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링 미 백
B. A. 패리스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핀과 레일라는 프랑스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귀가길 휴게소에서 핀이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레일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녀가 남긴 것은 늘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던 작은 러시아 인형뿐.

적어도 핀이 경찰에 진술한 대로는 그렇다.

12년 후, 핀은 레일라의 언니 엘란과 약혼한다.

하지만 결혼식 직전, 핀은 경찰로부터 12년 전 실종된 레일라가 목격됐다는 얘기를 듣는다.

엘란마저 레일라를 목격했다고 말하고, 집 앞에서 레일라의 러시아 인형까지 발견되자

핀은 패닉에 빠지는 것과 동시에 레일라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 ● ●

 

‘비하인드 도어’와 ‘브레이크 다운’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B. A. 패리스의 작품입니다.

가족, 배우자,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로 인해 겪게 되는 공포와 혼란이 그녀의 주된 테마인데,

이번에는 실종 이후 12년 동안이나 생사를 알 수 없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레일라가

옛 연인인 핀과 그의 약혼녀가 된 언니 엘란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말하자면, 레일라는 러시아 인형과 이메일을 통해서만 핀과 엘란 앞에 나타납니다.

즉, 핀과 엘란으로선 곳곳에 놓인 러시아 인형과 수시로 날아드는 이메일이

진짜 레일라가 보낸 것인지, 누군가 레일라를 사칭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레일라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비밀까지 언급하자 두 사람은 더욱 충격에 빠집니다.

문제는, 왜 레일라가 자신의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이런 방법을 쓰는가, 하는 점입니다.

특히, 레일라의 옛 연인인 핀은 러시아 인형과 이메일이 등장한 뒤로 갈등에 빠지는데,

자신의 진짜 사랑이 레일라와 엘란 중 누구를 향한 것인지 스스로도 헷갈리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받은 러시아 인형과 이메일에 대해 엘란에게 알리지 않기 시작하면서

심리적 갈등과 막연한 공포와 무책임한 기대감이 한꺼번에 뒤섞인 혼란을 겪게 됩니다.

무엇보다 레일라가 마치 ‘자신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뉘앙스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자

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서 엘란과의 관계마저 위태롭게 만들고 맙니다.

 

첫 작품인 ‘비하인드 도어’가 눈에 보이는 명백한 상대로 인한 충격과 공포를 다뤘다면,

‘브레이크 다운’은 살인사건을 목격하고도 스스로를 조기 치매로 의심한 주인공이

실체 없는 공포와 맞서 싸우다가 진실을 알아내는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브링 미 백’은 어쩌면 이 두 작품의 딱 중간쯤 되는 서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러시아 인형과 이메일이라는 명백한 단서가 있긴 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보낸 레일라는 도무지 현실인지 착각인지 음모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핀은 12년 전 레일라가 사라졌을 당시 ‘살인용의자’로 조사를 받은 이력도 있기 때문에

레일라의 등장이 기뻐할 일인지, 두려워할 일인지 판단하지 못한 채 공포와 혼란에 빠집니다.

 

심리스릴러라는 장르 자체가 사건보다는 캐릭터 플레이 위주의 서사이긴 하지만,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핀의 공포와 혼란을 동어반복처럼 거듭 그린 점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이전 작품인 ‘브레이크 다운’을 읽고 쓴 서평에서도

“거의 절반 넘는 분량을 ‘사건’ 하나 없이 캐시의 공포심 묘사에 할애한 점”을 아쉬워했는데

‘브링 미 백’에서는 핀이 그런 아쉬움을 자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결말부에 드러난 진실이 꽤 충격적이고 놀라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얌전한 직구처럼, 또 다소 안이해 보이는 방식으로 설명된 점은

앞서 읽어 온 이야기들의 존재감을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극으로 치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느낌이랄까요?

