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리의 뼈 ㅣ 로컬은 재미있다
조영주 지음 / 빚은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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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평택역 인근의 집창촌 쌈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그린 소설 ‘쌈리의 뼈’를 집필하던 중 치매에 걸린 윤명자는 딸 해환에게 소설의 완성을 부탁합니다. 엄마의 부탁이 내키지 않았던 해환은 쌈리의 한 성매매업소에서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며 엄마가 쓰던 소설이 어쩌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잡한 심경이 됩니다. 결국 소설 집필에 달려든 해환은 직접 쌈리를 찾아가 취재하는 것은 물론 주인공 ‘나’에 의해 여러 여자가 살해당하는 소설 내용이 사실이라 확신하며 과연 누가 ‘나’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수차례의 수정을 고치며 소설을 완성해나갑니다. 그러던 중 해환은 어쩌면 엄마가 엄청난 비밀을 숨겨왔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쌈리의 뼈’는 치매와 기억에 관한 심리스릴러이자 오토픽션(Autofiction, 작가의 실제 경험과 허구가 결합된 문학)과 살인사건이 절묘하게 결합된 미스터리입니다. 치매에 걸린 엄마와, 엄마를 간호하다가 스스로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딸 사이에 벌어지는 심리스릴러가 바탕에 깔린 가운데 “혹시 오토픽션을 즐겨 쓰던 엄마가 소설 속 연쇄살인범 ’나‘가 아닐까?”라며 의심하는 딸이 진짜 ‘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상상과 추리를 동원하여 소설을 완성하는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나’로 짐작되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해환이 집필하는 소설은 큰 폭으로 수정됩니다. 윤명자가 집필한 소설 초반부엔 거듭되는 연쇄살인만 묘사됐을 뿐 ‘나’의 성별과 나이조차 그려져 있지 않은데, 그러다 보니 해환은 윤명자가 ‘나’일 수도 있고, 거꾸로 윤명자가 ‘나’의 범죄피해자일 수도 있으며, 거꾸로 ‘쌈리의 뼈’는 오토픽션이 아니라 100% 허구일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던 중 윤명자의 오랜 편집자인 상모 아저씨와 함께 쌈리를 직접 취재하면서 해환의 추리는 급물살을 탑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두 건의 죽음이 발생하자 해환은 큰 충격과 함께 그동안 써놓은 소설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독자의 관심은 “‘나’의 정체는 누구?”에 가장 먼저 쏠릴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애초 ‘쌈리의 뼈’를 쓰려 했던 윤명자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며 치매와 제정신을 오가는 그녀가 딸 해환에게 밝히지 않은 비밀과 거짓말은 무엇인가?”에도 촉각이 곤두서게 됩니다. 또한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소설이 단지 엄마 윤명자뿐 아니라 자신과도 연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해환 때문에 독자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해환 주변의 조연들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하나같이 의심스러운 구석을 지니고 있습니다. 윤명자의 데뷔시절부터 함께 해온 편집자 상모 아저씨, 뼈가 발견된 성매매업소 사장 핑크젠틀맨, 아직도 성매매 일을 하는 ‘미니’라는 이름의 여성, 윤명자처럼 치매기가 보이는 붕어빵 할머니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는 미용실 언니 등 대부분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뭔가를 감추는 듯한 인상을 풍기곤 해서 마지막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가장 아쉬웠던 대목은 인물들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딱히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왠지 작위적으로 엮인 듯한 인상을 여러 차례 받았고, 일부 인물은 등장 자체나 역할이 다분히 도구적으로 보인 게 사실입니다. 모든 관계의 중심에 있는 해환도 간혹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보이곤 하는데, 그런 탓에 한참 그녀에게 몰입해 있다가 갑자기 툭 하고 몰입이 끊긴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독자에 따라 소설 ‘쌈리의 뼈’와 현실 사건 사이의 접점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 저 역시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해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해볼 생각입니다.

