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 개정판 ㅣ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알라딘에서 중고서적을 검색할 때마다 제목 때문에 자꾸만 눈길이 끌리던 작품이었는데

얼마 전 장바구니를 채워놓고 보니 배송비 무료 혜택까지 딱 2,000원이 남았기에

더는 고민하지 않고 얼른 픽업해버렸습니다.

 

아름답고 교훈적인 동화나 민담이 원래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세월을 거치면서 위험하고 음란한 부분들이 정제됐다는 건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가령, 친숙하고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실은 소시오패스나 사악한 욕망덩어리였다든지

아름답고 고귀한 주인공들이 실은 음란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든지

또는,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까지만 알고 있는 이야기가

실은 그 뒤에 끔찍하고 추악한 ‘진짜 엔딩’을 갖고 있다든지....

고백하자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오리지널’에 대한 궁금증이 부쩍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아마 이 작품이 내내 제 눈길을 끌었던 건 바로 그 궁금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인 기류 마사오는 두 명의 작가 - 우에다 가요코, 쓰쓰미 사치코 – 의 필명입니다.

프랑스 유학파인 두 작가는 특이하게도 유럽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에피소드에 주력했는데

‘악녀대전’, ‘우아하고 잔혹한 악녀들’, ‘프랑스의 잔혹한 이야기들’, ‘아름다운 고문의 책’ 등

집필한 작품 제목만 봐도 그녀들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머리말’에 따르면 ‘그림 동화’ 초판의 잔혹하고 거친 표현 방법을 그대로 살리면서

문학, 역사학, 정신분석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의 해석을 참고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상상력을 곁들여 새롭고 생생한 ‘그림 동화’를 엮었다고 합니다.

 

시리즈 1편인 이 작품엔 ‘백설공주’, ‘신데렐라’, ‘숲속의 잠자는 공주’ 등 친숙한 동화는 물론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모티브로 삼은 끔찍한 이야기 ‘파란 수염’까지 여섯 편이 실려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주인공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파격적인 내용들이 전개됩니다.

 

‘백설공주’의 경우 근친상간, 비속살해, 난잡하고 문란한 남녀관계, 처절한 복수가 등장해서

오리지널과 동화 사이의 간격이 (전혀 다른 작품인 것처럼) 멀게 느껴졌고,

‘개구리 왕자님’과 ‘숲속의 잠자는 공주’는 일반인들이 익히 아는 엔딩 그 이후의 이야기,

즉 행복하게 잘 살 줄 알았던 주인공들의 뜻밖의 후일담이 그려져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파란 수염’은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하성란), ‘푸른 수염’(아멜리 노통브),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제인 니커선) 등 많은 작품에 모티브를 준 오리지널인데

동화라기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공포괴담에 가까운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고,

‘노간주나무’ 역시 짧은 분량 안에 농도 짙은 호러 판타지가 담긴 작품입니다.

 

해설에 따르면 그림 형제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이들의 작품에 대한 비난과 반발이 심했고

그런 탓에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고육지책으로 캐릭터나 사건을 꽤 순화했다고 하는데,

특이한 건 성(性)에 관계된 설정들은 대폭 삭제된 반면

살인, 고문, 인육 등 잔인한 폭력 장면들은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았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도덕적 잣대의 성격이 어땠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순화되고 삭제된 게 이 정도라면 오리지널에 그려졌던 성적(性的) 설정들이

얼마나 기괴하고 노골적이었는지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흥미 위주의 작품인데다 기대만큼 파격적이지 않았던 탓에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그림 동화’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무래도 일반독자 입장에선 싼 티 나는 듯한 장난스런 표지 때문에

이 작품을 집어 드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번역본은 일본 원작 표지를 반전만 한 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또 ‘19금’ 판정을 받은 것 역시 독자들의 선입견에 한몫을 한 것 같은데,

대부분 절판 상태라 중고서점에서밖엔 구할 수 없는 상태지만

관심 있는 독자라면 시리즈(모두 세 편) 중 한 편쯤은 장바구니에 넣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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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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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은 건 2003년 문예출판사에서 낸 판본이지만 오래전부터 절판 상태라서

부득이하게 현재 판매중인 열린책들 판본에 서평을 올립니다.

다행히 번역가가 같은 분이어서 동일한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만, 서평에 인용한 본문과 그것이 수록된 페이지는 문예출판사 판본에 따랐습니다.)

