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트 오브 테러
힐러리 로댐 클린턴.루이즈 페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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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미디어 제국의 수장인 50대 후반의 엘런 애덤스가 새 정부 초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자 모두 놀랍니다. 경선 당시 자신을 지독하게 공격했던 엘런을 임명한 신임 대통령 윌리엄스의 결정도, 그 임명을 수락한 엘런의 결정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둘 사이는 견원지간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모종의 함정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장관직을 받아들인 엘런은 어떻게든 난국을 헤쳐 나가려 하지만 유럽에서 잇달아 폭탄테러가 벌어지고, 거기에 중동의 테러리스트와 러시아 마피아는 물론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내 극우조직까지 관련된 게 밝혀지자 혼란에 휩싸입니다. 전용기를 타고 유럽, 중동, 러시아를 날아다니며 테러의 배후와 궁극적인 목표를 조사하던 엘런은 미국을 향한 끔찍하고 명백한 공격 계획을 알게 되자 엄청난 충격에 빠집니다.

 

대통령이 될 뻔한 베테랑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과 캐나다의 조용한 마을을 무대로 한 서정적인 미스터리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작가 루이즈 페니가 함께 소설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호기심이 일었는데, 그 소설이 테러를 소재로 한 정치 스릴러라는 걸 알곤 놀람과 함께 고개가 갸웃거려진 게 사실입니다. 영부인,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역임한 힐러리가 재임 중에 겪었던 일을 자서전으로 펴낸 거라면 몰라도, 루이즈 페니와 함께 ‘미치 랩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테러-액션-정치 스릴러를 썼다는 건 만우절 농담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테이트 오브 테러’는 제목 그대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테러의 위협에 처한 미국의 상황을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엘런 애덤스는 누가 봐도 힐러리 클린턴의 분신입니다. 거대 미디어 제국의 수장이었다는 이력만 빼면 거침없이 폭주하던 ‘열혈 국무장관 힐러리’의 모습이 수시로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전용기를 타고 테러 현장은 물론 관련 국가들의 수장을 만나기 위해 직접 발로 뛰는가 하면, 다소 무기력해보이기까지 한 미국 대통령을 향해 충고와 독설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완급을 조절한 외교술과 능란한 정치적 판단, 그리고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능력까지 겸비한 엘런은 미국을 향한 테러 계획을 밝혀내고 배후의 세력들을 발본색원하며 마치 중년여성으로 환생한 미치 랩을 보는 듯한 인상까지 뿜어냅니다.

 

엘런 외에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각국의 수장들은 누구라도 그 모델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노골적으로 묘사됩니다. 막가파 식 정치와 외교로 미국을 혼란에 빠뜨린 전직 대통령 트럼프, 러시아의 패권을 노리는 세계적 문제아 푸틴, 그리고 이란의 전설적 지도자 호메이니 등이 그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들 외에도 힐러리의 오랜 친구와 그 가족이 중요한 인물로 소설에 등장한다는 점, 또 루이즈 페니가 창조한 캐나다 스리 파인스의 유쾌한 경감 아르망 가마슈가 막판에 카메오로 꽤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점입니다.

 

