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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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신과 의사 엠마 슈타인은 호텔에서 끔찍한 성폭행을 당한 뒤 다시는 집 밖으로 못 나간다.

엠마는 여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소위 ‘이발사’로 불린 연쇄살인마의 세 번째 희생자였다.

엠마는 ‘이발사’가 다시 자신을 찾아올 것만 같아 고통스러운 편집증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엠마에게 우편배달부가 찾아와 이웃의 소포를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갈색 종이에 싸인 평범한 소포. 이상한 점은 없었다. 소포에 적힌 이름만 제외하면...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제바스티안 피체크와는 세 번째 만남입니다.

‘영혼파괴자’,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을 먼저 읽었는데,

대표작인 ‘눈알~’시리즈나 ‘테라피’를 못 읽어서 아직 그의 진가를 맛봤다곤 할 수 없습니다.

앞서 읽은 작품들의 서평을 보니 “대표작 외엔 더는 읽을 생각이 없다.”는 투로 써놨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신간소식을 들으면 뭔가 나쁜(?) 기운과 함께 호기심이 이는 게 사실입니다.

‘사이코스릴러의 대명사’라는 별명처럼 사건 자체보다 일그러진 심리에 치중하는 작가인데,

분명 그쪽으로도 취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을 받거나

도무지 씻기지 않을 것 같은 개운치 않은 뒷맛 때문에 더는 읽고 싶지 않다가도,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이유로 ‘다른 작품을 한번 읽어볼까?’라는 호기심이 든다는 뜻입니다.

 

비교적 초기작인 ‘영혼파괴자’(2008)가 사이코스릴러의 교과서적 작품이라면

(독일 기준으로) 최신간인 ‘내가 죽어야 하는 밤’(2017)은 액션스릴러에 가까웠기 때문에

‘소포’는 어떤 스타일의 작품일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장르가 아주 잘 녹아있는, 흥미로우면서도 불쾌한(?) 이야기입니다.

 

엠마는 꽤 유능한 정신과 의사지만 그녀 스스로 중증의 편집증을 앓는 환자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겪은 끔찍한 사건은 그녀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어느 누구도 그녀가 겪은 사건을 ‘실제’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건에 관한 그녀의 진술은 전부 허황된 거짓말이거나 꾸며낸 것처럼 받아들여졌고,

어릴 때 겪은 정신과 치료의 낙인까지 더해져서 결국 공상허언증으로 결론나고 맙니다.

사건 이후 집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던 엠마에게 의문의 소포가 전해졌고,

그 소포로 인해 엠마의 편집증은 극에 이른 끝에 또다시 끔찍한 사건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정신이상 환자이자 살인용의자가 된 엠마는 어릴 때부터 의지해 온 아버지의 친구이자

유능한 변호사 겸 법학교수인 콘라트의 사무실에서 최후 진술을 시작합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독자마저 엠마가 겪은 사건이 현실인지 망상인지 헷갈리게 되고,

어느 새 엠마의 편집증에 강하게 전염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와중에 엠마의 주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프로파일러인 남편, 오랜 친구, 낯선 이웃, 자신을 흠모하는 남자, 친절한 우편배달부 등

그녀 주변의 인물들 역시 엠마를 끊임없는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바람에

독자는 엠마를 응원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집니다.

 

앞서 읽은 두 작품 모두 ‘반전과 결말’ 부분에서 아쉬움을 강하게 느꼈는데,

그에 비해 ‘소포’의 반전과 결말은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입니다.

물론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동기와 범행과정’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지만,

사이코스릴러와 미스터리스릴러가 잘 버무려진 서사의 힘은 전작에 비해 압도적이었습니다.

400페이지에 못 미치는 분량도 적절하고 웬만해선 중간에 멈추기 힘든 이야기의 힘도 있어서

주말 한나절이면 충분히 만끽하기 좋은 작품입니다.

혹시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전작에 만족하지 못했던 독자라도

‘소포’만큼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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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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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국적이 나이지리아라는 점도 특이하지만, 스토리나 캐릭터도 무척 독특한 작품입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코레드와 아율라는 모든 면이 정반대인 자매입니다.

언니 코레드는 유능한 간호사지만 외모와 몸집에 관한 한 늘 핸디캡으로 여기는 인물입니다.

반면 동생 아율라는 누구의 시선이든 단번에 사로잡고 마는 특별한 외모의 소유자로

자매의 어머니로부터 지나칠 정도의 편애를 독차지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두 자매만의 특별하고도 내밀한 비밀은 따로 있습니다.

즉, 동생은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 언니는 소위 ‘시체 처리 및 현장 청소부’란 점입니다.

