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놀이공원의 살인
샤센도 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더블샷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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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인 2001년, 가오픈 첫날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해 단 3시간여 만에 문을 닫은 비운의 놀이공원 일루전 랜드. 이후 폐허처럼 방치된 이곳을 사들인 괴짜 부호 도시마 이오리가 과거 놀이공원 관계자들과 폐허 마니아 등 10명을 초대합니다. “보물을 찾는 자에게 일루전 랜드를 넘기겠다.”는 도시마 이오리의 제안에 일행은 잠시 들뜨기도 하지만, 한 남자가 참혹하게 살해당하면서 일루전 랜드는 다시 한 번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으로 탈바꿈합니다. 연이어 살인이 벌어지는 와중에 20년 전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참가자들은 도시마 이오리가 자신들을 초대한 목적이 따로 있음을 감지합니다.



아쓰카와 다쓰미와 함께 출간한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샤센도 유키입니다. 앞서 ‘낙원은 탐정의 부재’에 도전했다가 판타지에 가까운 설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적이 있는데,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의 좋은 기억과 함께 ‘폐허를 무대로 한 미스터리’라는 홍보글에 눈길이 끌려서 이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샤센도 유키는 93년생 작가지만 검색해보면 엄청난 출간목록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한국에는 非미스터리 포함 모두 일곱 편이 소개됐습니다)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괴짜 부호의 초대장을 받고 지금은 폐허가 돼버린 일루전 랜드를 찾은 10명의 방문객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엽기적인 살인에 큰 충격을 받곤 진범을 찾는 이야기가 메인 스토리지만, 독자의 관심을 더 끄는 대목은 20년 전에 벌어진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의 이면에 숨은 가혹하면서도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놀이공원이 들어설 땅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아마쓰키촌 주민들의 피눈물을 짜낸 뒤 들어선 일루전 랜드가 총기 난사 사건으로 가오픈 3시간 만에 문을 닫고 20년 간 폐허로 방치됐다는 건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데, 작가는 거대한 클로즈드 서클이나 다름없는 일루전 랜드에서의 연쇄살인사건과 20년 전의 비극을 잘 직조함으로써 단순히 놀라운 트릭만 앞세운 본격 미스터리 이상의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에 수록된 샤센도 유키의 ‘흔한 잠’에 대해 “애틋하고 안쓰러운 여운을 남기는 감성적인 미스터리”라는 평을 쓴 적이 있는데, ‘폐놀이공원의 살인’ 역시 미스터리 자체보다 20년 전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


다만, 막판에 ‘탐정역’을 맡은 주인공 마가미 에이타로가 연쇄살인사건의 진상을 풀어내는 부분에선 역시 제 취향과는 좀 거리가 먼 억지스러움이 느껴져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범인의 범행동기도, 또 그렇게 복잡한 살인을 벌여야만 했던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은 됐지만, “과연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일까?”라는 반문이 계속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이른바 ‘시마다 소지 스타일의 본격 미스터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저 같은 독자라면 비슷한 경험을 할 수도 있는데,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주고도 남을 만큼 열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저자 후기’를 통해 샤센도 유키는 괴짜 부호 도시마 이오리를 앞세운 ‘폐허 탐정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음을 밝혔는데, 한번쯤 더 샤센도 유키에게 재도전 해볼지 여부는 좀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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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은 모두 피를 흘리리
S. A. 코스비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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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만 명이 채 안 되는 카론카운티에서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흑인졸업생 라트렐이 모두에게 존경받는 백인교사 제프 스피어먼을 살해한 뒤 그 자신은 부보안관들에 의해 사살된 것입니다. 카운티 최초의 흑인보안관인 타이터스 크라운은 사건 직후 스피어먼의 휴대폰에서 라트렐과 제3의 남자가 공모한 끔찍한 아동학대와 고문살인 영상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무려 일곱 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의 시신까지 찾아냅니다. 문제는 제3의 남자를 특정할 만한 단서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런데 수사가 진행되면서 타이터스가 유력한 참고인으로 여긴 자들이 하나둘씩 참혹하게 살해당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한 탕에 운명을 건 범죄차량 드라이버의 하이스트 누아르와 상처투성이 가족사가 잘 버무려진 '검은 황무지', 살해당한 흑백 동성부부의 아버지들이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벌이는 통렬한 복수 스릴러이자 감동적인 가족 이야기인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등 S. A. 코스비의 전작들은 수사기관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는, 가족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한 스릴러였던 반면, 이 작품은 카론카운티 최초의 흑인보안관인 36살의  타이터스 크라운의 원맨쇼에 가까운 연쇄살인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물론 타이터스의 가족사가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조연 정도일 뿐이고, 가족의 비극이 타이터스에게 미치는 영향 역시 소소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S. A. 코스비의 첫 범죄수사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여전히 미국 남부에 만연한 인종차별과 혐오,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의 폐해가 작품 전반에 깔려 있어서 이야기의 무게를 한층 더 무겁고 묵직하게 만듭니다.


