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가타오카 쇼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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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고교 졸업 후 탐정이 되려던 오토후케 부우는 전설적인 추리소설가 오토리 아가사 집안의 메이드 구인 공고를 보곤 기꺼이 명탐정 꿈을 보류합니다. 하지만 우연히 밀실살인사건에 휘말린 것은 물론 오토리 가문의 장남 하루마가 미스터리 게임 플래너 야마이누에게 살인을 청부하는 장면을 엿본 탓에 본의 아니게 탐정 노릇을 떠맡게 됩니다. 살인을 막기 위해 야마이누를 찾아간 부우는 읍소와 압박을 통해 ‘아무도 죽지 않는 위장살인’으로 꾸미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지만, 오토리 가문의 네 남매와 그 가족들이 모인 무인도 저택에서 실제 살인이 벌어지고 그 직후 현장이 완벽한 밀실로 돌변하자 야마이누와 함께 진범 찾기에 나섭니다.



“이건 코미디인가? 패러디인가? 아무튼 꽤나 신나게 즐기고 있구나... 그 천진난만함을 조금 부러워하고, 동시에 약간 어이없어하며 당황한 채 읽어 내려갔다.” (아야츠지 유키토)


‘살인’이라는 무시무시한 두 글자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코믹하고 유쾌해 보이는 제목이 단번에 눈길을 끕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추천글’은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텐데, 이 묘한 분위기의 일등공신은 단연 명탐정 지망생 오토후케 부우와 어딘가 수상쩍은 미스터리 게임 플래너 야마이누 콤비입니다.


양돈업자였던 부우의 부모는 돼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딸에게 ‘꿀꿀’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물론 지독한 근시까지 물려주며 어려서부터 예민한 후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부우는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레 여겼고, 이후 “호기심이 왕성하고 멧돼지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격에 천진난만하기까지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19세로 성장했습니다. 본격 미스터리의 마니아로 명탐정을 꿈꾸다가 메이드가 되고 말았지만, 운명인 듯 명탐정 역할을 맡아 밀실 연쇄살인사건을 멋지게 해결합니다.

부우와 함께 만담 커플처럼 티키타카를 이어가며 폭소 추리를 펼치는 건 미스터리 게임 플래너라는 특이한 직업의 소유자 야마이누입니다. 머더 미스터리, 즉 본격 미스터리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게임을 기획하는 게 그의 본업이지만, 오토리 가문의 장남으로부터 실제 살인을 청부받고도 태연히 수락할 정도로 기이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럭비공 같은 부우와 한 팀이 된 것 자체가 코미디인데, 이들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연쇄살인 현장에서마저 모두를 썰렁하게 만드는 만담을 주고받곤 합니다.


제목에서 대놓고 밝혔듯 이 작품은 장르와 형식 모두 본격 미스터리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이야기의 핵심 소재와 등장인물 상당수의 ‘행동 원칙’ 자체도 본격 미스터리의 규칙을 준수한다는 점입니다. 범인은 손쉬운 방법이 널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본격 미스터리에 걸맞은 방식으로만 살인을 저지르고, 명탐정 역시 동일한 규칙을 전제 삼아 진범 찾기에 나섭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반칙 하나 없이 본격 미스터리의 규칙대로 사건들이 벌어지고, 인물들이 움직이다가 ‘본격다운 마무리’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발상도 기발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본격 미스터리에 진심인지를 여러 번 실감하게 됩니다.


애초 의뢰받은 청부살인을 위장살인으로 조작한 뒤 ‘아무도 죽지 않는, 하지만 모두가 만족하는 엔딩’을 이끌어내려 했지만, 예기치 못한 첫 살인사건에 이어 여러 사람이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당하자 부우와 야마이누는 진범을 찾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만담 추리 속에서도 조금씩 진상에 다가가던 두 사람은 뜻밖의 결말에 도달하면서 오토리 가문 후예들의 탐욕과 추악함은 물론 그들이 오랫동안 감춰온 잔혹한 비밀의 민낯까지 발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반전이 독자 앞에 펼쳐집니다.