세계를 무대로 삼을 만큼 스케일도 크고, 미국 본토를 향한 어마어마한 테러 계획이나 백악관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갈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된 점은 힐러리의 경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테러-액션-정치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가운데 부드럽고 섬세한 문장들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루이즈 페니의 공이 분명합니다. 두 사람의 협업이 적잖은 분량임에도 단번에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건 맞지만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아쉬운 점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판을 너무 크고 복잡하게 펼치느라 정작 단순하고 확실해야 할 요소들이 불분명하거나 모호해졌다는 점입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전용기를 타고 바삐 날아다니는 엘런을 쫓아가다가도 “지금 엘런의 목표는 뭐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고, 중동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가 얽힌 테러 계획의 전체적인 그림이 문득문득 흐릿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디테일이 스케일의 무게에 짓눌렸다고 할까요? ‘스테이트 오브 테러’ 못잖은 서사 속에서도 주인공과 악당, 동기와 목표, 계획과 실행이 선명하게 그려진 ‘미치 랩 시리즈’가 단순하고 확실한 설정 덕분에 한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던 점과 확연히 비교되는 대목인데, 평점에서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이 불분명함과 모호함 탓입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해소된 뒤 엘런은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을 테러의 위협을 피부로 절감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을 ‘엘런 애덤스 시리즈’의 예고편으로 여기는 건 지나친 기대감이겠지만, 혹시라도 후속작이 나온다면 스케일과 복잡함보다는 ‘단순하고 확실한 설정’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거침없는 국무장관 엘런의 매력도 훨씬 더 강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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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타 돈코츠 라멘즈
키사키 치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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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취업한 회사가 알고 보니 살인청부회사라는 걸 알게 된 사이토는 6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도쿄 본사에 투입되지만 큰 실수를 저질러 후쿠오카 지점으로 좌천됩니다. 그 무렵 후쿠오카는 시장 선거를 앞두고 킬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던 시점. 3선을 노리는 현직 시장은 암흑가와의 긴밀한 유착관계를 통해 권력 기반을 다져왔고 이번 선거 역시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었지만, 개망나니 아들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시장에게 직속 고용된 킬러들은 선거 경호에 아들 문제까지 해결하느라 초죽음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괴짜 탐정, 어리바리한 신참 킬러, 킬러를 죽이는 킬러, 조직과 정면대결을 선언한 중국계 킬러 등 여러 인물들이 얽혀들면서 사방팔방에 피와 살이 난무하는 참상이 벌어집니다.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는 먹방 콘텐츠 같은 제목에다 라노벨 스타일의 표지 때문에 애초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작품인데, 우연히 ‘살인청부업자 이야기’란 걸 알게 돼서 뒤늦게 찾아 읽게 됐습니다. 일본에서는 2014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10편(외전 격의 단편집과 콜라보 작품은 제외)이 출간됐지만 한국엔 4편(2018년)까지 출간되곤 더 이상 소식이 없는데, 그래도 나름 화제성도 엿보였고, 특히 살인청부업자 이야기라면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라서 기대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5년 전에 후쿠오카의 하카타에 머물면서 1주일 정도 규슈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래선지 “후쿠오카 인구의 3%가 킬러”라는 설정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작가는 ‘저자 후기’를 통해 팩트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이 작품 속의 후쿠오카는 본토 업자는 물론 해외에서 유입된 폭력조직과 살인청부업자가 경쟁적으로 살인을 벌이는 무시무시한 공간으로 설정돼있습니다.

 

킬러들의 대결과 합종연횡을 그리다 보니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시장에게 직속 고용된 4인조 킬러, 인신매매를 주업으로 하는 중국계 신흥 조직,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모토에 따라 활동하는 복수대행업자, 그리고 어눌해 보이지만 뛰어난 정보망과 지략을 갖춘 괴짜 탐정 반바와 전혀 소질이 보이지 않는 허당 신참 킬러 사이토가 그들입니다.

서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들은 몇몇 사건이 우연과 필연을 통해 이어지면서 정면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후쿠오카의 킬러라면 누구나 들어본 적 있는 도시전설과도 같은 ‘코로시야코로시야’(殺し屋殺し屋)가 등장합니다. “악행을 지나치게 저지른 킬러는 그가 처단한다.”는 소문과 함께 니와카사무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는 탈을 쓰고 장검을 휘두르는 천하무적 킬러인데, 정작 그를 제대로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어서 더 신비감을 고조시킵니다.

 

킬러 이야기라는 속성 탓에 너무나도 쉽고 가볍게 사람들이 죽어나가서 현실감도 떨어지고 불편함이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입니다.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사건도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데 충실하게 설정돼있는데, 가장 눈길을 끈 건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던 적잖은 킬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사건들을 통해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짜임새 있는 구성입니다. 라노벨 스타일의 쉽고 단순한 문장들 때문에 전체적으로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 빈틈없이 촘촘하게 설계된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독자의 흥미를 고조시켜줍니다. 그리고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확실하고 통쾌하게 악을 응징하는 엔딩은 비록 주인공들 대부분이 킬러 혹은 폭력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자들이라 해도 짜릿한 쾌감을 남겨줘서 오락물로서의 미덕을 십분 발휘하고 있습니다.

 

킬러들의 이야기면서 왜 제목이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일까, 궁금했는데, 그 사연은 마지막에 공개됩니다. 살인에 얽힌 위험천만한 인물들이 소박한 ‘원 팀’이 된다는 설정은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미끼입니다. 가끔 킬링 타임용 오락물이 생각날 때면 남은 시리즈들을 읽어볼 생각인데, OTT에 올라와있는 애니메이션 역시 기회가 되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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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째 농담 중인 고가티 할머니
레베카 하디먼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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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일랜드 가족 3대가 펼치는 전대미문의 애정 활극”이란 카피가 눈에 쏙 들어온 작품입니다. 이 카피를 보자마자 떠오른 건 중국 작가 디안의 ‘개처럼 싸우고 꽃처럼 아끼고’였는데, 한국형 막장드라마를 지독하게 확장시킨 듯한 다소 거칠고 요란한, 하지만 진저리 칠 정도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기질적으로 다소 시니컬하고 다혈질이며 배타적이라고 알고 있는 아일랜드의 가족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그려졌을까 무척 궁금해졌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83세의 할머니라는 점 때문에 호기심이 더 일었습니다.

