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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눈의 고양이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4월
평점 :
미야베 미유키 스스로 ‘필생의 사업’이라 칭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는
개인적으로도 ‘미야베 월드 2막’ 가운데 가장 애정하는 괴담 시리즈입니다.
고향에서 참혹한 사건을 겪고 마음의 상처를 안은 채 숙부가 사는 에도로 온 소녀 오치카가
‘흑백의 방’이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특히 기이하거나 가슴 아픈 괴담)를 들어주면서
조금씩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단절했던 바깥세상과 화해한다는 것이 시리즈의 큰 틀입니다.
이 작품은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데,
그만큼 작품 속 시간도 많이 흘러서 어느덧 오치카는 스무살의 처녀로 성장한 상태입니다.
그동안 오치카는 무섭거나 애틋하거나 감동적인 괴담들을 들으면서
육체적인 성장과 변화는 물론 마음까지도 제법 단단하게 다잡을 줄 아는 인물이 됐습니다.
여전히 외출을 기피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조심스러워 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오치카에게도 이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호기심과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시점에 이른 것 역시 사실입니다.
‘금빛 눈의 고양이’는 바로 그런 호기심과 의문을 해소시켜주고 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 정도까지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다섯 편의 다채로운 괴담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거듭된 불행으로 인해 마음이 꺾이고 약해진 여자에게 스며든 악령이
목숨을 건 거래를 요구한 끝에 결국 일가족을 몰살시킨 이야기를 그린 ‘열어서는 안 되는 방’,
요괴를 부르는 목소리를 타고난 저주받은 처지였지만 오히려 그 목소리를 이용하여
구천을 떠도는 원령과 목소리를 잃은 소녀를 구해낸 한 여자의 삶을 그린 ‘벙어리 아씨’,
세상에 재앙을 몰고 오는 가면들을 봉인해둔 집을 무대로 한 ‘가면의 집’,
오치카와 특별한 인연인 세책방 주인 간이치의 애틋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 ‘기이한 이야기책’,
그리고 오치카와 함께 괴담을 듣게 된 사촌오빠 도미지로의 과거를 그린 ‘금빛 눈의 고양이’ 등
예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공포-감동-애틋함 등 버라이어티한 괴담들을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 출간제목이기도 한 네 번째 수록작 ‘기이한 이야기책’(あやかし草紙)은
오치카의 삶에 큰 변화를 주는 사건과 괴담을 담고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소름 돋는 서늘함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함께 담고 있는 최고의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유일하게 오치카가 등장하지 않는 표제작 ‘금빛 눈의 고양이’는
이후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향배를 가늠케 해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시리즈의 일본 원제는 ‘三島屋變調百物語’(미시마야 변조 백물어)입니다.
일본 괴담에 익숙한 독자라면 일본 전통놀이인 ‘백물어(百物語)’에 대해 잘 알겠지만,
소설 시리즈명으로 이용될 때 반드시 액면 그대로 ‘100가지 이야기’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항설백물어’ 시리즈가 그 예인데, 언젠가는 100개를 채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를 진짜 100화까지 쓸 작정인가 봅니다.
편집자에게 “백물어(百物語)니까 100화까지 쓸게요.”라고 했다니 말이죠.
더구나 “다 쓰기 전에 죽는다면 죄송한 일. 후반은 수명과의 전쟁이 될 것 같다.”라고 했으니,
정말 앞서 언급한대로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고 있는 게 맞는 듯 합니다.
이 시리즈를 애정하는 독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소리는 없겠지요.
일본에서는 이 작품의 후속작이 2018년 8월부터 이미 연재되기 시작했고,
(편집후기에 따르면) 곧 연재가 끝나 한국 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원제가 ‘黑式御神火御殿’이라는데,
‘새카만 불을 뿜어내는 화산의 그림이 걸린 어느 저택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아마 수록작 중 한 편의 제목인 듯 싶은데, 제목만으로도 사뭇 기대감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삼귀’ 이후 1년 만에 이 작품이 나왔으니 내년 이맘때쯤이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큰 변곡점을 맞이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가 어떤 이야기로 독자를 찾을지
벌써부터 궁금증을 참아내기가 힘들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