내용보다는 주인공 캐릭터와 이야기의 큰 틀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말았는데, 인물과 공간과 사건 모두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일일이 소개하는 것도 어렵고, 자칫 스포일러가 될 여지도 많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본격 미스터리의 기초부터 진수까지 골고루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또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추리의 무게감을 견고하게 담아낸 작품을 찾는 독자라면 ‘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는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할 최적의 미스터리가 돼줄 거란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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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인 계획
야가미 지음, 천감재 옮김 / 반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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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미스터리 소설에 탐닉한 것은 물론 흉악한 사건을 분석하기를 즐기던 다치바나는 미스터리 소설 편집자가 되어 승승장구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좌천되며 씁쓸한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던 중 “당신을 살해하겠다”는 살인예고장이나 다름없는 익명의 미스터리 원고가 날아들자 다치바나는 묘하게 흥분하며 미스터리 편집자로서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한 쾌감에 사로잡힙니다. 한편으론 살인예고자의 공격에 대비하면서도 다치바나는 그와의 대결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위험천만한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상황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다치바나는 계획 자체를 전면 수정해야만 하는 위기에 처합니다.



‘대형 공포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작품이라는 카피를 보고 절대 평범한 미스터리는 아닐 거라고 짐작했지만, ‘나의 살인 계획’은 인물, 사건, 내용, 형식 등 모든 면에서 그 짐작을 한참 뛰어넘을 정도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또 ‘서스펜스, 심리전, 완전범죄라는 장르적 매력을 정교하게 구현한’ 것은 물론 ‘독자의 시선을 교란하는 치밀한 심리 스릴러’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팩트에 가깝긴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독자에게 두통을 안길 여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한데, 실제로 300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임에도 어지간히 집중하지 않으면 먼저 읽은 페이지들을 여러 번 뒤적거리는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몸통은 좌천된 편집자 다치바나가 자신을 살해하겠다고 예고한 일명 X와의 대결을 계획하다가 뜻밖의 사태에 직면하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완전범죄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입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줄거리에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도 몇 안 되는 심플한 구조지만, 작가는 챕터마다 또는 한 챕터 속에서도 수시로 ‘1인칭 화자’를 바꾸는 것은 물론 그 ‘1인칭 화자’가 누구인지조차 헷갈리게 만들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다만 이런 의도적인 혼선은 후반부의 반전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터닦기’이긴 하지만, 독자에게 흥미를 품게 만들 수도, 짜증만 내게 할 수도 있는 양가적인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거기에다 메인 사건과는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인물의 이야기가 꽤 긴 분량을 차지하기도 하고, 간혹 느닷없는 도덕과 윤리와 올바름에 관한 강론이 튀어나오기도 해서 과연 이 대목들이 다치바나의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게 만들곤 합니다.


신의 도움으로 완전범죄를 이룬 살인, 즉흥적인 충동에 의해 저지르는 우발적 살인,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상태로 사회적 죽음을 유도하는 정신적 살인 등 숱한 종류의 살인이 등장하지만, 이 작품 속 ‘살인자’가 삶의 최고 희열이자 이상으로 여기는 방식은 ‘완벽하게 설계된 트릭을 통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완전범죄로서의 살인’입니다. 작가는 ‘살인자’가 어떻게 트릭을 설계하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지를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또한 위기를 타개하고 상황을 직시하기 위해 벌이는 추리의 과정 역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그래선지 다 읽은 뒤에 어쩌면 이 작품의 미덕은 스토리나 캐릭터 자체보다 이 ‘완전범죄에 집착하는 일그러진 심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형적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결이 다른, 색다른 간식을 맛본 듯한 특별한 책읽기였지만, 독자에 따라 꽤 다양하고 극단적인 반응이 나올 여지가 많아 보이는 작품입니다. 어느 분의 서평대로 이 작품만으론 야가미라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출신 작가의 진면목을 평가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두 번째 작품인 ‘臨終トーナメント(임종 토너먼트)’가 출간된다면 제 취향의 작가인지 여부를 확실히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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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다커
앨리스 피니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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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부 콘월의 외딴섬에 있는 오래된 저택 시글라스에 홀로 살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비어트리스 다커는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아 온가족을 초대합니다. 만조가 되면 8시간 동안 외부와 고립되는 시글라스에 모인 다커 가족은 모두 8명. 거의 절연하다시피 지내던 이들이 1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이유는 막대한 재산의 상속 계획을 담은 비어트리스의 유언장 공개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어트리스는 누구도 예상 못한 충격적인 유언을 발표했고, 가족 대부분은 격분한 채 8시간 후 바닷길이 열리는 대로 저택을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그 8시간 동안 시글라스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연속살인의 무대로 탈바꿈합니다.



