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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술사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8월
평점 :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 시리즈 ‘미야베 월드 2막’ 중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 오치카가 주인공인 세 번째 작품입니다.
‘흑백’과 ‘안주’에 이어 이번에도 오치카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그래서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할 기이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가까이 다가오면 반드시 사랑하는 남녀를 헤어지게 만드는 연못(다마토리 연못),
앞일을 예고하는 능력을 가진 신비한 산장(기치장치 저택)
사람이 감추고 있는 악행을 꿰뚫어 보는 아기(우는 아기),
사람들의 원한으로 빚어진 괴물을 퇴치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여자(피리술사),
오치카가 청자(聽者)로 참석한 연말의 괴담 모임(가랑눈 날리는 날의 괴담 모임),
그리고 절기 날이면 다른 사람의 얼굴로 뒤바뀌는 운명을 받아들인 탕아(절기 얼굴) 등
모두 개성 강한 괴담 단편 여섯 편이 수록돼있습니다.
처음 두 수록작(‘다마토리 연못’, ‘기치장치 저택’)을 읽었을 때만 해도
‘피리술사’는 전작들과 달리 다소 훈훈한(?)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괴담을 들려주는 사람은 마음 속 돌덩어리를 내려놓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괴담을 듣는 오치카 역시 사건에 개입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본분에 충실한,
그러니까 긴장감이나 무서움보다 따뜻함과 안도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뭇 으스스한 호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아쉬울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괴담 듣는 소녀 오치카’의 원래 미션에 가장 잘 어울려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일본판 표제작인 ‘우는 아기’(泣き童子)에서 작가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악의를 지닌 자만 나타나면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기는
무서운 인형이나 아기가 등장하는 영미권 호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섬뜩한 이야기인데,
엔딩마저 씁쓸해서 오치카에게 꽤 큰 후유증을 남기기도 합니다.
오치카가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괴담을 듣는 이야기인 ‘가랑눈 날리는 날의 괴담 모임’은
극중극 형태처럼 엽편(葉片)에 가까운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작품인데,
따뜻한 이야기와 소름 돋는 이야기가 골고루 섞여 있어서 흥미를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한편, 표제작 ‘피리술사’는 미야베 월드 2막의 한 작품인 ‘괴수전’을 연상시키는 작품인데,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의 원한이 빚어낸 식인 괴물의 등장이란 점도 그렇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에 의해 괴물을 퇴치하는 상황도 아주 비슷한 구도로 그려집니다.
‘피리술사’가 2011년, ‘괴수전’이 2014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걸 보면,
아무래도 ‘피리술사’ 이후 미야베 미유키가 본격적인 장편 괴수물을 구상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슷한 서사이긴 해도 장편과 단편의 고유의 매력을 나눠 가진 작품들이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틋한 마음으로 읽은 작품은 마지막 수록작인 ‘절기 얼굴’인데,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는 ‘상인’과의 거래를 통해 ‘죽은 자의 얼굴’을 갖기로 한 남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특별하면서도 의미 있는 만남들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그림자도 없는 신비한 존재인 ‘상인’은 오치카도 잘 아는 인물이라 더욱 반가웠는데,
그는 오치카 시리즈의 첫 작품인 ‘흑백’의 수록작 ‘흉가’에도 등장했던 자로
그 작품에서는 꽤 사악한 캐릭터로 묘사된 탓에 오치카 역시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에선 망자와 산 자의 절실함을 거래로 연결시켜주는 선의를 가진 존재로 그려져서
오치카로 하여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소 아쉬웠던 건 편집자 후기에 적힌 대로 오치카의 ‘연애’가 제자리를 맴돈 점입니다.
전작인 ‘안주’ 후기에서 작가 스스로 오치카의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예고한 바 있지만,
오치카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낭인무사 아오노 리이치로의 이야기는
분량도 적은데다 연애에 관한 진도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치카 시리즈는 이후 ‘삼귀’ 한 편만 남았는데,
과연 오치카와 아오노가 그 작품에서 제대로 인연을 맺게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