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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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전산의 새 대표이사가 이전 대표였던 우류 나오아키의 유품인 석궁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할서 형사 유사쿠는 우류 나오아키의 아들인 아키히코와 재회하며 기묘한 운명을 느낀다.

초중고교 내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바로 그 아키히코가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

또 첫사랑이었지만 비극적으로 헤어졌던 미사코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는다.

세 사람 사이에 얽힌 끈질긴 숙명,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국내 출간 기준으로) 히가시노의 초기작에 속하는 ‘숙명’을 10여년 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1993년에 발표됐고 2007년에 국내에 소개됐는데,

그 무렵은 ‘용의자 X의 헌신’, ‘붉은 손가락’ 등 히가시노에게 미쳐 있던 시절이었고

마지막 장을 덮은 작품의 여운을 음미하기도 전에 다음 작품을 허겁지겁 찾아 읽느라

좀 심하게 말하면, 머릿속에서 여러 작품의 줄거리들끼리 뒤죽박죽인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숙명’은 히가시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는데,

최근 억지스러운 과학 소재나 너무 가벼운 서사 때문에 다소 멀리하기 시작한 히가시노 대신

‘타고난 이야기꾼 히가시노’의 초창기 매력을 추억처럼 음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작품에도 ‘뇌과학’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긴 하지만

미스터리를 혼란스럽게 할 정도로 복잡하거나 전문적이지 않아서 불편함이 없었고,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과거사를 비극적으로 묘사하는데 적절하게 차용된 느낌이라

오히려 작품에 몰입하는데 알맞은 촉매제로 쓰였다는 생각입니다.

 

‘숙명’이란 제목이 뜻하는대로 이 작품의 핵심은 미스터리보다는 ‘운명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악연으로 맺어진 유사쿠와 나오아키의 관계는

20년이 지나 각각 형사와 용의자로 재회하면서 다시 한 번 운명처럼 충돌합니다.

더구나 지금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 미사코가 나오아키의 아내임을 알게 된 유사쿠는

공정한 수사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유사쿠는 ‘범인=나오아키’라는 확신 또는 그렇기를 바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유사쿠-나오아키의 갈등만큼 독자의 호기심을 이끄는 대목은 미사코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고교시절 이후 미사코는 스스로 ‘실에 의해 조종되는 듯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가정, 경제, 취업, 결혼 등 모든 것이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순조로웠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이 결코 우연이거나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실’이 혹시 시아버지가 대표였던 UR전산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UR전산의 새 대표가 살해되자 미사코 역시 사건의 후폭풍에 휘말리게 됩니다.

 

뇌과학, 운명 같은 악연, 살인사건 미스터리 등이 잘 조합된 ‘숙명’은

히가시노의 초기작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붉은 손가락’을 비롯한 ‘가가 시리즈’를 가장 좋아하고,

그 외 미스터리 중에는 ‘용의자 X의 헌신’과 ‘방황하는 칼날’을,

非미스터리 중에는 ‘백야행’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최애 작품으로 꼽는데,

다소 거칠거나 조급함이 엿보이긴 해도 이야기꾼으로서의 저력이 담긴 그의 초기작들 역시

지금 읽어도 매력이 뚝뚝 넘쳐흐르는 게 사실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 너무 급하게 읽은 탓에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의 초기작들이 많은데

‘숙명’ 덕분에 언젠가 순서대로 한 편씩 제대로 음미해봐야겠다는 욕심을 갖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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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립 잭 ㅣ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에든버러의 명망 높은 하원의원 그레고르 잭이 매음굴 불시 단속에 나선 경찰에 적발된다.

피 냄새를 맡은 언론은 거물 정치인을 무너뜨리는 데 혈안이 된다.

더구나 잭의 아내가 실종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명성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지고 만다.

잭은 함정에 빠진 것일까? 잭의 아내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존 리버스는 잭은 물론 그의 아내 리즈의 오랜 동창들에게서 불온한 기운을 느낀다.

사업가, 서점주인, 배우, 살인마 등 제각각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들을 탐문하며

존 리버스는 그들 사이의 시기와 질투, 애증과 불륜 등에 주목하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한 달 전쯤, ‘존 리버스 시리즈’의 최근작이자 여덟 번째 작품인 ‘블랙 앤 블루’를 읽었습니다.