2018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원래 내 것이었던’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앨리스 피니의 작품입니다. 그때 쓴 서평을 찾아보니 ‘막판 반전과 정교한 설계라는 매력’과 ‘다소 지루한 심리묘사 및 모호한 미스터리에 대한 아쉬움’을 딱 절반 정도씩 느꼈다고 적혀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조금은 결이 다르지만 ‘데이지 다커’에서도 그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고, 아무래도 앨리스 피니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가임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이야기의 화자는 비어트리스의 막내 손녀이자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긴 29살의 데이지 다커입니다. 데이지에겐 할머니 비어트리스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애초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악연이자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악몽의 원천입니다. 20여 년 전 이혼한 부모 프랭크와 낸시는 두 언니 로즈와 릴리에게만 애정을 쏟았고, 언제라도 심장이 멈출 수 있는 자신에겐 최소한의 도리만 했을 뿐입니다. 어려서부터 악의로 가득 찬 공격을 퍼부었던 릴리와 맏언니임에도 그런 상황들을 방치했던 로즈 역시 데이지에게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상대들이었습니다. 다만 릴리의 15살 딸인 조카 트릭시만큼은 유일하게 데이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줘서 시글라스에서의 끔찍한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줍니다.

이날 시글라스에 초대된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다커 가족이 아닌 코너 케네디는 데이지의 첫사랑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절대 잊히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그와 재회했지만 데이지의 심경은 복잡하고 불편할 따름입니다. 


만조로 인해 8시간 동안 외부와 고립된 공간, 때마침 배를 띄울 수 없을 정도로 시글라스를 덮친 폭풍우, 유무선 통신이 모두 단절된 상황, 그리고 비어트리스의 충격적인 유언 발표 후 서로에게 날선 태도와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족들. 그야말로 영국 스타일의 비극적인 미스터리를 위한 무대와 인물들이 제대로 세팅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세팅 속에서 벌어지는 연속살인은 등장인물들이 완전히 또는 거의 남남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가족들 간의 연속살인이란 설정이 무척 낯설어보였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깊고 지독한 악의를 품었기에 부모 혹은 자식 혹은 자매를 연이어 살해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시글라스에서의 연속살인과 병행하여 다커 가족의 과거사가 전개되며 그 의문을 아주 조금씩 풀어줍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진범의 정체 및 살해동기와 함께 다커 가족이 오랜 시간 감춰온 비밀은 물론 데이지가 이야기의 화자가 된 이유가 공개되며 뜻밖의 반전으로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


‘데이지 다커’의 반전은 독자에 따라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여지가 많습니다. 누군가는 이 작품만의 특별한 매력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이게 뭐야?”라고 황당해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진범의 정체는 놀라웠지만 범행동기나 방법은 리얼리티가 모호했고, 데이지가 화자가 된 이유도 설득력이 부족했으며, 장르물의 규칙이 편의적으로 사용된 대목 역시 논란거리로 보였습니다. 전작인 ‘원래 내 것이었던’의 반전도 이런 반응을 얻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데이지 다커’는 그보다 찬반 또는 호오의 간극이 훨씬 더 클 것 같습니다.