동생 아율라의 살해 대상은 모두 사귀던 남자들입니다.

작가의 말대로 ‘교미 후 어슬렁거리는 수컷을 잡아먹는 거미 블랙위도우’를 닮은 아율라는

말 그대로 ‘그냥’ 사귀던 남자들을 살해합니다.

아율라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코레드는 자신의 직업을 살려 현장을 완벽히 청소하는 건 물론

거대한 물살 속으로 시체를 내던지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코레드는 동생 아율라의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막으려고 갖가지 충고와 조언을 합니다만

아율라는 살인을 저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SNS에 음식과 패션을 자랑질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의 기질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매의 갈등은 아율라가 언니의 짝사랑 상대인 의사 타데 오투무를 유혹하면서 시작됩니다.

외모에 관한 열등감과 살인현장을 뒤처리해야 하는 짜증과 공포에 사로잡힌 코레드 입장에서

아율라가 자신의 짝사랑에게 접근하는 상황은 여러 모로 격분을 자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타데는 아율라에게 넘어갈 게 뻔하고, 분명 아율라의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지키고 싶고 새로운 희생자를 막고 싶지만 코레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중환자에게 자신의 답답한 처지를 독백으로 내뱉거나

타데에게 아율라와 사귀지 말라고 조심스럽고 우회적으로 충고하거나

아율라에게 타데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과연 두 자매와 타데의 관계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은 ‘누가 범인? 동기는 무엇?’ 등 일반적인 스릴러의 공식과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오히려 ‘유쾌한 소시오패스와 발만 동동 구를 뿐인 공범’의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가볍거나 코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딘가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도 들고, 동시에 긴장감도 놓치고 있지 않아서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특별한 간식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아무래도 ‘연쇄살인’ 자체보다 ‘특별한 자매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 있어서

순도 높고 피비린내 나는 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꽤 심심하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연쇄살인사건을 가장한 가족 이야기’라고 할까요?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한 트라우마, 한 남자를 놓고 벌이는 자매의 연애전쟁,

거기에 동기도 없는 연쇄살인과 완벽한 뒤처리를 분담한 특이한 자매 캐릭터 등

꽤 다채롭고 흥미로운 소재들이 짧은 분량 속에 뒤범벅된 덕분에

독특한 제목에 눈길을 빼앗긴 독자라면 금세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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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눈의 고양이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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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스스로 ‘필생의 사업’이라 칭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는

개인적으로도 ‘미야베 월드 2막’ 가운데 가장 애정하는 괴담 시리즈입니다.

고향에서 참혹한 사건을 겪고 마음의 상처를 안은 채 숙부가 사는 에도로 온 소녀 오치카가

‘흑백의 방’이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특히 기이하거나 가슴 아픈 괴담)를 들어주면서

조금씩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단절했던 바깥세상과 화해한다는 것이 시리즈의 큰 틀입니다.

 

이 작품은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데,

그만큼 작품 속 시간도 많이 흘러서 어느덧 오치카는 스무살의 처녀로 성장한 상태입니다.

그동안 오치카는 무섭거나 애틋하거나 감동적인 괴담들을 들으면서

육체적인 성장과 변화는 물론 마음까지도 제법 단단하게 다잡을 줄 아는 인물이 됐습니다.

여전히 외출을 기피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조심스러워 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오치카에게도 이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호기심과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시점에 이른 것 역시 사실입니다.

‘금빛 눈의 고양이’는 바로 그런 호기심과 의문을 해소시켜주고 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 정도까지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다섯 편의 다채로운 괴담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거듭된 불행으로 인해 마음이 꺾이고 약해진 여자에게 스며든 악령이

목숨을 건 거래를 요구한 끝에 결국 일가족을 몰살시킨 이야기를 그린 ‘열어서는 안 되는 방’,

요괴를 부르는 목소리를 타고난 저주받은 처지였지만 오히려 그 목소리를 이용하여

구천을 떠도는 원령과 목소리를 잃은 소녀를 구해낸 한 여자의 삶을 그린 ‘벙어리 아씨’,

세상에 재앙을 몰고 오는 가면들을 봉인해둔 집을 무대로 한 ‘가면의 집’,

오치카와 특별한 인연인 세책방 주인 간이치의 애틋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 ‘기이한 이야기책’,

그리고 오치카와 함께 괴담을 듣게 된 사촌오빠 도미지로의 과거를 그린 ‘금빛 눈의 고양이’ 등

예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공포-감동-애틋함 등 버라이어티한 괴담들을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 출간제목이기도 한 네 번째 수록작 ‘기이한 이야기책’(あやかし草紙)은

오치카의 삶에 큰 변화를 주는 사건과 괴담을 담고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소름 돋는 서늘함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함께 담고 있는 최고의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유일하게 오치카가 등장하지 않는 표제작 ‘금빛 눈의 고양이’는

이후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향배를 가늠케 해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시리즈의 일본 원제는 ‘三島屋變調百物語’(미시마야 변조 백물어)입니다.

