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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마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8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2월
평점 :
국회의원 오가 진사쿠의 스캔들을 추적하던 르포라이터 나가오카가 살해당하자 경찰은 그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인물들을 조사하던 중 갑자기 행방을 감춘 고시바 신고를 의심합니다. 무엇보다 1년 전 사망한 신고의 누나 아키호가 오가를 담당했던 기자라는 점, 또 아키호의 죽음에 오가가 어떤 식으로든 연루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신고는 나가오카를 살해한 용의자이자 오가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는 살인예비혐의까지 받게 됩니다. 경시청 수사1과 형사 구사나기는 신고를 조사하던 중 그가 물리학 교수 유가와의 고교 후배이자 과거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사실을 알게 되는데, 문제는 유가와가 신고뿐 아니라 살해당한 나가오카와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는 점. 하지만 유가와는 무슨 이유에선지 사건과 관련된 사실들을 감추려 합니다.

“(과학은)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마음에 달렸다. 사악한 인간의 손에 주어지면 과학은 금단의 마술이 된다.” (p209)
‘갈릴레오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인 ‘금단의 마술’은 천재 물리학자이자 명탐정이기도 한 유가와의 전문 분야, 즉 과학의 양면성을 정면으로 다룬 미스터리입니다. 과학이야말로 일본을 이끌 새 동력이라 여기면서도 그 부흥을 위한 방법론에 있어 온갖 악덕을 저지르는 정치인, “과학을 제패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아버지의 지론을 마음에 담고 진정한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사랑하는 이를 빼앗아간 자에 대한 복수를 위해 과학을 흉기로 이용하기로 한 청년, 유망한 후배에게 과학의 정도와 사명을 각인시켰지만 그 후배가 과학을 금단의 마술로 이용하려 하자 복잡한 심경에 빠지는 천재 물리학자 등 제각각의 태도로 과학을 대하는 여러 인물이 얽힌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휴먼 드라마입니다.
미스터리의 얼개 자체는 그동안 ‘갈릴레오 시리즈’의 장편들에 비해 다소 단선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의 팬들에게 “전작들과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라는 인상을 남긴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다소 까칠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경시청 수사1과 형사 구사나기와 우쓰미의 수사를 도왔던 유가와가 평소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사건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유가와는 살해당한 르포라이터와 용의자 신고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를 감추는 것은 물론 “신고는 절대 누군가를 해칠 리 없어.”라는, 평소 같으면 스스로 코웃음을 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신고를 감싸곤 합니다. 과학자다운 냉철함을 잃은 적 없는 유가와의 일대 변신이라고 할까요?
과학 자체가 중요한 테마로 설정돼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스터리 자체가 딱딱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거나 ‘이과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과학론’으로 도배되어 있진 않습니다. 르포라이터의 의문의 죽음, 과학단지 조성을 둘러싼 격렬한 찬반 대결, 뒤늦게 드러난 한 여기자의 죽음의 진실, 그리고 모든 것을 걸고 복수에 임하는 한 청년의 분노 등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사회파+휴먼 미스터리가 잘 녹아든 작품입니다.
다만 평범한 평점에 그친 이유는 앞서 언급한대로 얼개 자체가 다소 단선적인데다 분량도 그리 길지 않아서 깊이 몰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금단의 마술’은 원래 단편이었다가 장편으로 늘린 작품인데,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단선적이란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 기준으로) 1998년에 시작된 ‘갈릴레오 시리즈’는 2021년 10편인 ‘透明な螺旋’(한국 미출간)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한국엔 9편인 ‘침묵의 퍼레이드’(일본 출간 2018년)가 2025년에 소개됐습니다) 4년 가까이 신작 소식이 없어서 무척 아쉬운데, 무려 23년을 이어온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타고난 문과생이자 과학혐오자(?)인 제가 나름 애정을 가질 정도로 흥미진진한 ‘유가와 마나부의 이과 미스터리’가 한두 작품이라도 더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