 


송나라 시절 청하현의 최고 부자인 서문경은 정실부인 외에도 늘 예닐곱 명의 첩을 둔 호색한입니다. 처첩 외에도 유부녀든 처녀든 마음에 들기만 하면 가리지 않고 손아귀에 넣고 마는 그의 기질은 가히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첩 가운데 서문경이 가장 아낀 건 다섯 번째 부인인 반금련입니다. 저자거리 호떡장사의 아내였다가 서문경의 첩이 된 그녀는 말 그대로 재색을 겸비한 당대의 미녀지만 지독한 질투심과 혐오감을 타고났으며 살인이든 상해든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인물로, 요즘 눈으로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탐정 역할을 맡은 건 서문경의 친구인 응백작입니다. 주색잡기에 빠져 가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뒤 서문경에게 빌붙어 사는 남자지만, 애증과 시기와 질투의 기운이 지배하는 서문경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의 진범을 밝혀내는 명탐정으로 활약합니다.

 

모두 16편의 연작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기괴하고 노골적인 성 묘사와 함께 잔혹한 살인사건을 다룹니다. 토막살인이 애교로 보일 정도로 범행수법은 잔인무도하지만 그 범행을 촉발시킨 동기는 거의 예외 없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나보다 예뻐서, 나보다 사랑받아서, 나보다 피부나 치아가 하얘서...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시기와 질투가 살의를 자극할 정도로 증폭되다가 완전범죄에 가까운 수법을 통해 실현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또 탐정 역할을 맡은 응백작이 사소한 단서에 주목하며 추리를 통해 진범을 포착하는 장면에선 소소한 쾌감과 함께 반전의 짜릿함도 맛볼 수 있습니다. 다소 억지스럽거나 무리한 추리가 벌어지는 수록작도 일부 있긴 하지만, 사건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보니 큰 거부감 없이 읽어낼 수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금병매’와 ‘야마다 후타로’의 조합이란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그저 야하고 선정적인 B급 성인물로 치부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금병매 살인사건’은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뛰어나고 대하급 서사로서도 손색없는 작품이란 게 저의 솔직한 평가입니다. 특히 “대단원의 막은 처절하고 웅장합니다. 거대한 파멸입니다. 애욕의 파국, 탐욕의 파탄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부터) 피날레를 향해 달리는 네 편은 거장의 힘과 숨결이 느껴지는 압도적 문장입니다.”라는 번역가 권일영의 후기처럼 모든 욕망과 애증이 불꽃놀이처럼 폭주하는 막판의 긴장감 넘치는 전개는 앞서 B급 성인물 코드로 쌓아올린 토대들이 실은 야하고 선정적인 것 이상의 묵직하고 폭발력 강한 연료였음을 깨닫게 만듭니다.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성애 묘사에다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그리는 데 질려서 지레 책장을 덮어버리는 독자도 있겠지만, 마지막 수록작까지 어떻게든 잘 견뎌낸다면 이 작품의 진짜 미덕과 재미를 한껏 맛볼 수 있습니다.

 