주인공 타이터스는 그야말로 어둠과 상처에 매몰된 인물입니다. 12년간의 FBI요원 생활을 접게 만든 끔찍한 사건의 트라우마, 어머니의 죽음이 남긴 신에 대한 증오심과 ‘질서’에 대한 집착, 흑백 양쪽으로부터 냉소와 비아냥만 살 뿐인 흑인보안관으로서의 위태로운 정체성, 그리고 인종차별의 상징인 남부연합이 여전히 날뛰고 있는 고향 카론카운티에 대한 애증 등 보통사람이라면 망가져도 꽤 심하게 망가졌을 고통스런 과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이기에 10대를 상대로 한 엽기적인 고문살인사건과 제3의 남자에 의해 자행되는 연쇄살인사건은 단순한 임무 이상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 와중에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들, 즉 가족과 연인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고든 미세한 균열은 물론 카운티를 지배하는 백인 권력자들과의 갈등까지 떠맡게 된 탓에 타이터스의 어둠과 상처는 점점 더 짙어질 뿐입니다.


한국에 첫 소개된 ‘검은 황무지’ 단 한 편으로 팬이 됐고,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역시 무척 재미있게 읽어서 3년 만에 한국에 소개된 신작 역시 큰 기대감을 가졌지만 이번엔 아쉬움이 크게 남은 게 사실입니다. 물론 S. A. 코스비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문학성 짙은 문장들은 단숨에 눈길을 끌었지만, 연쇄살인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의 재미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타이터스의 원맨쇼’라는 언급을 했지만, 보안관으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그의 과거와 현재는 딱히 매력적이지 않았고, 수사과정 역시 너무 정직하게만 흘러가서 긴장감을 느낄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의 가족과 연인과 이웃, 그리고 함께 수사에 참여하는 부보안관들의 캐릭터도 다소 형식적이고 산만하게 설정돼서 전작들과는 달리 ‘병풍’ 이상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궁금증이 별로 일지 않은 게 가장 큰 아쉬움이었는데, 막판에 진범의 정체와 동기가 밝혀지는 대목에서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만찬에 오른 메뉴들은 전작 못잖게 풍성했지만 그 조합과 맛이 기대에 비해 엉성하고 양념이 덜 밴 느낌이랄까요?


검색해보니 2025년에 그의 네 번째 장편인 ‘King of Ashes’가 출간됐습니다. 빠르면 내년쯤 한국에 소개될 것으로 보이는데, 신작에서는 S. A. 코스비의 진가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선 그의 두 작품은 평소 야박한 평점을 주는 제가 정말 기분 좋게 별 5개를 줄 정도로 매력적인 스릴러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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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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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잡지 편집자였지만 지금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일감 찾기에 골몰하던 고바야시는 유튜브 호러 동영상을 검색하다가 그 자신은 유령을 믿지 않지만 심령 스팟 방문기로 나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케다를 발견하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떠올립니다. 신관 집안의 딸로 유령을 보는 능력을 지닌 작가 호조까지 불러들인 고바야시는 이케다의 영상에 적당히 날조한 괴담과 소문을 버무리기로 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연일 회의를 거듭합니다. 사진이 잔뜩 버려진 폐가, 유령을 만날 수 있다는 폐병원, 저주를 부르는 임신부의 그림이 그려진 폐호텔 등 이케다가 찾았던 심령 스팟들 가운데 인기를 끌 만한 곳들을 선정한 세 사람은 각자 조사를 벌이는데, 그 와중에 각자의 어두운 과거 속 유령들과 조우하며 뜻밖의 상황에 처합니다.



