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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평점 :
나오키의 삶은 그의 형 츠요시가 살인을 저지른 고교 3학년 때부터 만신창이가 됩니다.
츠요시의 범행은 나오키의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한 방편이었고 살인은 우발적인 사태였지만,
결국 그 사건은 츠요시에겐 15년의 징역살이를, 나오키에겐 진창 같은 악몽만 남기게 됩니다.
졸업을 앞둔 고교에서는 나오키에게 학업을 중단하고 떠나주길 바라고,
아르바이트 점장은 그의 존재를 불편해하며, 음악에 걸었던 청춘의 꿈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내치고 맙니다.
하지만 교도소 안의 츠요시는 그런 사정도 모른 채 매달 편지를 보내옵니다.
어느 순간부터 형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버리기 시작한 나오키는 겨우 안정된 삶을 찾지만,
그 안정은 얼마 가지도 못해 너무나도 쉽게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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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참에
모처럼 감동 서사 작품이 재출간됐다는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2010년에 출간됐음에도 아직까지 읽지 못한 작품이었는데,
내심 ‘비밀’이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억’처럼 눈물을 쏙 빼주기를 기대한 게 사실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이 작품은 ‘차별과 속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이한 건 주인공이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나 그 유족도 아닌 가해자의 동생이란 점입니다.
처음엔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형에 대한 미안함이 들기도 했지만,
‘살인자의 동생’이란 낙인 때문에 번번이 좌절을 겪게 된 나오키는
어느 순간부터 ‘애초 내게 형 따윈 없었다’는 분노와 원망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아내는 ‘살인자의 제수씨’, 딸은 ‘살인자의 조카’로 손가락질 받기에 이릅니다.
독자는 학교, 사랑, 꿈, 직장에서 매번 낙오하는 나오키를 보면서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단지 살인자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차별과 편견을 날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살인자의 가족이 있다면 나는 그(녀)를 평범하게 대할 수 있을까?
과연 속죄란 징역살이 몇 년과 진심 어린 참회를 했다면 완성될 수 있는 것일까?
등장인물 가운데 나오키의 좌절과 분노에 대해 충고해주는 인물이 있긴 하지만,
사실 그의 충고라는 것 역시 ‘정답’일 수도 없고, 명쾌하지도 않습니다.
작가 역시 작품 내내 위의 질문들에 대해 ‘이것이 정답’이란 걸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신(神)조차도 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들이다 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이야기가 다소 힘을 얻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승전결을 따라간다기보다 이런저런 상황들의 나열이란 느낌이랄까요?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 괴담집 ‘흑백’에 수록된 ‘만주사화’라는 작품에는
살인을 저지르고 섬에 유배된 형이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또, 돌아오더라도 우리와는 전혀 모르는 남남이 됐으면 하고 바라는 동생이 등장합니다.
나오키 역시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번민에 휩싸였겠지만,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태도만 보이다가 자포자기한 탓에,
또 다소 억지스럽게 눈물을 쥐어짜는 클라이맥스와 엔딩 탓에
나오키의 감정에 이입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픽션인데도 마치 감동을 목적으로 한 다큐멘터리처럼 읽힌 작품인데,
눈물 한 번 제대로 쏟아내고 싶었던 기대감은 절반도 충족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최근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거의 관심 밖의 일이 된 게 사실입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소 황당한 과학 미스터리’이거나 재출간 작품이 대부분이기 때문인데,
오히려 오래 전에 읽어서 줄거리조차 가물거리는 명작들을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린의 날개’ 이후 2년 동안 소식이 없는 ‘가가 형사 시리즈’가 기다려지는데,
일본에서도 출간이 안 된 건지, 국내출간이 늦어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