희대의 호색한 서문경과 질투의 화신 반금련, 그리고 찌질한 명탐정 응백작이 펼쳐 보이는 요사스럽고도 괴이한 살인사건 미스터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를 통해 ‘금병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접한 뒤에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또 일러두기에 나온 대로 역자 후기를 먼저 읽고 본문을 읽는다면 전반적인 설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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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 댄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2 ㅣ 링컨 라임 시리즈 2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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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컬렉터’ 사건 이후 뉴욕 시경과 FBI의 수사 자문을 맡아온 링컨 라임은 거물급 무기상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설 예정이던 비행기 조종사가 살해당한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최악의 살인청부업자이자 5년 전 자신의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명 코핀 댄서가 범인으로 추정됐기 때문입니다. ‘여자와 춤추는 사신의 문신이 새겨진 30대 백인’이란 것 외엔 알려진 바가 없는 그는 라임에겐 개인적인 복수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재판에 나서기로 했던 증인은 모두 세 명. 살해된 조종사와 그의 아내 퍼시, 동료 헤일이 그들인데, 라임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만술로 경찰을 농락하는 코핀 댄서를 추적하면서 동시에 남은 두 증인을 보호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의뢰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코핀 댄서’는 희생자의 뼈에 집착하는 역대급 사이코패스가 등장했던 시리즈 첫 편 ‘본 컬렉터’에 이은 ‘링컨 라임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본 컬렉터’ 이후 1년이 경과한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전신마비의 고통과 자괴감에 안락사를 기도했던 라임은 전편의 엔딩에서 공식적으로 뉴욕 시경과 FBI의 수사 자문을 맡기로 결심했고, 이제 자신의 파트너이자 친구인 아멜리아 색스와 함께 본격적인 2라운드를 맞이하게 됩니다.

 

라임과 색스의 두 번째 상대는 전무후무한 살인청부업자 코핀 댄서입니다. 특히 5년 전, 범행현장에 폭발물을 숨겨놓아 자신의 부하인 감식반원 두 명을 죽게 만든 댄서는 라임에겐 체포가 아니라 목을 따버리고 싶은 원수이기도 합니다. 다분히 사감이 깃든 수사를 펼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색스는 1년 동안 라임의 파트너로 일하면서 그에게 각별한 감정을 품은 상태로 등장합니다. 그래선지 보호해야 할 증인 가운데 한 명인 퍼시가 라임과 수상쩍은(?) 눈빛을 주고받는 걸 지켜보며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느끼곤 합니다. 라임을 향한 색스의 각별한 감정은 스릴러 서사 못잖게 독자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또한 색스는 초반에 댄서를 체포하거나 사살할 수 있는 기회에서 무력하게 몸을 숨겼던 자신을 자책하며 수사 과정 내내 무리수를 두곤 합니다. 그때 제대로 처신했더라면 무고한 희생을 막을 수도 있었다는 자책감은 라임과 퍼시를 향한 질투심과 함께 색스의 행보를 더욱 위험하게 만듭니다.

 

라임과 댄서의 대결은 출판사 소개글대로 ‘고수들의 체스를 보는 듯한 지적 쾌감’을 만끽할 수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상대방의 패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몇 수를 내다보며 전략을 바꾸고 작전을 수정하는 라임과 댄서의 공격과 수비는 단순한 반전 이상의 짜릿함을 선사하는데, 특히 막판에 댄서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목에선 그야말로 “월드클래스의 맞대결이란 이런 것!”이라는 감탄을 저절로 자아내게 만듭니다.

 


“미량 증거물은 라임이 가장 선호하는 증거물이었다. 아무리 영리한 범인이라도 변형시키거나 일부러 심어놓을 수 없는 것이 미량 증거물이고, 아무리 꼼꼼한 범인이라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것이 미량 증거물이다.” (p159)

 