최근 가장 인상 깊게 읽은 호러물은 정통 쪽보다는 이른바 특수설정을 내세운 작품들로 세스지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우케쓰의 ‘이상한 집 시리즈’입니다. 스즈키 코지, 미쓰다 신조, 사와무라 이치의 정통 호러물도 좋아하지만, 낯설고 산만하면서도 아주 조금씩 냉기를 느끼게 만들다가 한 발 늦은 공포심을 만끽하게 하는 세스지와 우케쓰의 특수설정 호러는 전혀 색다른 재미와 여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두 개의 축으로 이뤄진 이야기입니다. 고바야시, 이케다, 호조 등 세 사람이 순전히 돈을 벌 목적으로 세 곳의 심령 스팟에 관한 괴담과 소문을 날조하는 것이 하나이고, 과거 이기심과 악의 때문에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던 세 사람의 어두운 과거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모든 이야기에 저주와 악의가 깃든 유령이 등장하고 그 유령의 정체에 관한 불온한 사연들이 펼쳐지지만, 사실 그것들 자체는 읽는 순간엔 딱히 무섭진 않습니다. 그런데 세 곳의 심령 스팟의 유령 이야기와 세 명의 과거 속 유령 이야기가 실은 묘하게 공통점을 지녔다는 점을 인식하는 순간 호러물로서의 매력이 제 맛을 내기 시작합니다. 또한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가 중후반부에 소개되면서 다시 한 번 이야기는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그랬지만, 이 작품 역시 일반적인 기승전결 구조와는 거리가 멉니다. 물론 세 사람의 괴담 비즈니스가 착착 진행되고, 각자의 과거와 현재가 그려지며, 특히 유령을 믿지 않으면서도 심령 스팟 유튜버를 자처해온 이케다의 비밀이 드러나는 등 전작에 비해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전개가 이어지지만, 실은 짧게 나뉜 각 챕터들이 마치 독립된 호러물처럼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긴 장편이라기보다 재미있는 단편집을 읽은 느낌이었습니다.


내용과 형식 모두 특별한데다 간혹 어렵게 읽히는 구간도 있고, 무엇보다 구조 자체가 2중 3중으로 돼있어서 개별 괴담들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선지 호러물임에도 불구하고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느린 속도로 한번쯤 더 읽어야 그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침 전작의 내용 일부가 개작된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두 번째 기록’이 최근 출간됐다고 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났는데,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약간의 공백을 둔 뒤 날씨가 서늘해질 무렵쯤 조금은 다른 분위기에서 재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사족 :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번역했던 전선영의 ‘역자후기’는 이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재독을 결심한 이유도 ‘역자후기’ 덕분인데, 놓치지 말고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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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모
프리다 맥파든 지음, 박지현 옮김 / 북플라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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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는 모든 걸 가졌다. 잘나가는 직업, 능력 있고 잘생긴 남편. 하지만 딱 하나 가질 수 없는 게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아이. 아이를 갖기 위한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다. 모든 걸 포기하려던 순간, 비서인 모니카가 애비의 꿈을 이뤄 줄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자신이 대리모가 되어주겠다는 것이다.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애비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제안은 곧 악몽으로 바뀌고 만다. 임신에 성공한 모니카는 더 이상 애비가 아는 착한 비서가 아니었다. 남편과 점점 가까워지고, 애비를 함정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모니카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었다. 그게 살인일지라도.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얼마 전에 대리모를 소재로 한 기리노 나쓰오의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를 읽고, 최근 한국에서 핫한 스릴러 작가인 프리다 맥파든은 같은 소재를 어떤 스타일로 다뤘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하우스 메이드 시리즈’를 통해 도메스틱 스릴러의 진면목을 보여줬던 프리다 맥파든이기에 한국이나 일본작가와는 전혀 다른 정서의 대리모 이야기를 풀어낼 거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스타일은 그녀의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쉽고 빠르게 읽히는 문장들, 잘 만들어진 도메스틱 스릴러 특유의 긴장감, 등장인물은 단출하지만 개성 있고 선명한 캐릭터 등 프리다 맥파든의 장기가 금세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설마 이런 식으로?”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다소 무리한 설정과 억지스런 전개에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름 반전도 연이어 터지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술술 넘어가긴 하지만, 뭐랄까, 지금까지 읽은 그녀의 작품들과 비교하자면 좀 안이하게 급조된 인상을 받았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대리모라는 설정 자체가 깊이감이라곤 전혀 없이 그저 도구적으로만 사용된 부분이 아쉬웠고, 주인공과 조연을 막론하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이나 행태도 자연스럽지 못한, 그러니까 작가가 가리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인형처럼 보여서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고 읽는 도중에 자꾸만 뒤로 물러서게 되곤 했습니다. (내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건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출판사 소개글이 사실상 내용의 전부이고, 또 하나는 설정 자체가 단순해서 한두 가지 팩트만 언급해도 대형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입니다)


