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파수꾼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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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장에 수감 중인 청년 레이토는 지금껏 존재를 몰랐던 이모 치후네로부터 교도소에 가지 않게 해줄 테니 그 대신 시키는 일을 하라는 기묘한 제안을 받는다. 레이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그녀가 맡긴 건 월향신사라는 곳의 녹나무를 지키는 일. 그 녹나무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영험한 나무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러 온다. 처음엔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했지만, 그러기엔 녹나무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태도가 심상찮다. 얼마 후 레이토는 심야에 녹나무를 찾아온 여대생 사지 유미와 마주친다. 유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여기서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하는지 파헤치려 뒤쫓아 온 것. 레이토는 반은 호기심에, 반은 어쩌다보니 유미에게 협력하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사실 위의 줄거리는 550여 페이지의 본문 중 불과 50페이지 정도의 내용만 담았을 뿐입니다. 녹나무를 찾는 사람들의 사연과 녹나무가 가진 힘 자체가 주인공이 풀어야 할 ‘1차 비밀인데, 이 중요한 단서가 거의 중반쯤이 돼서야 공개되다 보니 그것을 서평에서 언급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는 인상비평 이상의 디테일한 소개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가능하면 인터넷 서점이나 카페나 블로그의 서평을 일체 들여다보지 말고 바로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스스로 저주하는 출생의 사연 탓에 조금은 함부로 살아온 청년 레이토, 비극까진 아니더라도 애정할 수 없는 가족사를 지닌 채 홀로 큰 사업체를 이끌어온 치후네, 아버지의 수상한 움직임을 의심한 끝에 녹나무 파수꾼 레이토와 엮이게 된 유미, 그리고 보름과 그믐 무렵이면 녹나무를 찾아오는 왠지 사연 많아 보이는 기도객 등 외형만 보면 미스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도를 지니고 있지만 녹나무의 파수꾼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잔잔한 감동을 주는 휴먼 드라마입니다.

 

제각각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사연을 지닌 인물들은 녹나무를 중심으로 서로 다양한 인연을 맺습니다. 의문을 품기도, 의심을 하기도, 연정이나 동정심을 갖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각자의 비밀을 조금씩 흘려가면서 가슴에 맺혔던 것들을 풀어놓곤 합니다. 그들의 사연 대부분은 가족에 관한 것들인데, 크든 작든 회한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처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그 가족들의 이야기는 녹나무라는, 어찌 보면 미신 같은 존재 앞에서 아주 천천히 봉합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메인 스토리는 레이토가 진정한 녹나무 파수꾼이자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지만, 이모 치후네가 처한 위기, 여대생 유미의 아버지에 대한 의심, 그리고 조연으로 등장한 녹나무 기도객들의 개별적인 사연도 다소 느슨하긴 해도 독자의 눈길을 꾸준히 사로잡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여운을 이 작품에서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한 게 사실인데,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만족감은 기대치의 70~80% 정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긴장감보다는 훈훈함에 방점을 찍은 탓이 제일 컸고, 그런 탓에 느슨하거나 지루하게 읽히는 대목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곳곳에 배치된 소소한 반전들이 신선한 느낌을 주긴 했어도 뭔가 짜릿한 한방은 없었고, 갑작스레 눈두덩이 뜨끈해지는 경험은 나미야~’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가 직조한 따뜻한 이야기로서의 미덕은 충분했습니다. 과학과 SF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실망한 나머지 이젠 그의 작품이라도 가려서 읽는 편이지만 녹나무의 파수꾼은 하루쯤 시간을 내서 찬찬히 그 따뜻함을 만끽할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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