 

아주 오래 전 ‘붉은 소파’를 읽은 뒤로 처음 만난 조영주의 작품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이 ‘시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기회가 되면 나머지 두 작품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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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ㅣ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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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하면서도 예스럽고 신나는 소동극 같으면서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세계를 그린 듯한 로맨스 판타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하 ‘밤은 짧아~’)를 읽고 모리미 토미히코의 팬이 됐지만 그 후에 읽은 ‘야행’과 ‘열대’는 살짝 난해했던 데다 제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래선지 2024년에 개정판이 나온 ‘유정천 가족’에 눈길이 끌렸으면서도 끝내 읽지 않았는데,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를 덮어놓고 장바구니에 담은 건 왠지 ‘밤은 짧아~’의 분위기와 닮은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풋풋한 대학 신입생이던 2년 전, ‘나’는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꿈꾸며 마음에 드는 동아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나’의 눈길을 끈 건 영화 동아리 ‘계’, ‘제자 구함’이라는 기상천외한 전단을 돌린 정체불명의 동아리, 소프트볼 동아리 ‘포그니’, 그리고 자칭 비밀기관인 ‘복묘반점’ 등 네 곳이었습니다. ‘나’는 마치 평행세계를 살 듯 이 네 곳의 동아리를 모두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어느 동아리에도 제대로 녹아들지 못했고, 달콤하고 행복했던 일보다는 쓰고 맵싸했던 일만 기억나는, 그래서 결국엔 후회와 한탄만 남는 시간을 보내고 맙니다.

 


“대학 3학년 봄까지 2년간, 실익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해두련다. 만약 (신입생이던) 그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2년간을 보냈을 것이다. 환상의 지보(至寶)라 불리는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이 손에 거머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록된 네 편의 단편은 네 곳의 동아리에서 보낸 ‘나’의 2년간의 우당탕탕 희비극을 다루는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흥미로운 점은 마치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는 바람을 구현한 듯 ‘나’라는 인물이 겪은 ‘네 번의 2년’을 평행세계 SF물처럼 그렸다는 점입니다. 첫 수록작에서 하잘 것 없는 삶을 살며 사랑의 훼방꾼 노릇에만 몰두하다가 끝내 영화 동아리에서도 쫓겨난 ‘나’는 2년 전의 선택을 후회하며 “그때 다른 동아리에 들어갔더라면...”이라는 바람을 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록작에선 다른 동아리를 선택한 ‘나’의 2년이 그려집니다. 나머지 수록작에선 기괴한 스승의 제자가 되어 뜻밖의 대리전쟁에 나서게 된 이야기, 갑자기 세 여자 사이에 끼인 채 혼란을 겪다가 뒤통수를 맞는 이야기, 어느 날 깨어 보니 외부세계는 사라지고 다다미 넉 장 반인 자신의 방만 무한 반복되는 기이한 상황에 처한 이야기 등 그야말로 ‘골 때리는’ 롤러코스터 판타지가 이어지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나’의 주변에 포진한 개성 강한 조연들도 매 수록작에 함께 등장하는데, 이름과 캐릭터는 같지만 ‘나’와의 관계라든가 역할은 수록작마다 조금씩 바뀝니다.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원수인 오즈, ‘나’의 로맨스의 상대인 검은머리의 후배 아카시, 감색 유카타를 입은 괴인 같은 존재 히구치, 수수께끼 같은 치위생사이자 애주가 하누키 등이 그들인데, 이들이 벌이는 기상천외한 행동들은 ‘나’의 엉망진창 희비극 못잖게 웃음과 흥미를 자극합니다.