2023년 ‘핸디맨’(개정판은 ‘잠겨진 문’) 이후 3년 여 만에 한국에 소개된 작품만 19편일 정도로(2026년엔 7월까지만 무려 11편이 출간됐습니다) 핫한 작가라서 구글에서 검색을 해본 적이 있는데, ‘대리모’는 현지에서 2018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을 통틀어서) 프리다 맥파든의 비교적 초기작에 속합니다. 한국에서 워낙 화제가 되다 보니 다소 평가가 떨어지는 그녀의 초기작까지 출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선지 나름 작가로서 변곡점을 맞이한 ‘하우스 메이드 시리즈’ 이전의 작품들은 좀 선별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까지 여섯 편밖에 읽진 못했지만, ‘하우스 메이드 시리즈’를 제외하면 ‘네버 라이’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그 작품 역시 ‘하우스 메이드’ 1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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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루민
오카베 에쓰 지음, 최현영 옮김 / 리드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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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분과 목적을 감춘 채 유명 에세이 작가 나카이 루민의 지인들을 인터뷰합니다. 그녀의 초중학교 동창은 물론 그녀가 운영하는 온라인 살롱 멤버들과 출판 관계자 등 10여 명이 인터뷰에 응하는데, 루민에 대한 그들의 진술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 준 은인이자 존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녀는 악마 그 자체라며 격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과거 사건을 놓고도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루민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요?



이 작품의 원제는 ‘무서운 친구’(怖いトモダチ)인데, 개인적으론 ‘내가 아는 루민’이라는 번역제목이 훨씬 더 내용과 작의를 잘 압축해놓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평가와 의견을 내놓았을지, 과연 진짜 루민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궁금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본문 전에 소개되는 (인터뷰에 참가한 사람들의 의견 요약본인) ‘등장인물의 한마디’는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와 의견이 나오는 게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의구심까지 품게 만듭니다. 신분과 목적을 감춘 채 루민에 대해 묻고 다니는 ‘나’의 정체 역시 막판까지 독자의 관심을 끄는 설정입니다.


루민 덕분에 희망과 행복을 만끽했다는 옹호론자 대부분은 에세이 작가로 성공한 루민이 이끄는 온라인 살롱 멤버들입니다. 루민의 에세이를 읽은 뒤 암울한 현재를 극복하고 내일을 살아갈 의지를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과거 학창시절부터 작가로 성공하기 전까지의 그녀를 아는 인물들 대부분은 악마 또는 사이코패스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짓밟았는지, 또 교묘한 화술과 행동으로 상대의 삶 자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지를 격한 감정과 함께 토로합니다. 


재미있는 건 이 엇갈린 진술들이 매번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애정도, 그녀를 악마라 부르는 자들의 증오도 모두 진심어린 감정으로 그려지다 보니 어떻게 한 사람이 두 가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지, 어느 쪽이 그녀의 진실에 가까운 건지 그저 위화감과 궁금증만 커질 뿐입니다. 


미스터리로 분류되긴 했지만 이 작품의 장르는 ‘고발 르포’ 혹은 ‘인간관계에 대한 묵직한 에세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미스터리 서사와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 루민 같은 사람이 있진 않을까, 혹시 나는 루민 같은 사람이 아닐까,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라는 서늘함을 만끽할 수 있어서 각별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번역제목에서 ‘루민’을 빼고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면 이 서늘함을 좀더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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