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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2008년 노블마인에서 출간된 이후 절판 상태였다가 13년 만에 재출간된 작품입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한국에는 ‘야시’ 이후 두 번째로 소개됐던 작품인데
현실과 이계(異界)를 넘나드는 기묘한 판타지를 다룬 ‘야시’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이자
(줄거리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천둥의 계절, 눈에 보이지 않는 불사의 새, 살인에 탐닉한 소시오패스,
그리고 누명을 쓴 채 이계를 탈출하려는 10대 소년 겐야와 그를 쫓는 귀신조의 추격전 등
판타지와 액션 스릴러의 코드들이 한데 버무려진 특이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도에 나타나지도 않으며 바깥세계(현실세계)와는 다른 영역의 공간인 바닷가 마을 ‘온’.
겨울과 봄 사이의 ‘신이 오시는 심판의 계절’이라 불리는 천둥의 계절에 누나를 잃은 뒤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람의 정령(바람와이와이)에 씌인 채 살아가던 ‘온’의 소년 겐야는
출입이 금기시되는 유령들의 처소인 무덤촌에 드나들던 중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 비밀은 급기야 겐야에게 누명까지 쓰게 만들었고 결국 겐야는 ‘온’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귀신조의 추격과 야수의 습격에 노출된 겐야의 여정은 그저 험난하기만 할뿐입니다.
또, 바깥세계 출신인 자신이 ‘온’에 살게 된 사연과 가족이 맞이했던 참극을 알게 된 겐야는
‘바람와이와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파탄 낸 악령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합니다.
줄거리를 정리해놓고 보니 약간 비현실적 배경에 담긴 단순한 액션스릴러처럼 보이는데,
물론 이야기의 가장 큰 맥은 ‘겐야의 도주극과 복수극’인 게 분명하지만
실은 줄거리에 담지 못한 쓰네카와 고타로 식 판타지가 이 작품의 백미 중의 백미입니다.
바깥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건 아니지만 시공간의 개념이 완전히 다른 특별한 장소 ‘온’,
‘온’ 안에서도 산 자들의 공간과 완벽히 차단된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무덤촌’,
천둥의 계절마다 사람들을 잡아가는 공포의 집단 ‘귀신조’,
그리고, 풍령조(風靈鳥), 즉 바람의 정령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크기의 불사의 새이자
생명이 깃든 것에 내려앉아 그 생명체에게 신비한 힘과 기운을 갖게 하는 ‘바람와이와이’ 등
쓰네카와 고타로만의 독특한 피조물과 공간들이 읽는 내내 신비감과 긴장감을 내뿜습니다.
덧붙여, 세컨드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10대 소녀 아카네와 ‘바람와이와이’의 특별한 인연,
‘무덤촌’의 문지기로서 유령들을 상대하다가 겐야에게 뜻하지 않은 도움을 주게 되는 오도,
‘온’ 출신으로 부활을 거듭하며 100살 넘게 살아온 희대의 소시오패스 도바 무네키,
그리고 바깥세계를 향한 겐야의 여정에 함께 하게 된 또래 소녀 호다카의 기구한 사연 등
중요한 조연들의 이야기도 겐야 이야기 못잖게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최근 읽은 ‘멸망의 정원’이 독특한 이계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 판타지를 그린 탓에 아쉬움이 남았던 게 사실인데,
‘천둥의 계절’은 그보다 더한 이계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쉽고 선명한 감정선과 공감률 100%의 캐릭터들과 액션물을 방불케 하는 스토리 덕분에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또, 전에 읽은 장편(‘금색기계’, ‘멸망의 정원’)과 단편집(‘야시’, ‘가을의 감옥’) 모두
특별한 시공간과 거기에 휘말린 평범한 인물들의 괴담들을 그린 매력적인 작품들이었지만
‘천둥의 계절’은 쓰네카와 고타로의 단편의 매력과 장편의 힘이 골고루 잘 배어든 작품입니다.
판타지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쓰네카와 고타로의 작품만큼은 놓치지 않고 읽게 되는 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장르물 최고의 덕목을 ‘재미’와 ‘여운’으로 여기는 제가 그의 작품에 빠져드는 걸 보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마성과도 같은 특별함이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극단적으론 황당한 만화처럼 여길 독자도 있겠지만
단편집인 ‘야시’를 흥미롭게 읽은 독자라면 여지없이 빠져들 게 확실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