 

밀리 고가티는 남편과 사별한 83세의 할머니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순간의 스릴을 위해 필요도 없는 것들을 슬쩍하는 좀도둑 기질과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심통을 부리는 짜증나는 버릇이 있고, 그 어떤 가벼운 대화든 최소한 40~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하는 등 여전히 질풍노도 한복판을 사는 인물입니다. 아무에게나 거침없이 말을 걸고, 상대가 가족이든 아니든 무례할 정도로 이것저것 요구하며,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예사이고 상황이 불리할 땐 치매노인으로 즉각 변신하는 ‘악동’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밀리보다 무려 67년이나 어리지만 악동 기질에 관한 한 쌍벽을 이루는 인물은 16살 소녀 에이딘입니다. 역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밀리의 손녀인 그녀는 “모든 부모의 악몽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사춘기 여자아이”입니다. 미모와 능력에서 너무나도 뛰어난데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쌍둥이 언니 누알라를 ‘원수’로 여기는 에이딘은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든 가족에게 거침없이 퍼붓습니다. 특히 아빠 케빈은 에이딘의 ‘밥’이나 다름없습니다. 말하자면 평범한 사춘기를 뛰어넘는 극한의 트러블메이커라고 할까요?

 

“세상에 못마땅한 것투성이고 속칭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에 항상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불필요한 재앙을 자초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밀리와 에이딘이지만, 두 사람 모두 실은 무척 소심하고 연약한 성격입니다. 밀리는 첫 아기를 잃어버린 상심과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고, 에이딘은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사방팔방에 분노를 터뜨리며 위악을 떨긴 해도 딱 그 또래의 소녀일 뿐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하나는 양로원에서, 또 하나는 기숙학교에서 본인들이 원치 않는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 각각의 유배지를 벗어나 기막힌 모험을 감행하면서 동료가 되고 동지가 되고 예전과는 다른 할머니-손녀 관계를 이루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골자입니다.

 

밀리와 에이딘의 ‘공동의 적’은 바로 밀리의 아들이자 에이딘의 아버지인 케빈입니다. 평생 해오던 잡지 일에서 해고당한 뒤 전업주부가 된 그는 여행업계에서 승승장구하며 야근과 출장을 거듭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자괴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말문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어머니와 말썽쟁이 딸에게 유독 예민하게 구는 건 그런 그의 처지와 결코 무관하진 않습니다.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딸을 기숙학교로 유배 보내긴 했어도 결코 비열하거나 못된 인간은 아니지만, 그 스트레스를 엉뚱하게 자기 나이 절반도 안 되는 여학교 행정직원과의 불륜 로망으로 풀어볼까, 궁리하는 소심한 악당인 건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는 영어 F로 시작하는 욕을 번역한 ‘ㅆㅂ’이란 단어가 무수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욕이 등장할 때마다 웃음이 튀어나옵니다. 진짜 욕 하고 싶겠다, 라는 공감 때문이기도 하고, 그 상황을 깔끔하게 대변하는 유일한 수식어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이 단어가 이 작품의 제목이었어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언제 어느 부위가 찢어질지 모르는 누더기로 만든 옷처럼 위태로운” 고가티 가족은 일대 소동을 거쳐 다시 한자리에 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포장되진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처음보다는 조금은 편하게 웃을 수 있게 됐고 마음도 가벼워지긴 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라도 다시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인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찢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누더기를 봉합해낸 83살 밀리와 16살 에이딘의 분투는 독자에게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들어줍니다.