일본 괴담에 익숙한 독자라면 일본 전통놀이인 ‘백물어(百物語)’에 대해 잘 알겠지만,

소설 시리즈명으로 이용될 때 반드시 액면 그대로 ‘100가지 이야기’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항설백물어’ 시리즈가 그 예인데, 언젠가는 100개를 채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를 진짜 100화까지 쓸 작정인가 봅니다.

편집자에게 “백물어(百物語)니까 100화까지 쓸게요.”라고 했다니 말이죠.

더구나 “다 쓰기 전에 죽는다면 죄송한 일. 후반은 수명과의 전쟁이 될 것 같다.”라고 했으니,

정말 앞서 언급한대로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고 있는 게 맞는 듯 합니다.

이 시리즈를 애정하는 독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소리는 없겠지요.

 

일본에서는 이 작품의 후속작이 2018년 8월부터 이미 연재되기 시작했고,

(편집후기에 따르면) 곧 연재가 끝나 한국 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원제가 ‘黑式御神火御殿’이라는데,

‘새카만 불을 뿜어내는 화산의 그림이 걸린 어느 저택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아마 수록작 중 한 편의 제목인 듯 싶은데, 제목만으로도 사뭇 기대감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삼귀’ 이후 1년 만에 이 작품이 나왔으니 내년 이맘때쯤이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큰 변곡점을 맞이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가 어떤 이야기로 독자를 찾을지

벌써부터 궁금증을 참아내기가 힘들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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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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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는 ‘흑백’에 이어 ‘괴담을 들어주는 여자 오치카’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고향에서 참혹한 사건에 연루됐던 오치카가 에도에 있는 숙부의 가게 미시마야에 머물던 중

다른 사람들의 괴이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남들의 비극을 듣고 조언을 해주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장스토리이기도 합니다.

 

오치카의 첫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 ‘흑백’이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괴담을 담았다면,

모두 네 편이 수록된 ‘안주’는 따뜻한 괴담과 비극적 괴담을 골고루 섞어 놓았습니다.

주변의 물을 고갈시키는 신(神)과 일심동체가 된 소년의 애틋한 사연을 다룬 ‘달아나는 물’과

사람을 그리워하는 폐가의 혼이 끝내 요물로 변한 이야기를 다룬 ‘안주’가 따뜻한 괴담이라면,

쌍둥이에게 내린 저주와 비극을 다룬 ‘덤불 속에서 바늘 천 개’는 해피엔딩임에도 섬뜩했고,

‘으르렁거리는 부처’는 폐쇄된 마을에서 벌어진 참혹한 복수극을 다룬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긴장감이나 괴담 자체의 흥미에 있어선 ‘흑백’이 다소 매력적인 게 사실이지만,

‘안주’는 오치카와 미시마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아서 좀더 정감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순서도 그렇고, 오치카가 듣는 괴담의 성격도 그렇고,

아무래도 앞서 출간된 ‘흑백’을 먼저 읽은 후에 ‘안주’를 읽는 것이 제격이라는 생각인데,

오치카가 고향을 떠나 에도에 있는 숙부의 가게 미시마야에 머물게 된 사연이라든가,

‘흑백의 방’이라 불리는 곳에서 타인의 괴담을 듣게 된 사연을 모르면

‘안주’에 실린 수록작들의 맛을 제대로 만끽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별도의 단편들이라 읽는데 큰 무리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흑백’을 먼저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닌 오하쓰, 정의로운 오캇피키(말단 수사관)인 모시치 등

미야베 월드 2막의 다른 주인공들에 비하면 오치카는 딱히 능력이랄 게 별로 없습니다.

굳이 정리하면 ‘타인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들어주는 공감 능력’이랄까요?

오치카의 숙부는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오치카의 치유를 위해 섣부른 위로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남들의 끔찍하거나, 기이하거나, 애틋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오치카 스스로 본인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실제로 오치카는 이 세상 이야기가 아닌 듯한 황당한 이야기든 참혹한 이야기든

찬찬히 듣고 생각하고 적절한 질문과 조언을 해줌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장과 변화에 필요한 자양분들을 부지불식간에 얻곤 합니다.

 

그녀가 ‘흑백의 방’에서 들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 중에는

절대 안 변할 것 같은 사람이 요물과의 만남을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 경우도 있고,

시간만이 유일한 치유의 방법이란 걸 보여준 이도 있고,

사람의 일이란 운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자책만이 능사가 아니란 걸 가르쳐 준 이도 있습니다.