 

우선 고백할 것은 제목만큼은 여느 고전이나 명작 못잖게 자주 들어봤어도

실제로 읽기 전까지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포스터 속의 그레고리 펙을 봤던 기억 탓에,

또 제목이 풍기는 심상찮은 뉘앙스 탓에 고전 스파이 스릴러라고 예단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그 예단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지만 말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읽기 전에 상세한 소개글을 찾아보지 않았다는 점인데,

만약 소개글을 봤더라면 “1930년대를 배경으로 인종차별을 고발한 법정 스릴러”라는,

앞서 저지른 터무니없는 예단보다 더 잘못된 기대감을 가졌을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는 “미국 남부 앨라바마의 메이콤이란 소도시에서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소신껏 흑인 용의자를 변호하는 이야기”라고 돼있는데,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제대로 대변한 소개글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아니라 그의 딸 진 루이즈 핀치이며

일명 스카웃이라 불린 그 소녀가 7살부터 대략 3년 동안 겪은 다사다난한 사건들과 함께

몸과 마음이 소녀에서 ‘숙녀’로 도약하는 성장물로 보는 게 더 정확한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스카웃은 그 또래답게 천방지축이지만 뚜렷한 소신과 고집을 가진 소녀입니다.

나이답지 않은 똘똘함과 함께 영악한 악동 기질까지 지닌 그녀는

은둔생활 중인 이웃 아서 래들리를 집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오빠 젬과 덫을 놓기도 하고

당돌한 언행으로 흑인 식모 캘퍼니아는 물론 ‘고상한 이웃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근엄하면서도 자식과의 소통을 중요시 여기는 아버지 애티커스 덕분에 올곧게 자라납니다.

그런 그녀는 조금씩 세상의 민낯들과 마주하면서 크고 작은 혼란들을 겪게 되는데,

그때마다 아버지 애티커스는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남을 이야기들을 남겨주곤 합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거야.” (p60)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도 해보지 않고 이기려는 노력조차 포기해버릴 까닭은 없어.” (p147)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p173)

 

스카웃은 아버지가 변호를 맡은 ‘흑인 톰 로빈슨이 백인여성을 강간한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여전히 통용되던 백인중심의 부조리한 가치관을 직시하게 됩니다.

태어난 이후 ‘흑백의 구분’이라는 사회현상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온 스카웃이지만

메이콤 사람들이 흑인 용의자 톰 로빈슨을 변호하는 아버지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심지어 떼를 지어 위험천만하고 폭력적인 위협까지 가해오자

적잖은 충격과 함께 자신이 속한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1930년대 미국 남부 소도시의 갈등과 혼란, 그리고 첨예한 인종차별 문제는

어린 소녀 스카웃의 눈을 통해 그려진 덕분에 더더욱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작가가 스카웃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교훈은 어쩌면 거대하고 심오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서 내내 그녀의 좌표가 돼줄 소박하고 진정성 어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 애티커스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변호하려 했던 흑인 톰 로빈슨이나

스카웃이 집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괴롭혔던 이웃의 은둔남 아서 래들리 같은 인물들을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그래서 함부로 죽여선 안 되는 앵무새’에 비유하여 지은 제목을 보면

작가는 스카웃에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다지고 굳건하게 만들기를,

그래서 올곧고 정의롭고 강한 ‘숙녀’로 성장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독자에겐 낯선 인종차별이라는 소재가 전면에 포진한 탓에

미국 (또는 흑백 갈등이 작동하고 있는 나라)의 독자만큼 푹 빠져들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1위”로 꼽힌 일이나

첫 출간 후 6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적어도 영미권에서 이 작품이 갖는 절대적인 가치는 분명히 인정해야 될 거란 생각입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위대한 개츠비’ 등 최근 읽은 영미권의 ‘고전급 명작들’과 마찬가지로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감이나 여운을 맛보지 못하긴 했지만

나름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읽기 시간이 됐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장르물에 익숙해진 나머지 너무 빨리 책장을 넘긴 게 살짝 후회됐는데,

그래선지 하퍼 리가 이 작품 이후 55년 만에 출간한 후속편 격인 ‘파수꾼’을 읽을 때는

20대가 된 스카웃의 이야기를 조금은 더 꼼꼼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성인이 된 그녀가 자신의 양심의 파수꾼이던 아버지 충돌하며 갈등하는 내용이라고 하니

어쩌면 좀더 공감하기 쉬울 수도, 또 훨씬 더 무겁고 깊은 여운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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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산책 ㅣ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네 번째 작품인 ‘밤 산책’입니다.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클래식의 품격과 시대극의 매력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특이한 건 사건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3류 추리소설가 야시로 도라타라는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입니다.