외딴섬에 자리 한 저택 시글라스의 풍광과 한없이 일그러지고 이기적인 인물들, 그리고 고전미와 함께 수려하지만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 찬 문장들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타일의 전형적이고 대중적인 연속살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결의 맛과 미덕을 품고 있습니다. 혹평까진 아니어도 대체로 비판적인 톤의 서평을 쓰고 말았는데,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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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이유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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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에 위암 말기 선고를 받고 절망에 빠져 있던 외과의사 미사키 유우키는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뒤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그에게 최근 악인들만 골라 살해하며 ‘잭’이라는 별명을 얻은 연쇄살인범이 연락을 해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자 협박을 합니다. “저의 파트너가 돼주셔야겠습니다. 대답을 들려주십시오. 살인자로 교수대에 오를지, 아니면 저와 함께 ‘정의’를 집행할지.” 그날 이후 유우키는 잭이 지목한 악인들을 처단하며 그의 공범이 되지만, 죽음의 공포와 살인의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폭력배들로부터 구출한 19세 소녀 사야가 그의 삶에 끼어들면서 유우키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뒤흔들어놓습니다.



“선량한 시민을 위해 해충들을 죽이는 것. 그것이 제 정의이자 존재의 이유입니다.” (p89, 잭)


“웃으며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은 시간을 전부 써서 사야를 지키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그것이 ‘미사키 유우키’라는 한 사람의, 마지막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p343, 유우키)


이 작품의 원제는 ‘レゾンデートル’(레종 데트르)로, 사전적인 의미는 ‘존재 이유’입니다. 아마 원제 그대로 번역했더라면 저 같은 치넨 미키토 마니아 외에는 한국 독자에게 어필하기 어려울 것 같아 다소 직설적인 ‘살인의 이유’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습니다.


30대 초반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유우키는 절망에 빠진 나머지 과거와 현재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연쇄살인범 ‘잭’의 지시대로 살인을 저지르며 그것이 세상에 꼭 필요한 정의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애써 자위하는 장면은 안타까움은 물론 그가 겪는 지옥 같은 고통에 공감하게 만듭니다.

그런 유우키에게 새로운 존재 이유를 일깨우는 건 19세 소녀 사야입니다. 음악을 사랑하고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사야의 소박한 존재 이유는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유우키로 하여금 그녀를 지키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자 새로운 존재 이유를 품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유우키는 ‘잭’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그를 무너뜨리기 위한 위험천만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메디컬 미스터리부터 본격 미스터리까지 다양한 장르를 다뤄온 치넨 미키토가 이번엔 코엔 형제의 서스펜스 액션 스릴러에 끈적끈적한 누아르의 분위기까지 잔뜩 풍길 정도로 곳곳에 피비린내와 죽음이 난무하는 뜻밖의 이야기를 선보였습니다. 영상물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무척 높은데, 거의 원맨쇼에 가까울 만큼 주인공 유우키의 캐릭터가 압도적이라서 과연 어떤 배우가 이 매력적인 역할을 맡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유우키는 베일에 싸인 연쇄살인범 ‘잭’의 정체를 드러내고, 사야를 추적하는 폭력배 일당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미션과 함께 검도로 다져진 능력을 발휘하여 주변의 모든 악을 소탕하는 액션 스릴러 미션까지 소화하는 중책을 맡습니다. 하지만, 체력 만점의 주인공에게도 벅찬 이 미션들을 나날이 암세포에게 잡아먹혀 무너지는 중인 말기암 환자가 맡은 탓에 독자는 카타르시스와 함께 말할 수 없는 안쓰러움을 견뎌내며 책장을 넘겨야 합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끝없는 번뇌와 함께 절절하기 짝이 없는 인생 마지막 사랑까지 떠맡았으니 유우키가 작가에게 부여받은 미션이 얼마나 무겁고 대단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직 의사답게 치넨 미키토는 디테일하고 생생한 메디컬 서사를 펼쳐놓기도 합니다. 특히 말기암 환자의 고통은 물론 육체가 거의 붕괴되다시피 한 유우키가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어떻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데, 그 어떤 유사한 작품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진한 리얼리티가 이야기 곳곳에 녹아있습니다.