특히 이들 가운데 히구치와 하누키는 ‘밤은 짧아~’에도 등장했던 인물로 2013년에 제가 쓴 서평엔 각각 ‘도도한 여장부이자 말술 캐릭터’와 ‘텐구(天狗)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유카타 사나이’라고 묘사돼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주 무대 역시 ‘밤은 짧아~’와 마찬가지로 시모가모 신사, 기야마치, 폰토초 등 교토 일대로 설정돼있어서 ‘교토 청춘 판타지 시리즈’로 불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의태어와 의성어라든가 고풍스러우면서도 황당무계한 표현들은 안 그래도 특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더욱 맛깔나게 만드는데, 그런 대목들마다 얼마나 번역이 중요한지를 여러 번 깨달았습니다. 번역자는 다르지만 ‘밤은 짧아~’와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를 모두 재미있게 읽은 저로서는 만약 조금이라도 경직되거나 점잖은 문장들로 번역됐다면 이 두 작품의 묘미는 절반도 살아나지 못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워낙 특이한 소재와 형식과 이야기로 포장된 작품이라 독자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습니다. 또 다 읽은 뒤엔 잠시 멍해지며 이 작품의 미덕이나 주제가 뭘까, 라는 궁금증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론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답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좀더 진한 재미와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춘소설 같기도 하고, 평행우주론 SF 같기도 하고, 여러 얼간이의 한바탕 소동극 같기도 한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를 한두 문장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 독자는 그저 천부적이고 독보적인 이야기꾼이 벌여놓은 ‘이상한 이야기’를 마음껏 웃고 즐기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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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체가 보고 싶은 날에는
구보 미스미 지음, 이소담 옮김 / 시공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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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소녀 미카게의 삶은 혹독함 그 자체입니다. 3살 때 아버지를 병으로 잃었고, 어머니는 미카게와 언니 나나미가 아직 어리던 시절 집을 나갔습니다. 천식을 앓는 미카게는 왕따를 견디지 못해 야간학교에 다니게 됐고, 나나미는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자매가 사는 낡은 아파트 단지 주민 대부분은 독거노인과 히키코모리와 극빈층입니다. 더구나 자살 명소로 불릴 정도로 흉흉한 죽음이 빈발하곤 합니다. 이처럼 밝음보다는 어둠에,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일상에 갇힌 미카게의 유일한 바람은 시체를 직접 보고 싶다는 것. 두렵지만 직접 마주함으로써 죽음이란 것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단지 경비원’을 자칭하는 노인 젠지로를 만나면서 미카게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원제(Time of Death, Date of Birth)와는 다소 거리가 먼 번역제목만 보면 호러물로 오해하기 쉽지만, 구보 미스미를 아는 독자라면 제목과 표지만 보고도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위로와 희망의 이야기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보 미스미는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이후 절망과 상실의 늪에 빠진 인물들이 스스로 혹은 누군가의 손길에 힘입어 조금씩 희망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선보여 왔는데, 초기작들이 대체로 높은 수위와 독한 설정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최근 작품들은 일본 특유의 힐링 소설의 분위기를 품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그녀의 초기작들을 무척 좋아해서 상대적으로 다소 부드럽고 연해진 최근작들이 아쉽게 느껴지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면서도 묵직한 문장들로 절망과 상실을 그려내는 필력만큼은 변함이 없어서 늘 신작 소식을 기다리곤 합니다.

 

“그러니까 보고 싶었다. 진짜 시체는 공장에서 골라내는 딸기처럼 상하고 썩었을까.” (p53)

 