과거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렸던 후루가미 家를 방문한 야시로는

그곳에서 직접 겪은 참극의 전모를 1인칭 시점 소설 형식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참극의 공포가 절정에 이를 때쯤 긴다이치 코스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옥문도’처럼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부터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다 읽고 나면 왜 이런 설정과 형식이 필요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랫동안 영주의 지위에 있었으나 이제는 거의 몰락한 지경의 후루가미 家와

한때 충성스런 가신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후루가미 家를 장악한 센고쿠 家 사람들이 뒤얽힌

복잡하고 비극적인 가족사 및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연이은 참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불륜과 근친상간, 역전된 주종 관계, 꼽추병과 몽유병이라는 불행한 유전병 등

두 가문의 이면에는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악연의 요소들이 잔뜩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후루가미 家의 외동딸 야치요의 결혼상대자를 결정하는 시점에 이르러

그 악연의 요소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목이 잘린 시체가 줄줄이 발견되고 맙니다.

후루가미 家에 초대받은 3류 추리소설가 야시로 도라타는 이 참극을 낱낱이 목격하는데,

그는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소설로 기록하면서 동시에 범인의 정체를 직접 찾아 나섭니다.

 

야시로에겐 두 가문의 일족들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소름 돋는 일입니다.

늦은 밤의 숲을 산책하는 몽유병 여인, 그 여인의 결혼상대인 무례하고 오만한 화가,

술만 마시면 자기도 모르게 칼을 휘두르는 노인, 요염함을 전신으로 내뿜는 옛 영주의 부인,

그리고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꼽추의 유전자로 인해 괴로워하는 청년 등

누구 하나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기괴한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음침한 저택에서 목 잘린 시체 사건 같은 건 진작 여러 차례 일어났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살인이 미궁으로 빠진 뒤 경찰마저 손을 놓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후루가미 家의 옛 영지인 오카야마 현 귀수촌(鬼首村)에서 똑같은 참극이 벌어지고,

그제야 우리의 주인공 긴다이치 코스케가 사건에 뛰어들게 됩니다.

(귀수촌은 ‘악마의 공놀이 노래’의 주 무대이기도 한데 두 작품의 내용이 연결되진 않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등장은 제법 늦는 편입니다.

거의 중반 이후 쯤에나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활약상이 많이 보이진 않습니다.

독자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기록해온 추리소설가 야시로의 도움을 받은 것 외엔

그가 별도로 꼼꼼한 조사를 벌이는 장면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남긴 결정적 오류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 챈 긴다이치 코스케는

떠들썩하게 범인을 지목하는 대신 조용히 범인의 뒤통수를 후려칩니다.

 

서평들을 살펴보면 독자마다 이 작품의 막판 반전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걸 알 수 있는데

야박한 평점을 준 독자들은 반전 자체가 매끄럽지 않고 억지스럽다고 평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작가가 공정한 게임을 펼치지 않고 변명하는 것 같았다고 평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 흐릿한 기억이긴 해도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도 큰 거부감이 없었고

오랜만에 다시 읽은 이번에도 막판 반전이 꽤 짜릿하게 느껴졌는데

이런 호불호의 차이를 다른 독자들의 서평들을 통해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어쩌면 제가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라서 무조건 좋게만 평가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작가의 팬 사이트인 요코미조 월드에서 ‘옥문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제가 잘못 읽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해설’의 제목이 ‘탐미적이고 기괴한 논리의 향연’인데

머리 잘린 시체들이 등장하는 끔찍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퇴폐미가 물씬 풍기는 것은 물론

막판에 드러난 기괴하지만 애처로운 한 인간의 사연과 욕망을 떠올려보면

더없이 적절한 ‘작품해설’의 제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바로 이 점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참된 매력인데

디지털 시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이 끝내주는 매력을

오랫동안 꾸준히 만끽하고 싶은 건 아마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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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없는 꿈을 꾸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2012년 147회 나오키 상을 수상한 츠지무라 미즈키의 단편집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열쇠 없는 꿈을 꾸다’란 작품은 없습니다.

즉 수록작 중 한 편을 표제작으로 삼은 게 아니라

‘열쇠 없는 꿈을 꾸다’라는 주제를 담은 다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는 뜻입니다.

 

‘열쇠 없는 꿈’이란 말은 다소 모호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룰 수 없는 꿈? 허망한 꿈? 코앞에 두고도 놓치는 꿈?

