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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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8월에서 9월 사이의 오클라호마시티.

15살 소년 와이엇은 극장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량살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12살 소녀 줄리애나는 박람회장에서 언니 제네비에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2012,

사립탐정이 된 와이엇은 의뢰받은 사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오클라호마시티로 돌아오게 되고,

사건 수사와 함께 왜 당시 나만 살아남았는가? 당시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실은 오랫동안 스스로 봉인해뒀던 26년 전의 참혹한 기억에 대해 재조사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간호사가 된 줄리애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언니에 대해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SNS 등을 통해 그날의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언니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애매한 알리바이로 빠져나갔던 남자가

오클라호마시티로 되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곤 위험천만한 만남을 시도하기로 결심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참혹한 비극을 겪은 와이엇과 줄리애나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됩니다.

물론 지인에게 의뢰받은 사건을 조사하는 와이엇의 현재 미션도 함께 병행되지만,

아무래도 독자의 주된 관심은 26년 전 사건에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26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모든 것을 풍화시킬 만한 엄청난 시간이지만

와이엇과 줄리애나에겐 어제나 1주일 전과 다를 바 없는 가까운 과거입니다.

무슨 일이든 기억에서 사라지려면 납득할 수 없는 명쾌한 마무리가 있어야 하지만

두 사람이 겪은 사건은 그런 마무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사람 앞에 그날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고,

각자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며 천천히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진실에 다가갑니다.

 

26년 동안 알아내지 못한 진실이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날 리는 없습니다.

와이엇과 줄리애나의 진실 찾기는 그래서 무척 느린 속도로 전개됩니다.

와이엇의 경우 26년 전 참혹하게 살해된 극장 동료들에 대한 회상이 적잖이 설명되고 있고,

이제는 나이 든 관련자들을 만나거나 자료조사를 벌이는 대목도 꽤 완만하게 전개됩니다.

평범한 간호사인 줄리애나 역시 당시 유력한 용의자였던 남자에게 질문을 퍼붓는 것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긴장감이나 속도감을 맛보긴 어려운 인물입니다.

하지만, 와이엇이 벌이는 의뢰받은 현재 사건이 이런 느린 서사를 보완해주고 있는데,

단순한 협박공갈범을 찾는 일이긴 해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와 결과를 보여주고 있어서

550여 페이지의 분량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나름대로의 진실과 결론을 얻긴 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스릴러의 엔딩처럼 명쾌하거나 속 시원한 기분을 전해주진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26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고 고통스러웠으며

이제 와서 진실을 알아냈다 한들 딱딱하게 말라붙은 상처들이 완치될 순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삶을 박제시켰던 ‘26년 전과 헤어질 힘을 얻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독자에 따라 서사의 규모나 깊이에 비해 분량이 과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두 주인공의 깨달음과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두께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제목(원제와 번역제목 모두) 역시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스토리가 아님을 대놓고 드러내는데,

이런 외형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과 인연이 닿은 독자라면

금세 기억에서 사라질 오락물보다 훨씬 더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주인공이 진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지나친 비약처럼 보여서 별 1개가 빠졌지만,

그래도 충분히 주위에 추천할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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