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O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43
제프리 디버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잠자는 인형’과 ‘도로변 십자가’에 이은 ‘캐트린 댄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캐트린 댄스의 캐릭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 거짓말탐지기’입니다. 정확하게는 심문과 동작학(動作學), 보디랭귀지 분석이 전문인 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CBI) 요원입니다. 댄스는 상대방의 사소한 몸짓 하나만으로도 진실과 거짓말을 밝혀내는 것은 물론 상대의 심리상태까지 꿰뚫어보는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범죄자도 그녀의 시선에 걸려들면 땀 한 방울도 함부로 흘려서는 안 됩니다. 상대의 심리를 파악한 댄스의 집요하고도 뒤통수치는 심문이 연달아 날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댄스가 만난 ‘강적’은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컨트리 뮤지션 케일리 타운을 스토킹하는 에드윈 샤프입니다. 모처럼의 휴가를 맞아 잘 알고 지내던 케일리의 공연을 찾은 댄스는 케일리 주변 사람들이 차례로 살해되는 사건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범인은 케일리의 인기곡 ‘Your Shadow’의 가사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데, 현지 경찰은 평소 케일리에게 집요한 구애를 하던 에드윈을 즉각 체포하지만 미숙한 심문 탓에 곤혹스런 처지에 빠지고 결국 ‘외부인’인 댄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문제는 댄스조차도 에드윈의 속내를 좀처럼 파헤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수사는 공전하게 되고, 댄스는 (제프리 디버의 히어로 캐릭터인) 링컨 라임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리고 급진전된 수사 끝에 예상외의 범인이 밝혀지지만 그때부터 이야기는 끝도 없는 반전의 궤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제프리 디버의 작품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안심할 수 없기로 유명한데, ‘XO’ 역시 끝났나 싶으면 또다시 시작되는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합니다. 특히 노래 가사에서 영감을 얻은 끔찍한 살인수법, 케일리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있으며 그녀의 지인은 물론 적대자까지 희생자로 선택하는 범인의 행태 때문에 롤러코스터의 진폭이 훨씬 크고 요란합니다.

케일리의 친구이자 연방요원인 댄스 역시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데, 음악과 함께 휴가를 즐기러 왔던 댄스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것도 문제지만, 범인의 궁극적 목표가 케일리가 분명하다는 사실이 더욱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수사가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 링컨 라임의 도움을 청한 것은 그만큼 댄스에게 이 수사가 중요하다는 반증인 셈입니다.

 

링컨과 댄스의 협업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입니다. 예상치 않은 보너스나 공짜 선물을 받은 느낌이랄까요? 물론 링컨과 그의 파트너 아멜리아 색스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한정된 역할에 충실하지만, 댄스에게 기대 이상의 선물을 전해주고 아름답게 퇴장합니다.

 

원래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요즘은 외국 음악을 잘 안 들은 탓에 컨트리 음악이 미국에서도 꽤 오래 전에 소멸(?)한 줄 알았는데, ‘XO’를 보니 아직도 여전히 정정한 것 같습니다. 본편 뒤에 부록으로 ‘Your Shadow’를 비롯 이 작품에 등장한 모든 곡의 가사가 실려 있고, 웹사이트에서 들을 수도 있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들어봐야겠습니다.

 

사족으로, RHK의 ‘링컨 라임 시리즈’를 통해 익숙해진 아멜리아 색스의 이름이 비채의 ‘XO’에서는 어밀리아 색스로 표기됐습니다. 출판사도, 번역자도 다르니 이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읽는 내내 딴 사람을 보는 것 같아 좀 어색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살인자의 보수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경찰소설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87분서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자,

오리지널 주인공 스티브 카렐라의 자리를 위협하는(?) 코튼 호스 형사의 두 번째 출연작입니다.

 

(다 읽은 건 아니지만) 보통 두 개의 사건이 병행되던 전작들과 달리

‘살인자의 보수’는 사냥총에 얼굴이 날아간 갈취범 살인사건 하나에만 매진하고 있습니다.

피살자는 비록 타인의 약점을 노려 사익을 취한 비열한 갈취범이지만

어쨌든 87분서의 형사들은 살인범을 잡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습니다.

하지만 갈취범의 피해자 중 한 명이 범인일 거라는 심증만 있을 뿐,

정작 경찰이 찾아낸 피해자들은 살인사건과는 무관한 자들이었습니다.