여덟 편의 시리즈 중 유일하게 못 읽은 게 네 번째 작품인 ‘스트립 잭’이었는데,

노련한 형사로 성장하여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존 리버스의 모습을 쭉 지켜보다가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 그를 지켜보고 있자니 어딘가 풋풋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 뒤로 이어진 ‘검은 수첩’, ‘치명적 이유’, ‘렛 잇 블리드’, ‘블랙 앤 블루’는

사건의 스케일도 크고 등장인물도 꽤 많은데다 그만큼 죽음의 숫자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트립 잭’은 그 작품들에 비하면 다소 소품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또, 매번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여러 사건에 동분서주하던 리버스지만,

이번에는 거의 하나의 사건에 올인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물론 메인 사건에 얽힌 곁가지 사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리 복잡하고 어렵진 않습니다.

 

매음굴 사건과 아내의 실종으로 정치 생명이 꺼져가는 그레고리 잭을 조사하던 리버스는

모두가 그를 비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음모론’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지고,

누군가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특히 잭과 그의 아내 리즈 주변을 조사하면서

그들의 동창생들이 단순히 ‘우정’ 때문에 오랜 인연을 유지해온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자

리버스는 그들이 벌인 난잡한 파티, 그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사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긴 했지만) 사건은 소소하고, 위험한 상황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밝혀진 진실이나 범행 동기 역시 영화보다는 TV 단막극에 어울릴 법한 사이즈인데,

시리즈를 모두 읽은 입장에서 총평하자면 재미 면에서는 여느 작품보다 월등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존 리버스의 캐릭터 플레이인데,

까칠하고 완벽해 보이지만 실은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무척이나 인간적인 면모,

수시로 말장난을 벌이며 위아래 할 것 없이 당황하게 만드는 재치와 센스,

게다가 마초 기질과 공생하는 순정남 캐릭터 때문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일이 사건을 따라가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작품에서도 리버스의 캐릭터는 여전하지만

아무래도 사건도 커지고, 이야기도 복잡해지면서 그런 재미가 줄어든 게 사실인데,

모처럼 이 작품을 통해 리버스의 매력을 만끽한 것 같아서,

스릴러로서의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는 느낌입니다.

 

독자에 따라 ‘존 리버스 시리즈’에 살짝 거부감을 가진 경우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블랙 유머라든가 어딘가 명쾌하지 않은 미스터리 해법 때문으로 보이는데,

저 역시 시리즈 가운데 일부 작품에선 그런 불만을 크든 작든 느껴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덟 편이나 되는 시리즈를 놓치지 않고 읽는 이유는

역시 뭔가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백하자면 최근작인 ‘블랙 앤 블루’를 읽은 뒤 이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신작 소식(‘행잉 가든’)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존 리버스의 활약이 궁금해진 걸 보면

저에게 이 시리즈는 피할 수 없는 애증 섞인 대상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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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신년 연휴, 여섯 명의 남녀가 초대장을 받고 도호쿠의 외딴 호텔 관설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내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면서 호텔은 고립되고, 숙박객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피해자 옆에는 범인의 메시지와 함께 묘한 마크가 그려진 카드가 놓여 있고,

사람 수가 줄어드는 것에 따라 오락실의 볼링 핀이 하나씩 사라진다.

한편 도쿄에서는 쌍둥이인 점을 악용한 형제의 강도 행각이 이어진다.

쌍곡선처럼 영원히 마주치지 않을 것 같던 두 사건은 마지막에 충격적인 결말을 만들어낸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69년에서 1970년으로 넘어가는 연말연시입니다.

일본에서 출간된 게 1971년이니 무려 50년 전인데,

고전적인 클로즈드 서클에 쌍둥이 트릭까지 가세한, 그야말로 클래식 그 자체인 작품입니다.

‘관 시리즈’의 아야츠지 유키토가 추앙해 마지않는 작가라서 그런지

출판사의 홍보카피도 “‘십각관의 살인’ 이전에 ‘살인의 쌍곡선’이 있었다!”라는,

다소 파격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작가의 도전장이 눈에 띕니다.

즉, 독자에게 이 작품에서 ‘쌍둥이 트릭’을 쓰겠다는 선언과 함께

“이로써 출발점이 같아졌습니다.”라는 대담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쌍둥이 트릭’은 자칫 막판에 김이 확 빠지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트릭인데,

과연 작가가 이렇듯 공개선언까지 한 마당에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지 궁금해졌습니다.

 

도쿄에 사는 것 외엔 공통점 하나 없는 사람들이 깊은 산속 호텔에서 한 명씩 살해됩니다.

희생자가 늘어갈수록 ‘왜 우리인가?’라는 추리를 펼쳐보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생존자들간에 서로를 의심하는 마음까지 생겨나며 호텔은 생지옥으로 변합니다.

같은 시각, 도쿄에서는 쌍둥이 형제가 경찰을 농락하며 연쇄강도를 벌이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 당시 ‘아날로그 경찰’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습니다.