오치카는 고향에서 참혹한 사건을 겪곤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여긴 것은 물론,

과연 나는 제대로 변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에 파묻혀 있기도 합니다.

그런 오치카에게 ‘흑백의 방’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새로운 상처가 아니라 약이 돼줍니다.

 

이야기란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건성으로 듣기만 해도 안 되고, 말하는 이가 곤란할 정도로 과한 관심을 보여도 안 됩니다.

실제로 ‘아, 이 사람에겐 편하게 털어놓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면 말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한편으론 홀가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조금은 큰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치카는 요즘 세상에선 찾기 드문 ‘속을 털어놓아도 좋을 사람’ 캐릭터인데,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일방적이고 한없이 가벼운 소통만 이뤄지는 이즈음을 생각해보면

어디엔가 오치카 같은 사람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합니다.

 

‘흑백’과 ‘안주’ 두 편을 통해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오치카는 꽤 많이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또, 말미에 실린 ‘편집자 후기’를 보면 이후 오치카는 이어지는 작품에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오치카가 앞으로 듣게 될 이야기가 어떤 내용일지,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일지 궁금하지만

그에 못잖게 오치카가 어른이 돼가는 이야기 역시 궁금하고 기대가 되는 부분입니다.

다음 작품인 ‘피리술사’에서 오치카는 과연 어디까지 성장하고 변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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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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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에서 9월 사이의 오클라호마시티.

15살 소년 와이엇은 극장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량살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12살 소녀 줄리애나는 박람회장에서 언니 제네비에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2012년,

사립탐정이 된 와이엇은 의뢰받은 사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오클라호마시티로 돌아오게 되고,

사건 수사와 함께 ‘왜 당시 나만 살아남았는가? 당시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실은 오랫동안 스스로 봉인해뒀던 26년 전의 참혹한 기억에 대해 재조사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간호사가 된 줄리애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언니에 대해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SNS 등을 통해 그날의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언니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애매한 알리바이로 빠져나갔던 남자가

오클라호마시티로 되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곤 위험천만한 만남을 시도하기로 결심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참혹한 비극을 겪은 와이엇과 줄리애나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됩니다.

물론 지인에게 의뢰받은 사건을 조사하는 와이엇의 ‘현재 미션’도 함께 병행되지만,

아무래도 독자의 주된 관심은 26년 전 사건에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26년’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모든 것을 풍화시킬 만한 엄청난 시간이지만

와이엇과 줄리애나에겐 어제나 1주일 전과 다를 바 없는 ‘가까운 과거’입니다.

무슨 일이든 기억에서 사라지려면 납득할 수 없는 명쾌한 마무리가 있어야 하지만

두 사람이 겪은 사건은 그런 마무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사람 앞에 그날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고,

각자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며 천천히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진실’에 다가갑니다.

 

26년 동안 알아내지 못한 진실이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날 리는 없습니다.

와이엇과 줄리애나의 ‘진실 찾기’는 그래서 무척 느린 속도로 전개됩니다.

와이엇의 경우 26년 전 참혹하게 살해된 극장 동료들에 대한 회상이 적잖이 설명되고 있고,

이제는 나이 든 관련자들을 만나거나 자료조사를 벌이는 대목도 꽤 완만하게 전개됩니다.

평범한 간호사인 줄리애나 역시 당시 유력한 용의자였던 남자에게 질문을 퍼붓는 것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긴장감이나 속도감을 맛보긴 어려운 인물입니다.

하지만, 와이엇이 벌이는 ‘의뢰받은 현재 사건’이 이런 느린 서사를 보완해주고 있는데,

단순한 협박공갈범을 찾는 일이긴 해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와 결과를 보여주고 있어서

550여 페이지의 분량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나름대로의 진실과 결론을 얻긴 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스릴러의 엔딩처럼 명쾌하거나 속 시원한 기분을 전해주진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26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고 고통스러웠으며

이제 와서 진실을 알아냈다 한들 딱딱하게 말라붙은 상처들이 완치될 순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삶을 박제시켰던 ‘26년 전’과 헤어질 힘을 얻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독자에 따라 서사의 규모나 깊이에 비해 분량이 과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두 주인공의 깨달음과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두께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제목(원제와 번역제목 모두) 역시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스토리가 아님을 대놓고 드러내는데,

이런 외형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과 인연이 닿은 독자라면

금세 기억에서 사라질 오락물보다 훨씬 더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주인공이 진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지나친 비약처럼 보여서 별 1개가 빠졌지만,

그래도 충분히 주위에 추천할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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