 

끝으로, 아일랜드 특유의 유머와 유려하면서도 눈에 쏙 들어오는 작가의 매력적인 문장은 주인공들의 분투를 빛나게 만든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특히 한없이 길게 늘어져도 전혀 어렵지 않게 읽혔던 문장들은 작가의 힘이자 번역자의 공이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으로 데뷔한 레베카 하디먼이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들고 독자를 찾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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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 마이크 해머 시리즈 3 ㅣ 밀리언셀러 클럽 32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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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마이크 해머와 함께 호텔방에 묵었던 친구가 밤사이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문제는 해머는 만취하여 아무 것도 기억 못한다는 점, 또 사용된 총기가 하필 해머의 것이란 점입니다. 평소 해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검사는 그를 용의선상에 올린 것은 물론 탐정 면허까지 취소시키지만 최종적으론 자살로 결론짓습니다. 해머는 친구의 죽음이 결코 자살이 아니라고 확신하며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하는데, 친구의 행적과 근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근 새롭게 떠오른 관광지이자 불법 도박과 매춘이 은밀히 이뤄지는 구역, 그리고 한 파티에서 친구와 동행했던 모델과 그녀가 속한 에이전시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사가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사이, 해머에 대한 살해 시도가 연이어 벌어지는 것은 물론 예기치 못한 시체들이 발견되면서 해머는 오히려 용의자로 쫓기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복수는 나의 것’(원제 ‘Vengeance Is Mine’)은 한국에 출간된 ‘마이크 해머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20년 가까이 후속작 소식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남은 시리즈를 만나긴 어려울 것 같지만, 희대의 폭주탐정 마이크 해머의 이야기를 세 편이나마 만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마이크 해머 시리즈’는 1947~1996년에 걸쳐 모두 13편이 출간됐습니다.)

 

“난 살인자들을 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살인자를 쏘아 그 피가 바닥에 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다. 살인을 하고도 빠져나가는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p263)

 

이 시리즈의 첫 편 제목인 ‘내가 심판한다’(원제 ‘I, The Jury’)는 탐정 마이크 해머의 캐릭터를 한눈에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소신과 함께 “살인자에겐 재판 따위 필요 없고 내가 직접 응징하고 처단한다.”는 행동원칙을 가진 해머는 매번 45구경 권총을 거침없이 쏘아대며 폭주탐정의 매력을 발산합니다. 경찰과의 트러블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라도 그가 삐끗하기만을 기다리는 검찰과의 신경전도 해머의 폭주를 전혀 막지 못합니다.

 

그런 해머가 이번에는 ‘복수는 나의 것’이란 제목대로 앞선 두 편보다 훨씬 더 강렬한 에너지를 장착합니다. 피살자가 5년 만에 재회한 친구란 점, 살인용의자로 지목당해 탐정 면허까지 빼앗긴 점, 수사 도중 연이어 피습을 당한 점, 그리고 사건관련자들이 줄줄이 살해되는 점 등 해머에게 복수와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재료들은 그야말로 넘쳐날 정도로 많습니다.

약간의 우연과 행운, 생각지 못했던 정보들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긴 했지만 해머의 추리 역시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합니다. 몇 차례의 반전 끝에 진범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해머는 오해와 섣부른 판단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작가는 해머가 단지 ‘거침없이 총만 쏴대는 무력꾼’이 아니라 나름의 혜안과 추리력을 겸비한 명탐정임을 여러 차례 입증해보입니다.

 