‘링컨 라임 시리즈’가 여타 범죄 스릴러와 가장 차별화되는 대목은 바로 이 미량 증거물입니다. 간혹 독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디테일한 분석 장면이 나오곤 하는데, ‘코핀 댄서’에는 그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량 증거물이 총출동한 듯 보여서 제프리 디버의 박학다식함과 철저한 자료조사에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분석해낸 미량 증거물의 의미를 바탕으로 뛰어난 추리까지 펼쳐 보이는 라임은 ‘법과학 탐정’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진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1998년에 출간된 점을 감안하면 라임과 색스가 이끄는 법과학 스릴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중간한 사족으로...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라임과 색스의 멜로 라인이 급진전돼서 조금 놀란 게 사실입니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곤충소년’은 큰 얼개만 생각날 뿐 스토리 자체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보다도 라임과 색스가 다음 이야기에서 어디까지 진도가 나갈지 궁금해서라도 ‘곤충소년’을 얼른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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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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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현대문학에서 나온 구판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호스티스 생활을 접고 도시락 가게에서 일하며 중학생 딸 미사토와 살아가던 야스코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전 남편 도미가시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던 그에게서 도망쳤지만 끝내 뒤를 밟히고 만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집까지 찾아와 의붓딸인 미사토에게까지 음흉한 시선을 보낸 점. 그런데 우발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모녀는 도미가시를 살해하고 맙니다. 그때 모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이웃집의 고교 수학교사 이시가미. 그는 시신 처리를 떠맡으며 모녀에게 완벽한 알리바이 전략을 알려줍니다. 다음날 도미가시의 시신이 발견되고 사건을 맡은 경시청의 구사나기는 전처인 야스코를 용의선상에 올립니다. 이어 어딘가 수상한 이웃집 남자 이시가미에게서도 미묘한 위화감을 느낍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은 ‘갈릴레오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자 일본 미스터리를 통틀어 명품으로 꼽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입니다. 일본 미스터리 입문기인 17~18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 막판 반전에 깜짝 놀란 것은 물론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강렬하고 깊은 여운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생생한데,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대략의 줄거리만 생각날 뿐 구체적인 내용은 가물가물해서 거의 새로 읽는 기분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이야기의 구도는 심플합니다. 과거 천재 수학자로 불렸던 이시가미가 야스코 모녀의 살인을 덮기 위해 완벽한 알리바이 전략을 구사하고, 경시청의 구사나기가 모녀의 알리바이를 의심하며 이웃집 남자 이시가미의 공범 가능성을 떠올리는 가운데, 이시가미의 데이도 대학 동창이자 천재 물리학자인 유가와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형사 구사나기를 따돌리면서까지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심플한 구도에 비해 독자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범인과 공범이 일찌감치 공개된 가운데 이시가미-야스코-구사나기-유가와가 벌이는 치열한 두뇌싸움과 미스터리가 가장 먼저 독자의 눈길을 끌지만, 그에 못잖게 이들 사이에 흐르는 갖가지 감정들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수학교사로 초라한 삶을 살고 있는 이시가미가 자신의 인생까지 걸고 옆집 모녀에게 헌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도 모른 채 이시가미의 도움을 받는 야스코 모녀는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 그녀들은 단죄돼야 할까? 아니면 이시가미의 의도대로 완전범죄를 이뤄내야 할까? 구사나기를 통해 거의 20년 만에 이시가미의 근황을 알게 된 유가와는 어떻게 단 한 번 그와의 만남을 통해 살인사건의 진상을 절반쯤 파악할 수 있었을까? 또 구사나기를 따돌리면서까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 유가와는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야스코 모녀를 향한 이시가미의 ‘헌신’과 진실을 알게 된 유가와의 ‘고뇌’가 끝까지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가운데 아무도 예상 못한 트릭의 진상이 반전과 함께 밝혀지면서 네 인물은 혼란과 충격에 빠집니다. 또한 네 명 모두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기로에 내몰립니다. 독자 역시 왜 이들에게 이렇듯 가혹한 운명이 부여된 건지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한 장을 넘기게 됩니다.

 

미스터리로서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과 헌신을 모티브로 한 애틋하면서도 잔인한 비극이 절절하게 그려져서 장르물 독자가 아니더라도 감동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너무 오랜만에, 그것도 너무 큰 기대를 갖고 읽어서 그런지 처음 읽었을 때만큼의 감흥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그 감흥을 간직하고 싶어서 한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다시 읽고 보니 이제는 한번쯤 찾아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족 하나. ‘다시 읽기’ 중에 ‘갈릴레오 시리즈’의 신작(‘침묵의 퍼레이드’)이 출간됐다는 소식이 들려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사족 둘. 제가 소장한 구판에는 오타가 상당히 많아서 책읽기에 방해가 될 정도였는데, 출판사가 바뀐 개정판에선 모두 수정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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