전작인 ‘살인자의 선택’에서 망신살 뻗치는 데뷔를 했던 코튼 호스 형사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갈취범 살인사건에 전력을 다 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실수하는 모습을 동료들에게 보이기 싫어 단독수사를 감행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코튼 호스는 예상치 못한 성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치명적인 위기 상황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대략 정리한 줄거리지만, 이 시리즈를 한 편 이상 읽은 독자라면

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브 카렐라의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오나, 궁금할 것입니다.

전작인 ‘살인자의 선택’ 후반에 실린 ‘저자의 말’을 읽은 독자라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궁금히 여기는 독자들을 위해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작가 에드 맥베인은 집필 당시 편집자로부터

‘연애 한 번 맘대로 할 수 없는 성실한 유부남’ 스티브 카렐라 대신

‘맘껏 연애도 할 수 있고 거칠기 짝이 없는 마초 같은 매력적인 형사’를 강요받았고

그 결과 코튼 호스라는 캐릭터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번듯한 외모, 점잖은 이력과 달리 데뷔작에서 큰 실수를 하며 허당 캐릭터를 부여받았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로부터 제대로 주인공의 포스를 선물 받게 되는데,

다른 동료들의 도움을 받긴 했어도 거의 단독으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은 덕분에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던 스티브 카렐라를 거의 조연으로 위축시키고 만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1957년에는 편집자의 입김이 그만큼 셌다는 뜻이겠죠.

 

아무튼...

스티브 카렐라 뿐 아니라 마이어 마이어, 버트 클링, 아서 브라운 등

전통적인 87분서의 캐릭터들이 전작에 비해 분량이나 비중 모두 왜소해진 반면,

코튼 호스는 정열의 마초와 유능한 형사로서의 매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습니다.

피살자의 여친, 실종자의 애인, 식당에서 만난 웨이트리스 등

유부녀만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든 ‘짧고 강렬한’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전작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예리하고 정확한 추리로 끝내주는 성과를 올리기도 합니다.

 

고백하자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상반된 느낌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 코튼 호스는 매력적인 캐릭터이고, 이야기도 MSG를 친 것처럼 재미있어진 건 사실인데

왠지 ‘87분서 시리즈’만의 독특한 향기 – 그건 스티브 카렐라의 향기일지도 모릅니다 – 가

적잖이 사라졌다는 느낌도 동시에 받았다는 뜻입니다.

욕심 같아선 두 가지 미덕이 모두 살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바람이지만

‘두 명의 영웅’을 다 살리려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긴 했습니다.

 

갑자기 궁금함이 밀려와, 전에 읽은 ‘킹의 몸값’, ‘아이스’ 등 이후 시리즈의 서평을 찾아보니

어디에도 코튼 호스의 이름은 보이지 않더군요.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마이어 마이어나 버트 클링의 이름이 서평에 나오는 걸 보면

코튼 호스의 비중이 축소됐거나, 시리즈 어디쯤에선가 하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반에 실린 ‘저자의 말’을 보면 대략 코튼 호스의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그건 꼭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동어반복이지만, ‘살인자의 보수’는 재미 면에서는 어떤 전작들보다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물론 1957년에 창조된,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아날로그 서사의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의지하지 않고, 뛰고 달리며 끊임없이 생각하는

87분서의 형사들이 훨씬 더 안쓰럽고 기특해 보이고 애정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뒤의 순서를 보면 ‘Lady Killer’-‘살의의 쐐기’-‘'Til Death’-‘킹의 몸값’인데,

아직 안 읽은 ‘살의의 쐐기’를 먼저 읽어야 할지,

아니면 ‘Lady Killer’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순서대로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물론 순서대로 출간될지 여부는 피니스아프리카에 맘대로겠지만요.^^

올해에만 ‘87분서 시리즈’가 두 권씩 출간돼서 흐뭇했는데,

연말쯤 세 번째 출간소식을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너무 늦지 않게 ‘Lady Killer’가 나와주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년에 한 번 개최되며 젊고 우수한 인재들을 다수 배출해내

클래식 음악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 콩쿠르.

한때 천재 소녀로 불렸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대를 떠났던 에이덴 아야.

유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의 엘리트 마사루 카를로스.