 

신비한 현상이나 존재에 의해 벌어지는 비현실적 공포보다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겪게 되는 공포는 훨씬 더 서늘하고 소름 끼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B. A. 패리스는 자신만의 특별한 영역과 매력을 구축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래도 ‘스토리의 힘’이란 면에서만 보면 앞선 두 작품보다는 살짝 처져 보인 것 같습니다.

그녀의 작품이 매년 여름마다 한 편씩 출간된 걸 보면 내년 여름에도 만나게 될 것 같은데,

그때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보다는 ‘스토리의 힘’으로 마무리되는 엔딩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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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킬러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87분서 시리즈’ 가운데 일곱 번째 작품인 ‘레이디 킬러’는 1957년에 집필된 작품입니다.

62년 전의 작품이니 ‘아날로그’나 ‘올드함’보다도 더 골동품 같은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데

잉크롤러와 패드로 지문을 채취하는 장면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건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9일 동안 썼다고 고백한 점입니다.

“이 책에 뛰어든 순간 책에 휩쓸려 책이 이끄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레이디 킬러’는 아주 직선적이고 간결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87분서에 “오늘 밤 8시에 레이디를 죽이겠다. 어쩔 텐가?”라는 살인예고장을 보내고

코튼 호스와 스티브 카렐라 등 모든 형사가 12시간 동안 범인을 쫓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딱히 반전이나 충격적인 대목 없이 ‘레이디’라는 불특정 피해자를 찾는 탐문이 주된 내용이고,

결말에선 약간은 우연과 행운에 기댄 추리를 통해 피해자와 범인을 찾게 됩니다.

 

사실, 앞서 읽은 87분서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캐릭터 플레이였습니다.

애초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스티브 카렐라가 맹활약하며 멋진 모습을 보인 점이 그랬고,

세컨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코튼 호스가 87분서에 처음 와서 좌충우돌하는 내용,

또 맛깔난 조연들이 자기만의 사연을 과시하며 팀 플레이를 선보이는 이야기 등

사건 자체만큼이나 재미를 주는 캐릭터 플레이가 매력적이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레이디 킬러’는 ‘굴러온 돌’ 코튼 호스가 스티브 카렐라 대신 주인공으로 활약하는데,

캐릭터 플레이라기보다는 수사 과정을 객관적으로 담은 다큐멘터리처럼 읽혔습니다.

창녀와 가수 등 ‘레이디’ 후보를 찾아다니고, 경찰서를 지켜보는 수상한 자의 뒤를 쫓고,

몽타주 그림을 들고 막연한 탐문에 나서기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건이라도 좀 긴장감 넘치게 전개돼야 하는데,

대범한 살인예고장, 12시간이라는 시간제한, ‘레이디’라 지칭된 막연한 잠재적 피해자 등

흥미로운 코드들은 여럿 배치됐지만 정작 사건은 대체로 밋밋한 편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코튼 호스가 ‘살인 장소’를 추리해내는 대목은

살짝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이해했다 해도 다소 우연에 많이 기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9일 만에, 그것도 여름휴가 중에 “빨리 이 책을 끝내고 싶었다.”는 욕심으로 쓴 탓인지,

아니면 삐딱하게 틀어진 (것처럼 보이는) 출판사를 골탕 먹일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연에 대해서는 ‘살인자의 선택’에 실린 작가 후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읽은 87분서 시리즈 가운데에는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이었습니다.

설령 1957년이라는 출간시기를 감안하더라도 약간은 태업(?)의 냄새가 났다고 할까요?

다음 작품에선 사건도 사건이지만, 87분서의 매력적인 인물들이 펼치는

맛깔나고 화려한 캐릭터 플레이를 꼭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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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술사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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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 시리즈 ‘미야베 월드 2막’ 중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 오치카가 주인공인 세 번째 작품입니다.

