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이디 킬러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87분서 시리즈’ 가운데 일곱 번째 작품인 ‘레이디 킬러’는 1957년에 집필된 작품입니다.
62년 전의 작품이니 ‘아날로그’나 ‘올드함’보다도 더 골동품 같은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데
잉크롤러와 패드로 지문을 채취하는 장면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건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9일 동안 썼다고 고백한 점입니다.
“이 책에 뛰어든 순간 책에 휩쓸려 책이 이끄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레이디 킬러’는 아주 직선적이고 간결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87분서에 “오늘 밤 8시에 레이디를 죽이겠다. 어쩔 텐가?”라는 살인예고장을 보내고
코튼 호스와 스티브 카렐라 등 모든 형사가 12시간 동안 범인을 쫓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딱히 반전이나 충격적인 대목 없이 ‘레이디’라는 불특정 피해자를 찾는 탐문이 주된 내용이고,
결말에선 약간은 우연과 행운에 기댄 추리를 통해 피해자와 범인을 찾게 됩니다.
사실, 앞서 읽은 87분서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캐릭터 플레이였습니다.
애초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스티브 카렐라가 맹활약하며 멋진 모습을 보인 점이 그랬고,
세컨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코튼 호스가 87분서에 처음 와서 좌충우돌하는 내용,
또 맛깔난 조연들이 자기만의 사연을 과시하며 팀 플레이를 선보이는 이야기 등
사건 자체만큼이나 재미를 주는 캐릭터 플레이가 매력적이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레이디 킬러’는 ‘굴러온 돌’ 코튼 호스가 스티브 카렐라 대신 주인공으로 활약하는데,
캐릭터 플레이라기보다는 수사 과정을 객관적으로 담은 다큐멘터리처럼 읽혔습니다.
창녀와 가수 등 ‘레이디’ 후보를 찾아다니고, 경찰서를 지켜보는 수상한 자의 뒤를 쫓고,
몽타주 그림을 들고 막연한 탐문에 나서기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건이라도 좀 긴장감 넘치게 전개돼야 하는데,
대범한 살인예고장, 12시간이라는 시간제한, ‘레이디’라 지칭된 막연한 잠재적 피해자 등
흥미로운 코드들은 여럿 배치됐지만 정작 사건은 대체로 밋밋한 편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코튼 호스가 ‘살인 장소’를 추리해내는 대목은
살짝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이해했다 해도 다소 우연에 많이 기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9일 만에, 그것도 여름휴가 중에 “빨리 이 책을 끝내고 싶었다.”는 욕심으로 쓴 탓인지,
아니면 삐딱하게 틀어진 (것처럼 보이는) 출판사를 골탕 먹일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연에 대해서는 ‘살인자의 선택’에 실린 작가 후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읽은 87분서 시리즈 가운데에는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이었습니다.
설령 1957년이라는 출간시기를 감안하더라도 약간은 태업(?)의 냄새가 났다고 할까요?
다음 작품에선 사건도 사건이지만, 87분서의 매력적인 인물들이 펼치는
맛깔나고 화려한 캐릭터 플레이를 꼭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