15살 소녀 미카게가 시체를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건 일그러진 호기심 때문도, 왜곡된 욕망 때문도 아닙니다. 일상 자체가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미카게에게 있어 시체를 직접 목격하는 행위는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언젠가 찾아올 죽음의 실체를 확인하고 더 잘 이해하는” 것은 물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낡은 아파트 단지에선 독거노인의 고독사가 빈발하고, 자살 명소로 꼽힐 정도로 외지인의 투신자살도 심심찮게 벌어집니다. 또래에 비해 세상 물정에 어두운 미카게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과 함께 그것을 직접 들여다보고 싶은 ‘특이한 호기심’을 갖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글프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독자로 하여금 절대 그 호기심이 충족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게 만들기도 합니다. 미카게라면 시체를 보는 순간 죽음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저절로 들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탈출구라곤 없어 보이던 미카게의 삶을 변화시킨 건 야간학교에서 만난 무짱과 구라하시, 그리고 자칭 ‘단지 경비원’인 노인 젠지로입니다. 미카게처럼 불행한 사연을 가진 무짱과 구라하시는 미카게로선 평생 처음 갖게 된 친구들로 이들은 비슷한 상처를 지닌 탓에 서로의 결핍과 갈망을 알아보고 손을 내미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어디 사는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알 수 없는 노인 젠지로에게 경계심을 품었던 미카게는 엉겁결에 그가 시키는대로 ‘단지 경비원’이 되어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마다 그와 함께 아파트 곳곳을 순찰하게 됩니다. 젠지로에 따르면 ‘걱정되는 집’을 방문하고, 투신자살을 막기 위해 시설을 보수하는 게 ‘단지 경비원’의 일입니다.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있던 미카게의 삶은 친구들과 젠지로로 인해 조금씩 빛을 얻게 되고,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를 겪게 되는데, 구보 미스미는 이 과정에 소소하지만 현실감 있는 에피소드들을 가미함으로써 ‘무조건적인 위로와 희망과 힐링’이 아닌 단단하면서도 보는 이를 울컥하게 만드는 그녀 특유의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고독사, 자살, 히키코모리 등 사회에 만연한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현실적인 자세로 접근함으로써 묵직한 여운을 자아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보 미스미 초기작의 강렬함이나 독한 설정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언제나처럼 약간의 미소와 약간의 울컥함과 함께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언젠가는 그녀의 초기작들을 다시 한 번 읽을 생각인데, “절망을 탁월하게 그리는 작가로 정평이 나있다”는 한 출판사의 소개글을 오랜만에 제대로 절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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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원숭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4 ㅣ 링컨 라임 시리즈 4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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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라임은 FBI와 이민귀화국의 지원 요청을 받고 최악의 스네이크헤드(중국인 밀입국 브로커이자 인신매매범)인 연쇄살인범 콴왕, 일명 고스트와 10여 명의 밀입국자가 탄 푸저우 드래곤호를 찾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멜리아 색스와 해안경비대가 도착하기 직전 고스트는 배를 폭파시켜 모두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고스트는 가까스로 해변에 도착한 일부 생존자를 죽이는 것은 물론 뉴욕 차이나타운으로 숨어든 나머지 생존자들까지 남김없이 죽이기 위해 청부업자를 고용합니다. 배가 폭파되는 상황까지 예측 못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한 라임은 살아남은 밀입국자들을 구하고 고스트를 체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라임과 색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미션이 주어집니다. 국제적인 수배령이 내려졌지만 얼굴조차 노출되지 않은 고스트를 체포하는 것은 물론 생존한 밀입국자들을 고스트보다 먼저 찾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인신매매나 밀입국에 관심이 없는 FBI가 요원과 병력 차출을 꺼린 점도, 도무지 믿을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민귀화국 사람들의 어리숙한 행태도 라임과 색스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뿐입니다. 배는 유력한 단서들을 품은 채 침몰했고, 사건 당일 현장에 몰아친 태풍급 비바람은 미량증거물을 모조리 못 쓸 지경으로 만들어버려서 라임으로선 뉴욕에 숨어든 고스트와 밀입국자들의 행방을 찾아낼 길이 요원할 따름입니다.

 

고스트와 밀입국자 모두 중국인인데다 라임과 색스를 돕는 수사진에도 중국인 또는 중국계 미국인들이 가세하다 보니 ‘돌 원숭이’에는 중국의 문화와 역사와 가치관을 언급하는 대목이 무척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미량증거물과 과학적 단서만을 유일무이한 잣대로 삼는 라임 입장에선 직감과 풍수와 자신이 모시는 신을 신봉하는 중국인들을 상대하는 게 그저 난감할 뿐입니다. 특히 수사진에 참여한 중국인이 번번이 자신의 법과학과는 배치되는 방식으로 단서를 찾아내고 한발씩 앞서 나갈 때마다 라임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곤 합니다. 그런 라임이 중국술을 마시고 바둑을 배우며 풍수에 관심을 가지는 등 조금씩 중국 문화를 습득하는 과정은 역설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프리 디버는 초반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번 수사에서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절대악인 고스트를 제외하곤 밀입국자들에게도, 수사진에게도, 국가기관의 요원들에게도 뭔가 하나씩 비밀을 감춘 듯한 인상을 심어놓아 독자로 하여금 거듭 혼선을 빚게 만듭니다. 제프리 디버의 이 고약한 메시지는 막판에 터지는 반전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는데,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할 정도로 전작들에 비해 다소 강도는 약해도 그만의 반전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라임과 색스의 관계는 사건 못잖게 독자의 관심을 끄는 대목인데, 전작인 ‘곤충 소년’에 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언급은 못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명확한 일보전진이자 동시에 애틋한 일보후퇴를 겪게 된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독자가 한편으론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게 될 텐데, 특히 (라임과 관련된) 예기치 못한 사태로 절망에 빠진 색스가 수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장면에선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족이지만, 사실 이 서평에서 라임과 색스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했어야 하는 인물이 한 명 있는데, 그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건 이야기 속 첫 반전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첫 반전까지의 아슬아슬함이 무척 흥미진진한데, 그 인물의 실체를 서평에서 밝히는 건 아직 이 작품을 안 읽은 독자에겐 나름 작지 않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설명조차 스포일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돌 원숭이’를 읽을 예정이라면 가급적 다른 정보 없이 출판사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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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마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8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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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오가 진사쿠의 스캔들을 추적하던 르포라이터 나가오카가 살해당하자 경찰은 그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인물들을 조사하던 중 갑자기 행방을 감춘 고시바 신고를 의심합니다. 무엇보다 1년 전 사망한 신고의 누나 아키호가 오가를 담당했던 기자라는 점, 또 아키호의 죽음에 오가가 어떤 식으로든 연루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신고는 나가오카를 살해한 용의자이자 오가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는 살인예비혐의까지 받게 됩니다. 경시청 수사1과 형사 구사나기는 신고를 조사하던 중 그가 물리학 교수 유가와의 고교 후배이자 과거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사실을 알게 되는데, 문제는 유가와가 신고뿐 아니라 살해당한 나가오카와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는 점. 하지만 유가와는 무슨 이유에선지 사건과 관련된 사실들을 감추려 합니다.

