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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평점 :
UR전산의 새 대표이사가 이전 대표였던 우류 나오아키의 유품인 석궁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할서 형사 유사쿠는 우류 나오아키의 아들인 아키히코와 재회하며 기묘한 운명을 느낀다.
초중고교 내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바로 그 아키히코가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
또 첫사랑이었지만 비극적으로 헤어졌던 미사코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는다.
세 사람 사이에 얽힌 끈질긴 숙명,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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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간 기준으로) 히가시노의 초기작에 속하는 ‘숙명’을 10여년 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1993년에 발표됐고 2007년에 국내에 소개됐는데,
그 무렵은 ‘용의자 X의 헌신’, ‘붉은 손가락’ 등 히가시노에게 미쳐 있던 시절이었고
마지막 장을 덮은 작품의 여운을 음미하기도 전에 다음 작품을 허겁지겁 찾아 읽느라
좀 심하게 말하면, 머릿속에서 여러 작품의 줄거리들끼리 뒤죽박죽인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숙명’은 히가시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는데,
최근 억지스러운 과학 소재나 너무 가벼운 서사 때문에 다소 멀리하기 시작한 히가시노 대신
‘타고난 이야기꾼 히가시노’의 초창기 매력을 추억처럼 음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작품에도 ‘뇌과학’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긴 하지만
미스터리를 혼란스럽게 할 정도로 복잡하거나 전문적이지 않아서 불편함이 없었고,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과거사를 비극적으로 묘사하는데 적절하게 차용된 느낌이라
오히려 작품에 몰입하는데 알맞은 촉매제로 쓰였다는 생각입니다.
‘숙명’이란 제목이 뜻하는대로 이 작품의 핵심은 미스터리보다는 ‘운명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악연으로 맺어진 유사쿠와 나오아키의 관계는
20년이 지나 각각 형사와 용의자로 재회하면서 다시 한 번 운명처럼 충돌합니다.
더구나 지금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 미사코가 나오아키의 아내임을 알게 된 유사쿠는
공정한 수사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유사쿠는 ‘범인=나오아키’라는 확신 또는 그렇기를 바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유사쿠-나오아키의 갈등만큼 독자의 호기심을 이끄는 대목은 미사코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고교시절 이후 미사코는 스스로 ‘실에 의해 조종되는 듯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가정, 경제, 취업, 결혼 등 모든 것이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순조로웠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이 결코 우연이거나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실’이 혹시 시아버지가 대표였던 UR전산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UR전산의 새 대표가 살해되자 미사코 역시 사건의 후폭풍에 휘말리게 됩니다.
뇌과학, 운명 같은 악연, 살인사건 미스터리 등이 잘 조합된 ‘숙명’은
히가시노의 초기작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붉은 손가락’을 비롯한 ‘가가 시리즈’를 가장 좋아하고,
그 외 미스터리 중에는 ‘용의자 X의 헌신’과 ‘방황하는 칼날’을,
非미스터리 중에는 ‘백야행’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최애 작품으로 꼽는데,
다소 거칠거나 조급함이 엿보이긴 해도 이야기꾼으로서의 저력이 담긴 그의 초기작들 역시
지금 읽어도 매력이 뚝뚝 넘쳐흐르는 게 사실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 너무 급하게 읽은 탓에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의 초기작들이 많은데
‘숙명’ 덕분에 언젠가 순서대로 한 편씩 제대로 음미해봐야겠다는 욕심을 갖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