‘흑백’과 ‘안주’에 이어 이번에도 오치카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그래서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할 기이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가까이 다가오면 반드시 사랑하는 남녀를 헤어지게 만드는 연못(다마토리 연못),

앞일을 예고하는 능력을 가진 신비한 산장(기치장치 저택)

사람이 감추고 있는 악행을 꿰뚫어 보는 아기(우는 아기),

사람들의 원한으로 빚어진 괴물을 퇴치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여자(피리술사),

오치카가 청자(聽者)로 참석한 연말의 괴담 모임(가랑눈 날리는 날의 괴담 모임),

그리고 절기 날이면 다른 사람의 얼굴로 뒤바뀌는 운명을 받아들인 탕아(절기 얼굴) 등

모두 개성 강한 괴담 단편 여섯 편이 수록돼있습니다.

 

처음 두 수록작(‘다마토리 연못’, ‘기치장치 저택’)을 읽었을 때만 해도

‘피리술사’는 전작들과 달리 다소 훈훈한(?)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괴담을 들려주는 사람은 마음 속 돌덩어리를 내려놓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괴담을 듣는 오치카 역시 사건에 개입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본분에 충실한,

그러니까 긴장감이나 무서움보다 따뜻함과 안도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뭇 으스스한 호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아쉬울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괴담 듣는 소녀 오치카’의 원래 미션에 가장 잘 어울려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일본판 표제작인 ‘우는 아기’(泣き童子)에서 작가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악의를 지닌 자만 나타나면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기는

무서운 인형이나 아기가 등장하는 영미권 호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섬뜩한 이야기인데,

엔딩마저 씁쓸해서 오치카에게 꽤 큰 후유증을 남기기도 합니다.

오치카가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괴담을 듣는 이야기인 ‘가랑눈 날리는 날의 괴담 모임’은

극중극 형태처럼 엽편(葉片)에 가까운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작품인데,

따뜻한 이야기와 소름 돋는 이야기가 골고루 섞여 있어서 흥미를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한편, 표제작 ‘피리술사’는 미야베 월드 2막의 한 작품인 ‘괴수전’을 연상시키는 작품인데,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의 원한이 빚어낸 식인 괴물의 등장이란 점도 그렇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에 의해 괴물을 퇴치하는 상황도 아주 비슷한 구도로 그려집니다.

‘피리술사’가 2011년, ‘괴수전’이 2014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걸 보면,

아무래도 ‘피리술사’ 이후 미야베 미유키가 본격적인 장편 괴수물을 구상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슷한 서사이긴 해도 장편과 단편의 고유의 매력을 나눠 가진 작품들이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틋한 마음으로 읽은 작품은 마지막 수록작인 ‘절기 얼굴’인데,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는 ‘상인’과의 거래를 통해 ‘죽은 자의 얼굴’을 갖기로 한 남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특별하면서도 의미 있는 만남들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그림자도 없는 신비한 존재인 ‘상인’은 오치카도 잘 아는 인물이라 더욱 반가웠는데,

그는 오치카 시리즈의 첫 작품인 ‘흑백’의 수록작 ‘흉가’에도 등장했던 자로

그 작품에서는 꽤 사악한 캐릭터로 묘사된 탓에 오치카 역시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에선 망자와 산 자의 절실함을 거래로 연결시켜주는 선의를 가진 존재로 그려져서

오치카로 하여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소 아쉬웠던 건 편집자 후기에 적힌 대로 오치카의 ‘연애’가 제자리를 맴돈 점입니다.

전작인 ‘안주’ 후기에서 작가 스스로 오치카의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예고한 바 있지만,

오치카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낭인무사 아오노 리이치로의 이야기는

분량도 적은데다 연애에 관한 진도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치카 시리즈는 이후 ‘삼귀’ 한 편만 남았는데,

과연 오치카와 아오노가 그 작품에서 제대로 인연을 맺게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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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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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의 삶은 그의 형 츠요시가 살인을 저지른 고교 3학년 때부터 만신창이가 됩니다.

츠요시의 범행은 나오키의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한 방편이었고 살인은 우발적인 사태였지만,

결국 그 사건은 츠요시에겐 15년의 징역살이를, 나오키에겐 진창 같은 악몽만 남기게 됩니다.

