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지은 모두 피를 흘리리
S. A. 코스비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구 2만 명이 채 안 되는 카론카운티에서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흑인졸업생 라트렐이 모두에게 존경받는 백인교사 제프 스피어먼을 살해한 뒤 그 자신은 부보안관들에 의해 사살된 것입니다. 카운티 최초의 흑인보안관인 타이터스 크라운은 사건 직후 스피어먼의 휴대폰에서 라트렐과 제3의 남자가 공모한 끔찍한 아동학대와 고문살인 영상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무려 일곱 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의 시신까지 찾아냅니다. 문제는 제3의 남자를 특정할 만한 단서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런데 수사가 진행되면서 타이터스가 유력한 참고인으로 여긴 자들이 하나둘씩 참혹하게 살해당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한 탕에 운명을 건 범죄차량 드라이버의 하이스트 누아르와 상처투성이 가족사가 잘 버무려진 '검은 황무지', 살해당한 흑백 동성부부의 아버지들이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벌이는 통렬한 복수 스릴러이자 감동적인 가족 이야기인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등 S. A. 코스비의 전작들은 수사기관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는, 가족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한 스릴러였던 반면, 이 작품은 카론카운티 최초의 흑인보안관인 36살의  타이터스 크라운의 원맨쇼에 가까운 연쇄살인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물론 타이터스의 가족사가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조연 정도일 뿐이고, 가족의 비극이 타이터스에게 미치는 영향 역시 소소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S. A. 코스비의 첫 범죄수사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여전히 미국 남부에 만연한 인종차별과 혐오,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의 폐해가 작품 전반에 깔려 있어서 이야기의 무게를 한층 더 무겁고 묵직하게 만듭니다.


주인공 타이터스는 그야말로 어둠과 상처에 매몰된 인물입니다. 12년간의 FBI요원 생활을 접게 만든 끔찍한 사건의 트라우마, 어머니의 죽음이 남긴 신에 대한 증오심과 ‘질서’에 대한 집착, 흑백 양쪽으로부터 냉소와 비아냥만 살 뿐인 흑인보안관으로서의 위태로운 정체성, 그리고 인종차별의 상징인 남부연합이 여전히 날뛰고 있는 고향 카론카운티에 대한 애증 등 보통사람이라면 망가져도 꽤 심하게 망가졌을 고통스런 과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이기에 10대를 상대로 한 엽기적인 고문살인사건과 제3의 남자에 의해 자행되는 연쇄살인사건은 단순한 임무 이상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 와중에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들, 즉 가족과 연인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고든 미세한 균열은 물론 카운티를 지배하는 백인 권력자들과의 갈등까지 떠맡게 된 탓에 타이터스의 어둠과 상처는 점점 더 짙어질 뿐입니다.


한국에 첫 소개된 ‘검은 황무지’ 단 한 편으로 팬이 됐고,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역시 무척 재미있게 읽어서 3년 만에 한국에 소개된 신작 역시 큰 기대감을 가졌지만 이번엔 아쉬움이 크게 남은 게 사실입니다. 물론 S. A. 코스비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문학성 짙은 문장들은 단숨에 눈길을 끌었지만, 연쇄살인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의 재미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타이터스의 원맨쇼’라는 언급을 했지만, 보안관으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그의 과거와 현재는 딱히 매력적이지 않았고, 수사과정 역시 너무 정직하게만 흘러가서 긴장감을 느낄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의 가족과 연인과 이웃, 그리고 함께 수사에 참여하는 부보안관들의 캐릭터도 다소 형식적이고 산만하게 설정돼서 전작들과는 달리 ‘병풍’ 이상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궁금증이 별로 일지 않은 게 가장 큰 아쉬움이었는데, 막판에 진범의 정체와 동기가 밝혀지는 대목에서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만찬에 오른 메뉴들은 전작 못잖게 풍성했지만 그 조합과 맛이 기대에 비해 엉성하고 양념이 덜 밴 느낌이랄까요?


검색해보니 2025년에 그의 네 번째 장편인 ‘King of Ashes’가 출간됐습니다. 빠르면 내년쯤 한국에 소개될 것으로 보이는데, 신작에서는 S. A. 코스비의 진가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선 그의 두 작품은 평소 야박한 평점을 주는 제가 정말 기분 좋게 별 5개를 줄 정도로 매력적인 스릴러였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