안타까움, 쾌감, 애틋함, 절망감, 격분 등 수많은 종류의 감정을 겪은 끝에 엔딩에 도달하면 뜨거운 물에 오래 들어가 있다가 나온 듯 몸과 마음이 녹아내린 혼곤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과의 작별을 앞두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기 위해 전력으로 싸운 유우키의 행보가 아주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기분을 만끽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치넨 미키토가 선보인 이 명품 스릴러에 꼭 한 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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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 - 2024년 타이베이국제도서전대상 소설상 수상작
탐낌 지음, 우디 옮김 / 엘릭시르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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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우(司武) 씨는 다 죽어야 한다, 이게 고객의 요구 사항입니다.” 의뢰인과 청부업자 사이에 한 가문의 몰살이 거래되고 채 한 달도 안 돼 홍콩 란터우 섬의 외진 마을 사이위에서 무려 5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식중독 살인이 벌어집니다. 희귀 성씨인 쓰우 가문 가운데 이 참사에서 살아남은 건 겨우 여섯 명. 그 중 진작부터 가문과 연을 끊고 살아온 기자 출신 사설탐정 쓰우즈신은 ‘애꾸눈 명수사관’ 치서우런과 함께 베일에 싸인 살인자를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쓰우 가문의 뿌리 깊은 치부가 하나둘씩 드러나는 것은 물론 어쩌면 살아남은 가문 사람 중 한 명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천만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는 독특한 제목에다 오랜만에 홍콩 작가의 장르물이란 점 때문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설마 했지만 첫 장부터 믿기지 않는 의뢰가 오가고, 100페이지도 되기 전에 실제로 56명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진 덕분에 어쩌면 살짝 지루한 책읽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근거 없던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관할 경찰서가 수사에 나서지만,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명탐정 역할은 ‘가문의 문제아’ 쓰우즈신과 과거 영웅적인 행동으로 홍콩 경찰의 전설이 된 ‘애꾸눈 명수사관’ 치서우런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백미는 ‘진범 찾기 미스터리’가 아니라 엄청난 부를 기반으로 한 쓰우 가문의 가부장적 독재와 절대적인 위계질서, 그리고 가문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차별과 폭력과 억압에 관한 서사입니다. 또한 그런 악습들이 어떻게 ‘가문 몰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참극으로 이어졌는지를 현재는 물론 오랜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밝혀내는 거대한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도 품고 있습니다.


어린이 한 명을 제외하고 참사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은 쓰우 가문의 명암을 극명히 드러내는 인물들입니다. 현재 쓰우 가문의 수장이자 봉건시대 군주를 연상시키는 50대 쓰우원후, 그의 10살 연하 아내이자 위험한 매력을 발산하는 40대 쓰우셰우이, 가문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은 몇 안 되는 남자 중 하나지만 오래 전부터 가문과 절연해온 30대 쓰우즈신,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개차반으로 살아가고 있는 쓰우즈이, 쓰우 가문이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쓰우즈아이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가문 몰살범을 추리하는데, 그 추리를 따라가다 보면 살아남은 다섯 명 누구든 충분한 살해 동기가 있는 것은 물론 가문의 몰살이 가져올 이익의 수혜자라는 것이 밝혀져서 독자의 추리 의욕을 고조시킵니다.


1부가 ‘진범 찾기 미스터리’에다 쓰우 가문의 실체가 폭로되는 빠른 호흡의 이야기로 구성됐다면, 2부에선 아무도 몰랐던 ‘또 한 명의 쓰우 가문 사람’이 등장하면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펼쳐집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애초 1부만으로 작품을 완성했다가 미진한 부분이 엿보여서 2부를 추가했다고 하는데, 알맹이에 비해 다소 과한 분량이 할애되긴 했지만, 기구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인생 역정과 함께 쓰우 가문의 몰락이 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시작이 그릇된 욕망과 어이없는 아이러니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디테일하게 그려져서 지루할 틈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인물도 많고 이야기 구조도 방대해서 세세한 내용까지 언급하기가 어려운데, 앞서 소개한 이 작품의 큰 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그러니까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가문의 비밀과 비극, 그 와중에 벌어진 대량 살상, 그리고 운명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개인들의 기구한 삶이란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충분히 만족스런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를 시작으로 ‘복수 3부작’을 이어갈 예정이라는데, 이 작품이 좋은 성과를 내서 후속작도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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