졸업을 앞둔 고교에서는 나오키에게 학업을 중단하고 떠나주길 바라고,

아르바이트 점장은 그의 존재를 불편해하며, 음악에 걸었던 청춘의 꿈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내치고 맙니다.

하지만 교도소 안의 츠요시는 그런 사정도 모른 채 매달 편지를 보내옵니다.

어느 순간부터 형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버리기 시작한 나오키는 겨우 안정된 삶을 찾지만,

그 안정은 얼마 가지도 못해 너무나도 쉽게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 ● ●

 

최근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참에

모처럼 감동 서사 작품이 재출간됐다는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2010년에 출간됐음에도 아직까지 읽지 못한 작품이었는데,

내심 ‘비밀’이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억’처럼 눈물을 쏙 빼주기를 기대한 게 사실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이 작품은 ‘차별과 속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이한 건 주인공이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나 그 유족도 아닌 가해자의 동생이란 점입니다.

처음엔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형에 대한 미안함이 들기도 했지만,

‘살인자의 동생’이란 낙인 때문에 번번이 좌절을 겪게 된 나오키는

어느 순간부터 ‘애초 내게 형 따윈 없었다’는 분노와 원망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아내는 ‘살인자의 제수씨’, 딸은 ‘살인자의 조카’로 손가락질 받기에 이릅니다.

 

독자는 학교, 사랑, 꿈, 직장에서 매번 낙오하는 나오키를 보면서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단지 살인자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차별과 편견을 날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살인자의 가족이 있다면 나는 그(녀)를 평범하게 대할 수 있을까?

과연 속죄란 징역살이 몇 년과 진심 어린 참회를 했다면 완성될 수 있는 것일까?

 

등장인물 가운데 나오키의 좌절과 분노에 대해 충고해주는 인물이 있긴 하지만,

사실 그의 충고라는 것 역시 ‘정답’일 수도 없고, 명쾌하지도 않습니다.

작가 역시 작품 내내 위의 질문들에 대해 ‘이것이 정답’이란 걸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신(神)조차도 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들이다 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이야기가 다소 힘을 얻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승전결을 따라간다기보다 이런저런 상황들의 나열이란 느낌이랄까요?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 괴담집 ‘흑백’에 수록된 ‘만주사화’라는 작품에는

살인을 저지르고 섬에 유배된 형이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또, 돌아오더라도 우리와는 전혀 모르는 남남이 됐으면 하고 바라는 동생이 등장합니다.

나오키 역시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번민에 휩싸였겠지만,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태도만 보이다가 자포자기한 탓에,

또 다소 억지스럽게 눈물을 쥐어짜는 클라이맥스와 엔딩 탓에

나오키의 감정에 이입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픽션인데도 마치 감동을 목적으로 한 다큐멘터리처럼 읽힌 작품인데,

눈물 한 번 제대로 쏟아내고 싶었던 기대감은 절반도 충족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최근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거의 관심 밖의 일이 된 게 사실입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소 황당한 과학 미스터리’이거나 재출간 작품이 대부분이기 때문인데,

오히려 오래 전에 읽어서 줄거리조차 가물거리는 명작들을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린의 날개’ 이후 2년 동안 소식이 없는 ‘가가 형사 시리즈’가 기다려지는데,

일본에서도 출간이 안 된 건지, 국내출간이 늦어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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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눈빛 ㅣ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나츠메 노부히토는 젊은 날의 소신에 따라 법무부 소속 소년분류심사원에서 근무했지만,

어린 딸 에미가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자 늦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한 인물.

그가 형사로서 마주하는 인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불행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다.

짐승만도 못한 남편이나 삼촌을 뒀거나, 한창 나이에 노숙자가 됐거나,

아내와 사별 후 엇나간 중2 아들과 갈등을 빚거나, 전과자란 과거에 발목을 잡힌 사람 등...