음악을 전공했지만 악기점에서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28세 가장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양봉가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유로운 음악을 추구해온 소년 가자마 진.

수많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들 네 사람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자신과의 싸움.

3차에 걸친 예선을 뚫고 본선에서 우승을 거머쥘 사람은 누구인가?

진정 음악의 신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 흠뻑 빠진 적이 있습니다.

클래식을 소재로 한 청춘들의 성장 드라마인데,

문외한들조차 그 드라마에 등장한 클래식을 찾아 듣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역시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나는 가수다’ 초반 시즌에 흠뻑 빠진 적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가수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무대 자체도 좋았지만,

탈락자를 골라내기 위한 살 떨리는 경연을 지켜보는 일은

긴장과 재미는 물론 심지어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갖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나 ‘나는 가수다’ 모두 재미와 감동 외에 특이한 경험을 선사하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두 눈에서 툭 터져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노다메와 그녀의 동료들이 일궈내는 클래식의 향연을 지켜보며 눈시울이 뜨끈해지기도 했고,

‘나는 가수다’에서 간혹 카메라에 잡힌 관객이 흘리는 조용한 눈물을 보며

제 눈에서 툭 터져나온 눈물이 ‘낯 뜨겁고 별난 일은 아니구나’라는 위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꿀벌과 천둥’은 바로 그런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재는 클래식이고, 배경은 젊은 천재들의 콩쿠르 무대지만,

음악이 갖는 고유하고 보편적인 속성이 잘 녹아있어서 누구나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작품입니다.

 

외피만 보면 무척 통속적인 설정입니다.

세 명의 천재와 한 명의 범인(凡人)이 주인공이며,

그들은 보름 넘는 콩쿠르를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경쟁을 펼칩니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대결-갈등-애증-성장의 구도를 갖고 있고,

캐릭터들은 만화 속에 등장할 법한 매력적인 천재들로 구성돼있습니다.

예측불허의 해석과 연주로 모두를 놀라게 만드는 순수하고 이질적인 천재 가자마 진,

뛰어난 외모까지 겸비한 천재지만 튀기는커녕 오히려 평범해 보여서 매력적인 마사루,

천재성에 있어 진과 마사루의 중간쯤에 서있으며 내면에 큰 상처를 갖고 있는 에이덴 아야,

그리고 후천적 노력파에 해당하는 28세의 최고령(?) 아마추어 아카시가 그들인데,

이야기의 구도나 캐릭터만 보면 “온다 리쿠 작품 맞아?” 소리가 절로 날만큼 대중적입니다.

하지만 오직 들릴 뿐인 음악의 세계를 ‘눈에 보이는 색채와 이미지’로 묘사한 문장을 읽다보면

“역시 온다 리쿠!”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제2악장 아다지오.

차분하고 장엄한 오케스트라 도입부.

숲속을 천천히 거니는 사슴이 보이는 듯하다.

희미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쌀쌀하지만 어딘가 신비한 공기가 팽팽하게 차오르는 아침.

밤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아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주위에 감돈다.

어느덧 (객석에 앉은) 아야도 그 차가운 아침 안개 속을 거닐고 있었다.” (672p)

 

다만, 독자에 따라 색채와 이미지 묘사가 지루하거나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엄청난 분량 가운데 이런 묘사가 꽤 자주, 많이 등장하기 때문인데,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저 역시 그런 면에서 살짝 아쉬움이 있어서 별 반 개를 뺐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책을 읽었다기보다 한 편의 거대한 교향곡을 들은 듯한,

또, 보름 넘도록 진행된 콩쿠르를 객석에 앉아 직접 본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그녀의 ‘몽위’를 읽은 뒤 마치 긴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나

‘달의 뒷면’을 읽은 뒤 판타지 속 도시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그 작품들이 스토리나 캐릭터 모두 몽환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힌 경우라면,

‘꿀벌과 천둥’은 오히려 온다 리쿠답지 않게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도

음악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세계를 그녀 특유의 서사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노다메 칸타빌레’와 ‘나는 가수다’를 보고 그랬듯이,

아마 저는 조만간 ‘꿀벌과 천둥’에 등장한 클래식들을 찾아 듣게 될 것 같습니다.