별개로 보이던 두 사건은 막판에 접점이 만들어지면서 한 갈래로 모이게 되지만,

경찰은 마지막까지 쌍둥이 트릭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호텔에 온 한 인물은 끊임없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언급합니다.

자신들의 상황이 그 작품 속 설정과 비슷하지 않냐, 라는 불길한 예감을 피력한 건데,

이건 애거사 크리스티에 대한 오마주 혹은 일종의 도전이라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아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교하며 읽는다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막판에 공개된 쌍둥이 트릭은 ‘고전에 어울리는 수준 아닐까?’라는

독자의 섣부른 예감을 훌쩍 뛰어넘는, 다소 놀라운 엔딩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온갖 기이한 트릭에 익숙해진 2020년의 프로페셔널 독자에겐 살짝 밍밍할 수도 있지만

작가의 도전장에 나름 투지를 가졌던 일반 독자라면 충분히 감탄하고도 남을 엔딩입니다.

1963년 데뷔 이후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한다는 작가의 내공이 새삼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다만, 범인의 범행동기와 희생자들의 선택 과정은 조금은 공감하기 어려웠고,

쌍둥이 트릭에 대한 설명은 납득은 돼도 한 방에 이해하기엔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꽤 공을 들인 범행인데, 범인에게 좀더 강렬한 동기가 부여됐더라면,

또, 희생자들이 자신들이 왜 선택됐는지 조금씩 깨달아가는 과정이 설명됐더라면,

그리고, 트릭에 대한 설명이 좀더 친절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저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 ‘북의 유즈루, 저녁하늘을 나는 학’, ‘이즈모 특급 살인’ 등

열차가 사건의 주 무대인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다소 황당한 해법이 종종 등장해서 늘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니시무라 교타로의 대표작 역시 철도를 무대로 한 트래블 미스터리라고 해서

과연 어떤 식의 열차 미스터리를 만들어냈을지 새삼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살인의 쌍곡선’이 선전한다면 그 작품들을 만나볼 기회가 분명 생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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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들 ㅣ 스토리콜렉터 82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을 때 출판사 홍보글은 물론, 가능하면 띠지나 뒷표지의 카피도 안 보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선입견이 생길 수밖에 없고 책읽기의 재미를 떨어뜨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처럼 작가의 이름이 생소할 땐 도리 없이 몇몇 정보를 확인하곤 합니다.

대략 출판사 이름, 제목과 표지가 풍기는 뉘앙스, 번역가 등의 순으로 확인하는데,

일단 북로드에서 낸 작품이라 믿음이 갔고,

책 앞날개의 작가 소개를 얼핏 보니 덴마크 작가라 더 구미가 당겼습니다.

차갑고 잔혹한 북유럽 스릴러의 새 작가와 만날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죠.

 

그런데...

초중반까지 읽는 동안 뭔가 기대와 어긋난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프닝을 장식한 살인사건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는데,

사건을 수사하는 두 주인공만 놓고 보면 왠지 코믹하고 가볍고 좌충우돌의 느낌이 드는,

말하자면 코지 미스터리의 냄새가 강하게 진동했기 때문입니다.

다 읽고 확인한 띠지와 뒷표지,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콧대 높고 깐깐한 고교 동창이자 내 여자를 빼앗아간 단 소메르달과의 공동수사라니!”

“연륜을 자랑하는 수사관 플레밍 토르프와 동물적 감각이 번득이는 광고쟁이 단 소메르달,

평생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의 7일간의 공동 수사!”

 

아마 이 홍보글을 먼저 봤다면 전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공들 캐릭터가 전형적인 코지 미스터리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우 견뎌낸(?) 초중반을 지나면 이 작품의 미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북유럽으로 유입된 제3세계 여성 노동자들의 참혹한 현실과 그녀들을 향한 추악한 마수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끔찍한 살인극과 정교한 미스터리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소개글만 보고 선택하지 않았다면 분명 후회했을 작품인데,

물론 주인공들 캐릭터 때문에 만점을 주진 못했지만 충분히 매력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피오르에 인접한 소도시 크리스티안순에서 외국인 여성 노동자의 시신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자신이 다니던 광고회사에서 첫 사건이 벌어진 탓에 엉겁결에 수사에 끼어든 단 소메르달은

절친이지만 한때 지금의 아내를 놓고 경쟁했던 수사과장 플레밍을 돕는 처지가 되는데,

문제는 아마추어인 소메르달의 ‘촉’이 워낙 뛰어나서 경찰의 입장이 곤란해졌다는 점입니다.

