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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이유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6월
평점 :
32세에 위암 말기 선고를 받고 절망에 빠져 있던 외과의사 미사키 유우키는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뒤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그에게 최근 악인들만 골라 살해하며 ‘잭’이라는 별명을 얻은 연쇄살인범이 연락을 해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자 협박을 합니다. “저의 파트너가 돼주셔야겠습니다. 대답을 들려주십시오. 살인자로 교수대에 오를지, 아니면 저와 함께 ‘정의’를 집행할지.” 그날 이후 유우키는 잭이 지목한 악인들을 처단하며 그의 공범이 되지만, 죽음의 공포와 살인의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폭력배들로부터 구출한 19세 소녀 사야가 그의 삶에 끼어들면서 유우키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뒤흔들어놓습니다.

“선량한 시민을 위해 해충들을 죽이는 것. 그것이 제 정의이자 존재의 이유입니다.” (p89, 잭)
“웃으며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은 시간을 전부 써서 사야를 지키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그것이 ‘미사키 유우키’라는 한 사람의, 마지막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p343, 유우키)
이 작품의 원제는 ‘レゾンデートル’(레종 데트르)로, 사전적인 의미는 ‘존재 이유’입니다. 아마 원제 그대로 번역했더라면 저 같은 치넨 미키토 마니아 외에는 한국 독자에게 어필하기 어려울 것 같아 다소 직설적인 ‘살인의 이유’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습니다.
30대 초반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유우키는 절망에 빠진 나머지 과거와 현재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연쇄살인범 ‘잭’의 지시대로 살인을 저지르며 그것이 세상에 꼭 필요한 정의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애써 자위하는 장면은 안타까움은 물론 그가 겪는 지옥 같은 고통에 공감하게 만듭니다.
그런 유우키에게 새로운 존재 이유를 일깨우는 건 19세 소녀 사야입니다. 음악을 사랑하고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사야의 소박한 존재 이유는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유우키로 하여금 그녀를 지키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자 새로운 존재 이유를 품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유우키는 ‘잭’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그를 무너뜨리기 위한 위험천만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메디컬 미스터리부터 본격 미스터리까지 다양한 장르를 다뤄온 치넨 미키토가 이번엔 코엔 형제의 서스펜스 액션 스릴러에 끈적끈적한 누아르의 분위기까지 잔뜩 풍길 정도로 곳곳에 피비린내와 죽음이 난무하는 뜻밖의 이야기를 선보였습니다. 영상물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무척 높은데, 거의 원맨쇼에 가까울 만큼 주인공 유우키의 캐릭터가 압도적이라서 과연 어떤 배우가 이 매력적인 역할을 맡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유우키는 베일에 싸인 연쇄살인범 ‘잭’의 정체를 드러내고, 사야를 추적하는 폭력배 일당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미션과 함께 검도로 다져진 능력을 발휘하여 주변의 모든 악을 소탕하는 액션 스릴러 미션까지 소화하는 중책을 맡습니다. 하지만, 체력 만점의 주인공에게도 벅찬 이 미션들을 나날이 암세포에게 잡아먹혀 무너지는 중인 말기암 환자가 맡은 탓에 독자는 카타르시스와 함께 말할 수 없는 안쓰러움을 견뎌내며 책장을 넘겨야 합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끝없는 번뇌와 함께 절절하기 짝이 없는 인생 마지막 사랑까지 떠맡았으니 유우키가 작가에게 부여받은 미션이 얼마나 무겁고 대단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직 의사답게 치넨 미키토는 디테일하고 생생한 메디컬 서사를 펼쳐놓기도 합니다. 특히 말기암 환자의 고통은 물론 육체가 거의 붕괴되다시피 한 유우키가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어떻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데, 그 어떤 유사한 작품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진한 리얼리티가 이야기 곳곳에 녹아있습니다.
안타까움, 쾌감, 애틋함, 절망감, 격분 등 수많은 종류의 감정을 겪은 끝에 엔딩에 도달하면 뜨거운 물에 오래 들어가 있다가 나온 듯 몸과 마음이 녹아내린 혼곤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과의 작별을 앞두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기 위해 전력으로 싸운 유우키의 행보가 아주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기분을 만끽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치넨 미키토가 선보인 이 명품 스릴러에 꼭 한 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