그 음악들을 모두 들은 뒤에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읽는다면

저마다 절절한 사연들을 갖고 있는 주인공들의 과거와 현재,

또, 그들이 콩쿠르를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에 좀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고,

색채와 이미지로 묘사된 음악에 관한 문장들도 새롭게 읽힐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낙원남녀
나혁진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년 전 퇴근길에 괴한에게 칼에 찔리는 사고를 당한 유지혜는

그때의 충격으로 잘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두고 현재는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

그 사건 이후 부쩍 소심하고 쉽게 우울해지며 늘 처지를 비관하기만 하는 그녀 앞에

조금 수상한 남자 강마로가 나타나 탐정을 자처하며 함께 사건을 풀어 보자고 제안한다.

지혜는 '멈춰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강마로의 말에 용기를 내어,

자신을 이렇게 만든 범인을 스스로 잡기로 결심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추리, 액션, 모험 등이 잘 녹아있던 독특한 작품 ‘교도섬’ 이후

3년 만에 다시 만난 나혁진 작가입니다.

정말 아무 정보 없이 주문했다가 포장을 뜯고 표지를 보는 순간

“어, 다른 책이 왔나?”싶을 정도로 잠시 당황했습니다.

당연히 ‘교도섬’의 톤과 비슷한 작품이 아닐까 예상했던 차에

갑자기 라노벨 같은 표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표지 속 이미지와 꼭 닮은 허당 초보탐정과 탐정조수 미녀였고,

메인 스토리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전형적인 ‘후더닛’ 구조였습니다.

물론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라 좀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아무튼 주인공들의 케미가 유쾌한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두 사람은 2년 전 낙원아파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과 살인미수사건을 조사합니다.

여주인공 유지혜는 당시 미수사건의 피해자로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고,

1차 조사대상이 이웃들이다 보니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피해자들이 모두 아파트 자원봉사 모임 회원임에 주목한 강마로는

나머지 자원봉사 회원들을 의심하며 그들의 행적을 파헤칩니다.

 

표지와 캐릭터, 초반 설정 모두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코믹 코드였지만,

꽤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할 정도로 작가의 필력은 매끄럽습니다.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의 나혁진 작가의 재능이 잘 발휘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도섬’ 후기에서 작가 스스로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라고 밝힌 바 있는데,

‘낙원남녀’ 역시 그런 작가의 도전적인 치기(?)가 이야기나 캐릭터에 잘 녹아있습니다.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들도 개성 있게 설정됐고,

엔딩의 반전을 위한 단서나 복선들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적재적소에 잘 배치돼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취향의 문제 때문인지 수시로 오글거리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취향보다 더 아쉽게 느껴졌던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몇몇 설정들이었습니다.

 

강남이지만 전혀 강남 같지 않은, 더구나 북향으로 된 낡고 오래된 아파트가 주 무대인데,

음대교수, 스타 드라마작가 등 그곳의 주민들의 면면들은 간혹 수긍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강마로는 유지혜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일부러 그녀에게 조사를 제안했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수락을 받고 시작한 첫 조사는 사건 당시 기사들을 찾는 일입니다.

경찰은 피해자였던 유지혜가 조사를 시작하자 ‘공무집행방해’ 운운하며 훼방을 놓으면서도,

그녀가 알아내고자 했던 당시 사건의 세세한 정황을 ‘일부러 들으란 듯이’ 다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한순간의 깨달음’만으로 마치 사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범행의 전후 사정과 수법, 동기까지 완벽하게 파악하는데,

‘번뜩이는 이미지처럼 떠오른 영감’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엘러리 퀸을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덜컹거리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위에서 지적한 부분들에 대해 작가는 대부분 사후 설명을 부연합니다만,

이미 위화감을 진하게 느낀 뒤에 듣는 변명(?)처럼 쉽게 수긍하긴 어려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혁진 작가는 뛰어난 이야기꾼임에는 분명합니다.

‘교도섬’ 역시 아쉬운 대목들이 있었지만 독자를 잡아끄는 힘이 대단했고,

‘낙원남녀’도 페이지터너로서는 수준급인 작품입니다.