뭐가 됐든 다소 부정적이거나 불가능한 뉘앙스가 풍기는 제목에다

“꿈꾸는 것도 죄가 되나요?”라는 심플한 띠지의 카피 덕분에

꿈 때문에 상처 받거나 좌절하거나 불행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 편 모두 주인공은 여자입니다.

‘꿈’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첫 번째 수록작 ‘니시노 마을의 도둑’을 제외하곤

나머지 네 편의 주인공들은 소박하든 속물적이든 애절하든 절실하든

각자 이루고 싶은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을 위해 열쇠 없는 꿈을 꾸는 인물들입니다.

 

어머니로부터 결혼 압력을 받는 36세의 요코의 꿈은 ‘그럴듯한 남자’입니다.

딱히 결혼에 목 맨 건 아니지만 근거 없는 자존감 하나로 센 척 버티는 여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속물적인 요코의 행보는 번번이 스스로를 비참하게만 만들뿐입니다.

‘꿈’을 위한 열쇠를 스스로 걷어차는 인물이라고 할까요? (‘쓰와부키 미나미 지구의 방화’)

 

달콤한 말로 자신을 유혹했던 남자가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학대남’으로 변했지만

미에는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고 남자의 태도를 이해하려고 애써봅니다.

그 남자는 한때 자신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의 뒤늦은 후회는 끔찍한 비극을 일으키고 맙니다. (‘미야다니 단지의 도망자’)

 

미쿠의 꿈은 일러스트레이터지만 재능도, 행운도 없던 그녀는 ‘교사’라는 현실과 타협합니다.

그녀의 또 하나의 꿈은 대학에서 만난 연인 유다이입니다.

하지만 유다이는 누구도 납득 못할 황당한 꿈을 꾸는 남자입니다.

미쿠는 그 꿈을 깨부수고 싶습니다. 그리고 유다이가 자신에게 안주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미쿠의 꿈과 바람에 맞는 열쇠는 없습니다. (‘세리바 대학의 꿈과 살인’)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요시에의 간절하고 소박한 꿈이었습니다.

어렵사리 그 꿈을 이루고 잠시 기뻐했지만 실제 육아의 현실은 지옥과도 같았고

이제 갓 10달이 된 딸 사쿠라는 어느새 요시에의 악몽이 됐습니다.

그런 사쿠라가 유모차에 탄 채 백화점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기미모토 가의 유괴’)

 

이렇게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줄거리를 일일이 서평에서 소개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열쇠 없는 꿈’에 대한 두루뭉술하고 형이상학적이고 재미없는 담론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겼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보기에 따라 주인공들은 아주 평범한 것 같기도, 또는 반대로 아주 특이한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평범함과 특이함은 그녀들이 꾸는 꿈에 달렸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그릇에 어울리지 않는 꿈,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왜곡시킬 정도로 집착에 가까운 꿈,

이뤄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느다란 희망 하나로 연명시키는 꿈 등은

평범한 사람조차 아주 쉽게 특이하고 별난 사람으로 변질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크든 작든 ‘꿈’이란 걸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조금씩은 이런 특질들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다들 말려도 자청해서 열쇠 없는 꿈을 선택하든, 한참 꿈을 꾸다가 열쇠를 잃어버리든,

벼랑 끝에 다다른 뒤에야 손에 쥐고 있는 게 틀린 열쇠임을 깨닫든 말이죠.

츠지무라 미즈키가 직조한 ‘꿈’ 이야기는 그래서 더 씁쓸하게 읽힌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터리 작가답게 츠지무라 미즈키는 ‘꿈’에 대한 이야기 속에 범죄를 잘 심어놓았습니다.

도둑, 방화, 폭력, 살인, 유괴 등 주인공들이 휘말리는 사건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열쇠 없는 꿈을 꾸다’라는 제목이 풍기는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뉘앙스는

주인공들이 휘말리는 끔찍한 사건들 덕분에 더더욱 그 농도와 밀도가 짙어집니다.

물론 희망적인 엔딩을 다룬 작품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열쇠 없는 꿈 앞에서 허우적대거나 붕괴되거나 초라해지는 주인공들을 그리고 있어서

수시로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읽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이 나오키 상을 받았다는 건 다소 의외의 일로 여겨졌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와 아홉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도 그만한 ‘포스’는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열쇠 없는 꿈’이라는 주제도 모호했고 이야기의 깊이나 무게감은 얕고 가벼워 보였는데