결국 소메르달과 플레밍은 본의 아니게 ‘각자 수사’를 진행하게 되고,

막판에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와 추리를 공유함으로써 멋지게 사건을 해결합니다.

 

사감(私感)으로 얽힌 두 주인공의 미묘한 상황을 지켜보는 일은 코지 미스터리의 재미를,

외국인 여성 노동자에 얽힌 비극적인 사건을 지켜보는 일은 스릴러의 재미를 주는 작품인데,

다소 과한 우연처럼 얽힌 등장인물 간의 관계만 제외하면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이야기라

한 번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이 콤비의 활약상을 그린 시리즈가 7편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2007년에 출간됐으니 국내 소개는 많이 늦은 편이긴 합니다.)

북로드에서 이 시리즈를 계속 출간할 계획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코지 미스터리 취향도 아니고, 차갑고 잔혹한 북유럽 스릴러의 냄새도 덜하지만

아무래도 아나 그루에라는 작가 이름을 계속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딱 꼬집을 순 없지만 독자의 흥미를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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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유치장에 수감 중인 청년 레이토는 지금껏 존재를 몰랐던 이모 치후네로부터 교도소에 가지 않게 해줄 테니 그 대신 시키는 일을 하라는 기묘한 제안을 받는다. 레이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그녀가 맡긴 건 ‘월향신사’라는 곳의 녹나무를 지키는 일. 그 녹나무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영험한 나무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러 온다. 처음엔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했지만, 그러기엔 녹나무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태도가 심상찮다. 얼마 후 레이토는 심야에 녹나무를 찾아온 여대생 사지 유미와 마주친다. 유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여기서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하는지 파헤치려 뒤쫓아 온 것. 레이토는 반은 호기심에, 반은 어쩌다보니 유미에게 협력하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사실 위의 줄거리는 550여 페이지의 본문 중 불과 50페이지 정도의 내용만 담았을 뿐입니다. 녹나무를 찾는 사람들의 사연과 녹나무가 가진 힘 자체가 주인공이 풀어야 할 ‘1차 비밀’인데, 이 중요한 단서가 거의 중반쯤이 돼서야 공개되다 보니 그것을 서평에서 언급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는 인상비평 이상의 디테일한 소개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가능하면 인터넷 서점이나 카페나 블로그의 서평을 일체 들여다보지 말고 바로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스스로 저주하는 출생의 사연 탓에 조금은 함부로 살아온 청년 레이토, 비극까진 아니더라도 애정할 수 없는 가족사를 지닌 채 홀로 큰 사업체를 이끌어온 치후네, 아버지의 수상한 움직임을 의심한 끝에 녹나무 파수꾼 레이토와 엮이게 된 유미, 그리고 보름과 그믐 무렵이면 녹나무를 찾아오는 왠지 사연 많아 보이는 기도객 등 외형만 보면 미스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도를 지니고 있지만 ‘녹나무의 파수꾼’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잔잔한 감동을 주는 휴먼 드라마입니다.

 

제각각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사연을 지닌 인물들은 녹나무를 중심으로 서로 다양한 인연을 맺습니다. 의문을 품기도, 의심을 하기도, 연정이나 동정심을 갖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각자의 비밀을 조금씩 흘려가면서 가슴에 맺혔던 것들을 풀어놓곤 합니다. 그들의 사연 대부분은 가족에 관한 것들인데, 크든 작든 회한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처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그 가족들의 이야기는 녹나무라는, 어찌 보면 미신 같은 존재 앞에서 아주 천천히 봉합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메인 스토리는 레이토가 진정한 녹나무 파수꾼이자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지만, 이모 치후네가 처한 위기, 여대생 유미의 아버지에 대한 의심, 그리고 조연으로 등장한 녹나무 기도객들의 개별적인 사연도 다소 느슨하긴 해도 독자의 눈길을 꾸준히 사로잡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여운을 이 작품에서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한 게 사실인데,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만족감은 기대치의 70~80% 정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긴장감보다는 훈훈함에 방점을 찍은 탓이 제일 컸고, 그런 탓에 느슨하거나 지루하게 읽히는 대목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곳곳에 배치된 소소한 반전들이 신선한 느낌을 주긴 했어도 뭔가 ‘짜릿한 한방’은 없었고, 갑작스레 눈두덩이 뜨끈해지는 경험은 ‘나미야~’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가 직조한 따뜻한 이야기로서의 미덕은 충분했습니다. 과학과 SF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실망한 나머지 이젠 그의 작품이라도 가려서 읽는 편이지만 ‘녹나무의 파수꾼’은 하루쯤 시간을 내서 찬찬히 그 따뜻함을 만끽할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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