두 작품 공히 저의 신경을 건드린 부분은 어쩌면 작가가 고백한 ‘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낙원남녀’의 경우 유쾌한 캐릭터를 통해 과하게 재미를 주려다 역효과가 난 점,

또, 주인공에게 엄청난 탐정의 DNA를 부여하려던 점은 ‘치기의 절정’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강마로와 유지혜 콤비를 통해 시리즈까지 염두에 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이후엔 디테일한 부분에 좀더 신경써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평가도 야박하고, 별도 짜게 줬지만,

매력적인 한국 장르작가가 꾸준히 건승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괴담의 테이프 ㅣ 스토리콜렉터 57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저는 늦은 밤에 미쓰다 신조의 책은 번역하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많이 번역하신 현정수 님이 후기에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저 역시 미쓰다 신조의 책은 웬만해선 밤에 읽지 않기로 한 터라,

요 며칠, 출퇴근길에는 ‘괴담의 테이프’를, 밤에는 제프리 디버의 ‘XO’를 병행해서 읽었는데,

아마도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나 ‘작자미상’을 읽은 독자라면

저나 현정수 님의 ‘겁’이 괜한 엄살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하실 겁니다.

 

‘노조키메’ 후기에 실린 현정수 님의 설명에 따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을 단서를 찾아 논리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것이 미스터리이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둬야 하는 것이 호러인데,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가 전자의 대표적 작품이라면

‘괴담의 테이프’는 99% 후자에 속하는 작품합니다.

 

● ● ●

 

소설가 미쓰다는 알고 지내던 여성편집자에게 ‘괴담의 테이프’ 출간을 제안받습니다.

자살을 앞둔 자의 마지막 녹취록 내용을 소재로 한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을 시작으로

그동안 발표한 단편 호러작품들을 묶어 소설집으로 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집자는 최근 자신이 겪은 기이한 경험들을 중간에 삽입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실 그 편집자는 과거 미쓰다가 갖고 있던 꽤 많은 괴담 녹취테이프에서 괜찮은 소재를 모아

연작단편을 출간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다 상이하지만 괴담 테이프를 기반으로 한 공통점을 컨셉으로 잡자는 얘깁니다.

미쓰다는 큰 기대 없이 그 테이프를 건네줬는데,

문제는 테이프를 들은 편집자가 어느 날인가부터 이상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새로 출간된 ‘괴담의 테이프’에는 미쓰다의 단편 6작품과

편집자의 경험담이 서장, 막간, 종장의 형식으로 함께 실립니다.

 

● ● ●

 

“도키토 씨에게 어째서 일련의 괴이현상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괴이가 발생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태로는 독자가 불만스럽게 느낀다든가...”

“이 책이 미스터리 소설이었다면 절대 불가였겠지요. 하지만 호러니까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미쓰다와 편집자가 작품 속에서 나눈 대화인데, 이 작품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말 그대로 ‘영문을 알 수 없다면 그대로 내버려둬야 하는 호러’라는 뜻이죠.

물론 미쓰다는 종장에서 나름대로 수록작들을 관통하는 코드를 해석해주긴 하지만,

그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죠.

심지어 본인마저 편집자 못잖은 괴이한 경험을 한 미쓰다는 이런 언급까지 합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과연 나 자신의 의사였을까?”

 

어쩌면 괴담 녹취 테이프에 들러붙은 ‘그것’의 힘에 의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쓴 글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미쓰다 신조는 작품마다 이런 ‘애교 섞인 협박’을 독자에게 툭툭 던지곤 하는데,

이 협박이 밤만 되면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의 작품은 어지간해선 밤에는 안 읽겠다고 결심한 거구요.^^

 

개인적으로는 ‘노조키메’, ‘작자미상’, ‘백사당’, ‘사관장’ 등에 비해선 강도가 좀 약했지만,

단편으로서의 매력은 꽤 괜찮았던 작품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이유도 묻지 말고, 논리적으로 따지지도 말고 호러 자체를 즐기면 되는 작품입니다.

 

사족으로..

미쓰다 신조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차기작을 언급하곤 하는데,

‘괴담의 테이프’에서는 애초 도조 겐야 시리즈로 기획됐다가 스탠드얼론으로 급선회한

‘검은 얼굴의 여우’라는 작품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물론, 2015년에 출간된 ‘괴담의 집’에서도 자주 언급된 ‘유녀(幽女)처럼 원망하는 것’이

아직까지 국내에 출간되지 않아서 무척 아쉽지만,

‘유녀처럼~’이든 ‘검은 얼굴의 여우’든 하루 빨리 미쓰다 신조의 신작이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