술술 잘 읽히는 건 분명하지만 나오키 상에 걸맞은 인상과 여운까지 받진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오키 상 수상작 가운데 이런 느낌을 받은 작품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자주 찾아 읽는 작가이긴 해도 매력 넘쳤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늘 2%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부족하고 아쉽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열쇠 없는 꿈을 꾸다’는 확실히 2%보다는 좀더 많이 아쉬웠던 작품인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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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2008년 노블마인에서 출간된 이후 절판 상태였다가 13년 만에 재출간된 작품입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한국에는 ‘야시’ 이후 두 번째로 소개됐던 작품인데

현실과 이계(異界)를 넘나드는 기묘한 판타지를 다룬 ‘야시’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이자

(줄거리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천둥의 계절, 눈에 보이지 않는 불사의 새, 살인에 탐닉한 소시오패스,

그리고 누명을 쓴 채 이계를 탈출하려는 10대 소년 겐야와 그를 쫓는 귀신조의 추격전 등

판타지와 액션 스릴러의 코드들이 한데 버무려진 특이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도에 나타나지도 않으며 바깥세계(현실세계)와는 다른 영역의 공간인 바닷가 마을 ‘온’.

겨울과 봄 사이의 ‘신이 오시는 심판의 계절’이라 불리는 천둥의 계절에 누나를 잃은 뒤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람의 정령(바람와이와이)에 씌인 채 살아가던 ‘온’의 소년 겐야는

출입이 금기시되는 유령들의 처소인 무덤촌에 드나들던 중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 비밀은 급기야 겐야에게 누명까지 쓰게 만들었고 결국 겐야는 ‘온’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귀신조의 추격과 야수의 습격에 노출된 겐야의 여정은 그저 험난하기만 할뿐입니다.

또, 바깥세계 출신인 자신이 ‘온’에 살게 된 사연과 가족이 맞이했던 참극을 알게 된 겐야는

‘바람와이와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파탄 낸 악령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합니다.

 

줄거리를 정리해놓고 보니 약간 비현실적 배경에 담긴 단순한 액션스릴러처럼 보이는데,

물론 이야기의 가장 큰 맥은 ‘겐야의 도주극과 복수극’인 게 분명하지만

실은 줄거리에 담지 못한 쓰네카와 고타로 식 판타지가 이 작품의 백미 중의 백미입니다.

바깥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건 아니지만 시공간의 개념이 완전히 다른 특별한 장소 ‘온’,

‘온’ 안에서도 산 자들의 공간과 완벽히 차단된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무덤촌’,

천둥의 계절마다 사람들을 잡아가는 공포의 집단 ‘귀신조’,

그리고, 풍령조(風靈鳥), 즉 바람의 정령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크기의 불사의 새이자

생명이 깃든 것에 내려앉아 그 생명체에게 신비한 힘과 기운을 갖게 하는 ‘바람와이와이’ 등

쓰네카와 고타로만의 독특한 피조물과 공간들이 읽는 내내 신비감과 긴장감을 내뿜습니다.

 

덧붙여, 세컨드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10대 소녀 아카네와 ‘바람와이와이’의 특별한 인연,

‘무덤촌’의 문지기로서 유령들을 상대하다가 겐야에게 뜻하지 않은 도움을 주게 되는 오도,

‘온’ 출신으로 부활을 거듭하며 100살 넘게 살아온 희대의 소시오패스 도바 무네키,

그리고 바깥세계를 향한 겐야의 여정에 함께 하게 된 또래 소녀 호다카의 기구한 사연 등

중요한 조연들의 이야기도 겐야 이야기 못잖게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최근 읽은 ‘멸망의 정원’이 독특한 이계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 판타지를 그린 탓에 아쉬움이 남았던 게 사실인데,

‘천둥의 계절’은 그보다 더한 이계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쉽고 선명한 감정선과 공감률 100%의 캐릭터들과 액션물을 방불케 하는 스토리 덕분에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또, 전에 읽은 장편(‘금색기계’, ‘멸망의 정원’)과 단편집(‘야시’, ‘가을의 감옥’) 모두

특별한 시공간과 거기에 휘말린 평범한 인물들의 괴담들을 그린 매력적인 작품들이었지만

‘천둥의 계절’은 쓰네카와 고타로의 단편의 매력과 장편의 힘이 골고루 잘 배어든 작품입니다.

 

판타지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쓰네카와 고타로의 작품만큼은 놓치지 않고 읽게 되는 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장르물 최고의 덕목을 ‘재미’와 ‘여운’으로 여기는 제가 그의 작품에 빠져드는 걸 보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마성과도 같은 특별함이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극단적으론 황당한 만화처럼 여길 독자도 있겠지만

단편집인 ‘야시’를 흥미롭게 읽은 독자라면 여지없이 빠져들 게 확실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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