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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12월
평점 :
오컬트 잡지 편집자였지만 지금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일감 찾기에 골몰하던 고바야시는 유튜브 호러 동영상을 검색하다가 그 자신은 유령을 믿지 않지만 심령 스팟 방문기로 나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케다를 발견하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떠올립니다. 신관 집안의 딸로 유령을 보는 능력을 지닌 작가 호조까지 불러들인 고바야시는 이케다의 영상에 적당히 날조한 괴담과 소문을 버무리기로 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연일 회의를 거듭합니다. 사진이 잔뜩 버려진 폐가, 유령을 만날 수 있다는 폐병원, 저주를 부르는 임신부의 그림이 그려진 폐호텔 등 이케다가 찾았던 심령 스팟들 가운데 인기를 끌 만한 곳들을 선정한 세 사람은 각자 조사를 벌이는데, 그 와중에 각자의 어두운 과거 속 유령들과 조우하며 뜻밖의 상황에 처합니다.

최근 가장 인상 깊게 읽은 호러물은 정통 쪽보다는 이른바 특수설정을 내세운 작품들로 세스지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우케쓰의 ‘이상한 집 시리즈’입니다. 스즈키 코지, 미쓰다 신조, 사와무라 이치의 정통 호러물도 좋아하지만, 낯설고 산만하면서도 아주 조금씩 냉기를 느끼게 만들다가 한 발 늦은 공포심을 만끽하게 하는 세스지와 우케쓰의 특수설정 호러는 전혀 색다른 재미와 여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두 개의 축으로 이뤄진 이야기입니다. 고바야시, 이케다, 호조 등 세 사람이 순전히 돈을 벌 목적으로 세 곳의 심령 스팟에 관한 괴담과 소문을 날조하는 것이 하나이고, 과거 이기심과 악의 때문에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던 세 사람의 어두운 과거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모든 이야기에 저주와 악의가 깃든 유령이 등장하고 그 유령의 정체에 관한 불온한 사연들이 펼쳐지지만, 사실 그것들 자체는 읽는 순간엔 딱히 무섭진 않습니다. 그런데 세 곳의 심령 스팟의 유령 이야기와 세 명의 과거 속 유령 이야기가 실은 묘하게 공통점을 지녔다는 점을 인식하는 순간 호러물로서의 매력이 제 맛을 내기 시작합니다. 또한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가 중후반부에 소개되면서 다시 한 번 이야기는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그랬지만, 이 작품 역시 일반적인 기승전결 구조와는 거리가 멉니다. 물론 세 사람의 괴담 비즈니스가 착착 진행되고, 각자의 과거와 현재가 그려지며, 특히 유령을 믿지 않으면서도 심령 스팟 유튜버를 자처해온 이케다의 비밀이 드러나는 등 전작에 비해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전개가 이어지지만, 실은 짧게 나뉜 각 챕터들이 마치 독립된 호러물처럼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긴 장편이라기보다 재미있는 단편집을 읽은 느낌이었습니다.
내용과 형식 모두 특별한데다 간혹 어렵게 읽히는 구간도 있고, 무엇보다 구조 자체가 2중 3중으로 돼있어서 개별 괴담들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선지 호러물임에도 불구하고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느린 속도로 한번쯤 더 읽어야 그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침 전작의 내용 일부가 개작된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두 번째 기록’이 최근 출간됐다고 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났는데,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약간의 공백을 둔 뒤 날씨가 서늘해질 무렵쯤 조금은 다른 분위기에서 재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사족 :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번역했던 전선영의 ‘역자후기’는 이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재독을 결심한 이유도 ‘역자후기’ 덕분인데, 놓치지 말고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