해머에게는 두 명의 중요한 조연이 있는데, 하나는 절친이자 뉴욕경찰 강력반 반장인 패트릭 체임버스(일명 팻)이고, 또 하나는 밀당의 로맨스를 주고받는 비서 벨다 스탈링입니다. 뛰어난 능력자인 해머를 경찰에 영입하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했다가 거절만 당해온 팻은 매번 해머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잘 해야 본전도 못 찾는 캐릭터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자신의 직을 걸고 해머를 돕는 강수를 두기도 합니다. 탐정면허까지 가진 매력적인 비서 벨다 역시 그동안 다소 애매한 수준에 머물던 해머와의 밀당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가 하면, 모처럼 사무실을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전력을 다해 해머의 수사를 도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다만, 앞선 두 편과 마찬가지로 해머의 수사는 간혹 뜬금없는 비약과 개연성 부족한 급진전 때문에 몇몇 대목에서 위화감을 자아내곤 합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설계해놓은 경로대로 인물과 사건이 움직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복수는 나의 것’은 전작들에 비해 그런 경향이 좀더 노골적이어서 초반부터 좀 헤맨 게 사실입니다. 주인공의 매력과는 무관하게 미스터리 서사 자체가 살짝 허술해 보인 건 가장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1950년에 출간된 작품이라 과학수사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이 오로지 아날로그 방식으로 싸워야하는 해머의 처지가 안쓰러워 보이곤 하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해머의 카리스마와 매력이 더 빛났는지도 모릅니다. 이후 해머가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어떻게 성장해나갔는지 알 길은 요원하지만, 그래도 ‘하드보일드의 살아있는 신화’라 불리는 ‘마이크 해머 시리즈’가 언젠가는 한국에서 재조명받을 수도 있을 거란 기대를 쉽게 포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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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친의 유언장
신카와 호타테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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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제약회사의 후계자인 모리카와 에이지가 “내 전 재산을 나를 죽인 범인에게 줄 것!”이라는 기묘한 유언장을 남긴 채 3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독감으로 인한 병사(病死)로 확정됐지만 회사는 유언에 따라 ‘범인 선출전’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십억 엔이 걸린 만큼 노숙자부터 샐러리맨에 이르기까지 너도 나도 범인임을 자처하고 나서자 언론마저 관심을 갖기에 이릅니다. “돈이 최고!”라는 신조를 가진 변호사 켄모치 레이코는 학창시절 에이지와 잠깐 사귄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에이지의 친구인 시노다를 앞세워 그의 대리인 자격으로 범인 선출전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일은 갈수록 꼬이고 유언장이 사라지는가 하면 의문의 살인사건까지 벌어지자 레이코는 작심하고 에이지의 죽음의 비밀을 캐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죽인 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요절한 제약회사 후계자의 유언도 파격적이지만,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의 유산 상속 미스터리”라는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28살의 뛰어난 변호사 켄모치 레이코입니다. 남친의 프로포즈 반지가 고작 40만 엔짜리라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걷어차는가 하면, 초대형 로펌에서 동기들 가운데 최고의 대우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보너스 삭감을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여기곤 거침없이 사표를 집어던지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가 황당해 보일 뿐인 ‘범인 선출전’에 나선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학창시절 잠시나마 에이지와 사귄 적이 있다는 인연이고, 또 하나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에이지의 재산이 훨씬 많으며 ‘범인’으로 선출된다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남을 만한 엄청난 성공보수를 챙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거대 제약회사가 ‘범인 선출전’을 강행하는 진짜 이유가 에이지의 유언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남긴 재산의 향방에 따라 회사 내 경영권 다툼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눈치 챈 레이코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전략으로 ‘범인 선출전’에서 우위를 점합니다.

하지만 일이 묘하게 돌아가면서 레이코는 본의 아니게 에이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에이지의 죽음이 자살 혹은 타살일 가능성까지 제기됐고,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회사 사람들은 물론 에이지가 머물던 별장 인근의 인물들, 그가 사귀었던 전 여친들까지 가세하면서 유산상속전은 그야말로 복마전으로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에이지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도 전부 제각각이고, 거기다가 살인, 불륜, 야합, 출생의 비밀 등 통속극에 나올 법한 소재들이 총동원되어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전개됩니다. 에이지가 남긴 유언 자체도 황당하고, 주인공이 돈에 미친 젊은 변호사라는 설정도 기승전결 따윈 무시한 B급 코미디 설정 같아서 초반부터 계속 위화감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야기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계속 이리저리 꺾이다 보니 마치 엄청난 속도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듯 어질어질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어지러운 느낌만큼이나 “도대체 어떻게 결론이 날까?”라는 기대감도 함께 들었는데, 레이코가 밝혀낸 유언장의 진실과 살인사건 미스터리는 반쯤은 박수를 보낼 만큼 깔끔하고 신통했지만, 반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상속, 지분, 세금 같은 용어들만 나오면 갑자기 까막눈이 되는 저의 무지함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에이지의 유언장에 담긴 진실을 모자람 없이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도쿄대 법대 출신의 전직 변호사인 작가가 나름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려 했지만 저 같은 독자에겐 역시 무리였다고 할까요?

 

이 작품은 미스터리의 미덕 외에도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 레이코가 제대로 된 변호사로 변모하는 일종의 성장소설의 매력도 갖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희대의 악녀 같지만, 실은 레이코는 변호사로서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몰랐던 탓에 엉뚱하게 돈을 추구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 레이코가 유산상속전을 거치며 여러 사람과 갈등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낸 셈인데, 그 변신의 계기가 다소 억지스럽고 계몽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테마도 잘 소화해낸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살짝 4차원의 향기도 나는 이 작품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정공법보다는 B급 코믹 미스터리에 더 어울려 보이는데, 혹시라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놓치지 않고 꼭 볼 생각입니다. 다만, 진지한 미스터리물로 각색된다면 잠시 고민하게 될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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