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정신과 의사 엠마 슈타인은 호텔에서 끔찍한 성폭행을 당한 뒤 다시는 집 밖으로 못 나간다.

엠마는 여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소위 이발사로 불린 연쇄살인마의 세 번째 희생자였다.

엠마는 이발사가 다시 자신을 찾아올 것만 같아 고통스러운 편집증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엠마에게 우편배달부가 찾아와 이웃의 소포를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갈색 종이에 싸인 평범한 소포. 이상한 점은 없었다. 소포에 적힌 이름만 제외하면...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제바스티안 피체크와는 세 번째 만남입니다.

영혼파괴자’,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을 먼저 읽었는데,

대표작인 눈알~’시리즈나 테라피를 못 읽어서 아직 그의 진가를 맛봤다곤 할 수 없습니다.

앞서 읽은 작품들의 서평을 보니 대표작 외엔 더는 읽을 생각이 없다.”는 투로 써놨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신간소식을 들으면 뭔가 나쁜(?) 기운과 함께 호기심이 이는 게 사실입니다.

사이코스릴러의 대명사라는 별명처럼 사건 자체보다 일그러진 심리에 치중하는 작가인데,

분명 그쪽으로도 취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을 받거나

도무지 씻기지 않을 것 같은 개운치 않은 뒷맛 때문에 더는 읽고 싶지 않다가도,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이유로 다른 작품을 한번 읽어볼까?’라는 호기심이 든다는 뜻입니다.

 

비교적 초기작인 영혼파괴자’(2008)가 사이코스릴러의 교과서적 작품이라면

(독일 기준으로) 최신간인 내가 죽어야 하는 밤’(2017)은 액션스릴러에 가까웠기 때문에

소포는 어떤 스타일의 작품일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장르가 아주 잘 녹아있는, 흥미로우면서도 불쾌한(?) 이야기입니다.

 

엠마는 꽤 유능한 정신과 의사지만 그녀 스스로 중증의 편집증을 앓는 환자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겪은 끔찍한 사건은 그녀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어느 누구도 그녀가 겪은 사건을 실제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건에 관한 그녀의 진술은 전부 허황된 거짓말이거나 꾸며낸 것처럼 받아들여졌고,

어릴 때 겪은 정신과 치료의 낙인까지 더해져서 결국 공상허언증으로 결론나고 맙니다.

사건 이후 집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던 엠마에게 의문의 소포가 전해졌고,

그 소포로 인해 엠마의 편집증은 극에 이른 끝에 또다시 끔찍한 사건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정신이상 환자이자 살인용의자가 된 엠마는 어릴 때부터 의지해 온 아버지의 친구이자

유능한 변호사 겸 법학교수인 콘라트의 사무실에서 최후 진술을 시작합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독자마저 엠마가 겪은 사건이 현실인지 망상인지 헷갈리게 되고,

어느 새 엠마의 편집증에 강하게 전염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와중에 엠마의 주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프로파일러인 남편, 오랜 친구, 낯선 이웃, 자신을 흠모하는 남자, 친절한 우편배달부 등

그녀 주변의 인물들 역시 엠마를 끊임없는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바람에

독자는 엠마를 응원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집니다.

 

앞서 읽은 두 작품 모두 반전과 결말부분에서 아쉬움을 강하게 느꼈는데,

그에 비해 소포의 반전과 결말은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입니다.

물론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동기와 범행과정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지만,

사이코스릴러와 미스터리스릴러가 잘 버무려진 서사의 힘은 전작에 비해 압도적이었습니다.

400페이지에 못 미치는 분량도 적절하고 웬만해선 중간에 멈추기 힘든 이야기의 힘도 있어서

주말 한나절이면 충분히 만끽하기 좋은 작품입니다.

혹시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전작에 만족하지 못했던 독자라도

소포만큼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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