 


“(과학은)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마음에 달렸다. 사악한 인간의 손에 주어지면 과학은 금단의 마술이 된다.” (p209)

 

‘갈릴레오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인 ‘금단의 마술’은 천재 물리학자이자 명탐정이기도 한 유가와의 전문 분야, 즉 과학의 양면성을 정면으로 다룬 미스터리입니다. 과학이야말로 일본을 이끌 새 동력이라 여기면서도 그 부흥을 위한 방법론에 있어 온갖 악덕을 저지르는 정치인, “과학을 제패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아버지의 지론을 마음에 담고 진정한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사랑하는 이를 빼앗아간 자에 대한 복수를 위해 과학을 흉기로 이용하기로 한 청년, 유망한 후배에게 과학의 정도와 사명을 각인시켰지만 그 후배가 과학을 금단의 마술로 이용하려 하자 복잡한 심경에 빠지는 천재 물리학자 등 제각각의 태도로 과학을 대하는 여러 인물이 얽힌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휴먼 드라마입니다.

 

미스터리의 얼개 자체는 그동안 ‘갈릴레오 시리즈’의 장편들에 비해 다소 단선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의 팬들에게 “전작들과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라는 인상을 남긴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다소 까칠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경시청 수사1과 형사 구사나기와 우쓰미의 수사를 도왔던 유가와가 평소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사건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유가와는 살해당한 르포라이터와 용의자 신고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를 감추는 것은 물론 “신고는 절대 누군가를 해칠 리 없어.”라는, 평소 같으면 스스로 코웃음을 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신고를 감싸곤 합니다. 과학자다운 냉철함을 잃은 적 없는 유가와의 일대 변신이라고 할까요?

 

과학 자체가 중요한 테마로 설정돼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스터리 자체가 딱딱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거나 ‘이과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과학론’으로 도배되어 있진 않습니다. 르포라이터의 의문의 죽음, 과학단지 조성을 둘러싼 격렬한 찬반 대결, 뒤늦게 드러난 한 여기자의 죽음의 진실, 그리고 모든 것을 걸고 복수에 임하는 한 청년의 분노 등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사회파+휴먼 미스터리가 잘 녹아든 작품입니다.

다만 평범한 평점에 그친 이유는 앞서 언급한대로 얼개 자체가 다소 단선적인데다 분량도 그리 길지 않아서 깊이 몰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금단의 마술’은 원래 단편이었다가 장편으로 늘린 작품인데,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단선적이란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 기준으로) 1998년에 시작된 ‘갈릴레오 시리즈’는 2021년 10편인 ‘透明な螺旋’(한국 미출간)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한국엔 9편인 ‘침묵의 퍼레이드’(일본 출간 2018년)가 2025년에 소개됐습니다) 4년 가까이 신작 소식이 없어서 무척 아쉬운데, 무려 23년을 이어온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타고난 문과생이자 과학혐오자(?)인 제가 나름 애정을 가질 정도로 흥미진진한 ‘유가와 마나부의 이과 미스터리’가 한두 작품이라도 더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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