그들은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 때문에 절규한다.

나츠메는 때로 그들을 꾸짖고 때로 그들을 보듬으며 비극적인 사건을 해결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 중 연작단편집으로는 ‘악당’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작품입니다.

아무래도 그의 매력은 깊은 서사와 무게감을 지닌 장편들을 통해 만끽했던 터라

한 명의 주인공이 끌고 가는 연작이라 해도 역시 단편집은 아쉬움이 남기 마련입니다.

 

주인공은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소속 38세 형사 나츠메 노부히토입니다.

나츠메 노부히토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

노부히토(信人)라는 이름대로 사람을 믿고 아이들을 좋아해서 교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아동보호시설 현장실습에서 만났던 청소년이 죄를 짓고 체포되는 사건을 겪은 뒤로

평범한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상대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하지만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죄를 지은 청소년들을 면접하는 일을 하던 그는

어린 딸 에미가 청소년으로 보이는 자가 저지른 연쇄테러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뒤로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했고 지금은 관할서 형사가 된 상태입니다.

 

그를 아는 지인들은 누군가를 의심할 줄 모르는 그가 형사가 됐다는 사실에 크게 놀랍니다.

하지만 그의 딸 에미의 사연을 떠올리면 착잡한 마음으로 그를 이해하고 안쓰럽게 여깁니다.

테러사건 당시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딸을 해친 범인이 청소년으로 밝혀지자 나츠메는

“(소년분류심사원에서 만나는) 소년이 내 딸을 공격한 범인이 아닐까 싶어 분노가 끓어올랐어.

그러다 보니 다른 마음(범죄자에 대한 증오)이 내 안에 생겨난 거야.”라며

형사가 된 계기와 당시의 감정을 옛 동료에게 담담히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앞의 여섯 편은 ‘형사 나츠메의 사건해결’을 다루고 있고,

마지막 수록작 ‘형사의 눈빛’은 딸 에미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과거의 테러사건을 다룹니다.

나츠메는 형사답지 않은 외모와 화법으로 용의자 또는 관련자들의 진술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그들의 진술 속의 아주 작은 모순이나 거짓을 절대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면모를 보입니다.

특히 꽤 여러 작품 속에 ‘위장 자수’가 설정돼있는데,

(실제 범행을 저지른)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경우도 있고,

누군가를 증오한 나머지 더는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 거짓 자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츠메는 그 ‘위장 자수’ 속에 숨은 진짜 사연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진실을 끌어냅니다.

 

캐릭터나 디테일 모두 다르지만 읽다 보면 ‘신참자’의 주인공 가가가 떠오르곤 합니다.

형사답지 않은 젠틀함이나 날카롭긴 해도 부드러움으로 포장된 탐문 기법 때문인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나츠메가 지닌 딸로 인한 상처가 더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던 사람’이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 역시

독자로 하여금 나츠메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인데,

“저에게 있어 수사란 항상 괴롭습니다.”라는 그의 고백은 충분히 공감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짧은 분량의 단편 속에 꽤 참혹한 사건들을 함축적으로 다룬 건 매력적이지만,

역시 분량의 한계 때문에 느껴지는 아쉬움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나츠메의 수사는 명백한 단서를 근거로 개연성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지만,

아무래도 깊이감은 부족한 탓에 매편마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물론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사회파 기질은 여전했고, 반전 역시 소소해도 명쾌하게 설정돼서

읽는 내내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야쿠마루 가쿠가 나츠메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물을 출간할지 알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형사답지 않은 형사 나츠메 시리즈’도 꽤 매력적일 거란 생각입니다.

작품 속 나츠메의 옛 친구인 쿠미코 역시 그런 바람을 갖고 있는 듯 한데,

“쿠미코는 지금도 나츠메가 경찰이라는 직업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런 형사가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다만, 나츠메가 주인공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이번에는 꼭 장편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진면목은 역시 장편에서 제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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