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밤 산책 ㅣ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12월
평점 :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네 번째 작품인 ‘밤 산책’입니다.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클래식의 품격과 시대극의 매력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특이한 건 사건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3류 추리소설가 야시로 도라타라는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입니다.
과거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렸던 후루가미 家를 방문한 야시로는
그곳에서 직접 겪은 참극의 전모를 1인칭 시점 소설 형식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참극의 공포가 절정에 이를 때쯤 긴다이치 코스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옥문도’처럼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부터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다 읽고 나면 왜 이런 설정과 형식이 필요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랫동안 영주의 지위에 있었으나 이제는 거의 몰락한 지경의 후루가미 家와
한때 충성스런 가신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후루가미 家를 장악한 센고쿠 家 사람들이 뒤얽힌
복잡하고 비극적인 가족사 및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연이은 참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불륜과 근친상간, 역전된 주종 관계, 꼽추병과 몽유병이라는 불행한 유전병 등
두 가문의 이면에는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악연의 요소들이 잔뜩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후루가미 家의 외동딸 야치요의 결혼상대자를 결정하는 시점에 이르러
그 악연의 요소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목이 잘린 시체가 줄줄이 발견되고 맙니다.
후루가미 家에 초대받은 3류 추리소설가 야시로 도라타는 이 참극을 낱낱이 목격하는데,
그는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소설로 기록하면서 동시에 범인의 정체를 직접 찾아 나섭니다.
야시로에겐 두 가문의 일족들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소름 돋는 일입니다.
늦은 밤의 숲을 산책하는 몽유병 여인, 그 여인의 결혼상대인 무례하고 오만한 화가,
술만 마시면 자기도 모르게 칼을 휘두르는 노인, 요염함을 전신으로 내뿜는 옛 영주의 부인,
그리고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꼽추의 유전자로 인해 괴로워하는 청년 등
누구 하나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기괴한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음침한 저택에서 목 잘린 시체 사건 같은 건 진작 여러 차례 일어났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살인이 미궁으로 빠진 뒤 경찰마저 손을 놓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후루가미 家의 옛 영지인 오카야마 현 귀수촌(鬼首村)에서 똑같은 참극이 벌어지고,
그제야 우리의 주인공 긴다이치 코스케가 사건에 뛰어들게 됩니다.
(귀수촌은 ‘악마의 공놀이 노래’의 주 무대이기도 한데 두 작품의 내용이 연결되진 않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등장은 제법 늦는 편입니다.
거의 중반 이후 쯤에나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활약상이 많이 보이진 않습니다.
독자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기록해온 추리소설가 야시로의 도움을 받은 것 외엔
그가 별도로 꼼꼼한 조사를 벌이는 장면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남긴 결정적 오류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 챈 긴다이치 코스케는
떠들썩하게 범인을 지목하는 대신 조용히 범인의 뒤통수를 후려칩니다.
서평들을 살펴보면 독자마다 이 작품의 막판 반전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걸 알 수 있는데
야박한 평점을 준 독자들은 반전 자체가 매끄럽지 않고 억지스럽다고 평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작가가 공정한 게임을 펼치지 않고 변명하는 것 같았다고 평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 흐릿한 기억이긴 해도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도 큰 거부감이 없었고
오랜만에 다시 읽은 이번에도 막판 반전이 꽤 짜릿하게 느껴졌는데
이런 호불호의 차이를 다른 독자들의 서평들을 통해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어쩌면 제가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라서 무조건 좋게만 평가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작가의 팬 사이트인 요코미조 월드에서 ‘옥문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제가 잘못 읽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해설’의 제목이 ‘탐미적이고 기괴한 논리의 향연’인데
머리 잘린 시체들이 등장하는 끔찍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퇴폐미가 물씬 풍기는 것은 물론
막판에 드러난 기괴하지만 애처로운 한 인간의 사연과 욕망을 떠올려보면
더없이 적절한 ‘작품해설’의 제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바로 이 점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참된 매력인데
디지털 시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이 끝내주는 매력을
오랫동안 꾸준히 만끽하고 싶은 건 아마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